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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127화 (128/171)

제127화. 역설의 미학 (4)

제라니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없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제라니아에게 에드윈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 생각을 해보신 적 없습니까. 왕비님이 걸어가는 길에, 국왕 폐하의 의지가 관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야살스럽게 속삭이는 음성이 제라니아의 발목을 휘감았다. 작디작은 의심의 씨앗이 발치에 뿌려졌다.

에드윈이 한 걸음 다가왔다. 살짝 고개를 숙여 눈높이를 맞추는 그의 시선이 다정다감했다. 어떤 고민이든 진지하게 들어주고 공감해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햇빛이 들지 않는 방, 실처럼 이어지는 긴장감, 고요한 숨소리가 침묵과 한데 엉켜들어 갔다.

“과한 것은 없느니만 못하죠. 왕비님께서는 좀 더 자유로워지실 수 있습니다.”

짐짓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남자는 손을 뻗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러나 어깨에 손이 닿기 전, 제라니아는 사뿐히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차분히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에 에드윈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손을 거둬들였다.

“왕비님?”

“딱 당신 같은 남자를 하나 알고 있어요.”

“저 같은 남자?”

떨리는 눈가를 감추고자, 제라니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정한 인상에 말주변이 좋고, 눈치가 빨라서 상대가 무얼 바라는지도 잘 파악하죠.”

천천히 좁혀지는 거리를 의식하지 못하다가, 알아채고 났을 때는 휘말려 있는.

“그리고, 그런 자신의 매력을 누구보다 잘 이용해요. 바로 당신처럼요.”

바람둥이의 정석이라는 말까지 덧붙이진 않은 이유는, 지금 묘사하는 상대가 자신의 혈육이었기 때문이다.

대답 대신 공백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는 에드윈을 보며 제라니아는 은색 뱀을 떠올렸다.

순해 보인다고 방심하는 순간 입을 쩍 벌리고 독니를 드러내어 상대를 물어뜯는, 그런 뱀.

“혹 문제가 생기더라도 그건 나와 국왕 폐하 사이의 일이에요.”

그의 행동이 월권이라 지적하자, 에드윈은 지지 않고 반박했다.

“…지금의 자신이 자유롭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시는군요.”

제라니아가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남자는 꼭 그만큼 따라왔다. 먹이를 노리며 거리를 재는 것처럼 위협적이면서도 단정한 걸음걸이로.

“나는 내가 앉아 있는 자리의 무게를 알고 있을 뿐이에요. 중요한 협상이 걸린 와중에, 일국의 왕비에게 무례를 저지르는 누구와는 다르게 말이죠.”

등에 푹신한 커튼의 감촉이 느껴졌다. 태연하게 맞받아치는 제라니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드윈이 소리 내어 웃었다.

“반대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중요하다는 걸 알기에, 이 정도 일로 쉬이 깨지지는 않을 거라 계산하고 있는 거라고.

제 등 뒤에 있는 커튼을 더듬어 쥐었다. 그가 더 다가오려던 순간, 뒤돌아선 제라니아가 눈을 감고 있는 힘껏 커튼을 잡아당겼다.

커튼이 양쪽으로 쫙 펼쳐지면서 햇빛이 방 안으로 들이쳤다. 갑작스레 환해진 시야에 에드윈은 팔을 뻗어 눈가를 가렸다. 햇빛이 그의 허리께를 덮었다.

철컹, 소리와 함께 제 옷자락을 건들고 지나가는 바람에 에드윈은 들고 있던 팔을 내렸다. 활짝 열린 창문을 등 뒤에 두고, 새하얀 햇살에 감싸 안긴 여인은 마치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보였다.

“죄송한데,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그 말을 던지고 제라니아는 창틀에 발을 디뎠다. 드레스 차림으로도 무리 없이 창틀을 넘어 밖으로 튀어 나가는 모습이 퍽 익숙해 보였다.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고 뛰어가듯 사라지는 뒷모습을 에드윈은 다소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뭐야, 저 여자…?”

한참을 부지런히 걷자 사람들이 모여 있는 정원이 나타났다. 그제야 제라니아는 살짝 가빠오는 숨을 정돈했다.

쫓아오지 않아서 다행이다.

드레스 자락을 꽉 쥐고 있는 손이 파르르 떨렸다. 도망치는 느낌을 주고 싶지 않았는데 잘되었을까. 여차하면 호신용으로 가지고 있는 마법 도구를 꺼낼까도 생각했지만, 상대의 몸에 상해를 입혔다간 그것대로 외교 문제가 된다.

무례를 저지른 건 저쪽인데 왜 자신이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걸까. 불합리한 상황에 한숨만 늘어갔다.

제게 쏠리는 시선들에 제라니아는 재빨리 미소를 지었다. 침착하게, 침착하게. 프란츠를 찾아 몇 개의 테이블을 스쳐 지나가던 제라니아는 문득 제 귓가를 스치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언뜻 들어보니 국왕 폐하께서 타국의 왕녀를 울렸다, 숙녀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도 손수건 한 장 건네주지 않으셨다더라, 뭐 이런 이야기인 것 같았다. 제라니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프란츠가?’

무뚝뚝하기는 하지만, 구태여 남을 작정하고 울릴 만큼 성격이 못돼먹지는 않았는데.

별일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도 수군거리는 사람이 상당한 것이 심상치 않았다. 누구를 붙잡고 자세한 상황을 물어봐야 하나. 고민에 빠진 제라니아의 어깨를 누군가가 턱 붙잡았다.

깜짝 놀라 돌아보자, 살짝 발그레한 얼굴이 제라니아를 보며 히죽 웃고 있었다.

“코디?”

“깜짝 놀랐지!”

얘 대체 몇 잔을 마신 거지. 제라니아는 손을 뻗어 코델리아의 양 뺨을 감쌌다.

조금 뜨끈했다. 차가운 손의 감촉이 좋은지 코델리아는 배시시 웃었다. 귀엽긴 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언니는 어쩌고 여기 있어?”

주변을 휙휙 돌아보던 코델리아가 손바닥으로 입가를 감싸며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붉어진 얼굴과 달리 발음은 놀랍도록 정확했다.

“나 지금은 못 돌아가. 잔소리 대마왕이 왔거든.”

그 한마디에 제라니아는 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프레드릭이 왔구나.

저보다 열 살가량 나이가 많은 큰오빠를 떠올리며 코델리아는 떫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오빠는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를 닮아간다며 질색하는 동생의 손에서 잔을 뺏어 들고, 근처를 지나가던 시종에게 손짓한 제라니아가 물이 담긴 컵을 받아 코델리아에게 건넸다.

시원한 물을 꼴깍 마시는 코델리아를 지그시 바라보던 제라니아가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어쨌거나, 마침 잘 만났다.”

“응?”

어리벙벙한 얼굴을 한 동생에게 제라니아는 간결하게 용건을 말했다.

“연회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 좀 부탁할게.”

술을 물처럼 마시는 막내와 달리, 칼리아는 술을 못했다. 두 잔 이상 마시면 취하는 제 주량을 아는지라 그는 연회에서 음료나 물 말고는 입에 대어본 적이 없었다.

올리비아 왕녀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걸 봤을 때는 좀 놀랐다. 상황을 알아봐야겠다고 홀연히 사라진 코델리아를 기다리며 칼리아는 벽에 기대어 음료를 홀짝였다.

그사이 몇 명의 남자들이 다가왔지만 전부 거절하고 돌려보냈다. 혼자 서 있으니 어째 말을 거는 사람이 더 늘어나는 것 같다. 여자들과는 제법 대화를 나누기는 했지만 그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사람은 어째서 무리 지어 다니는 걸 좋아하는 걸까. 관심 좀 꺼줬으면 좋겠는데.

남들이 알면 재수 없다고 말할 생각을 속으로 중얼거리던 칼리아의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발치에 보이는 바지와 신발을 보니 남자인 듯했다. 고개를 들지도 않고 칼리아는 제법 짜증을 담아 말했다.

“시간 없는데요.”

“나한테 내줄 시간도 없어?”

웃음기가 담긴 음성이 무척 익숙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빙그레 웃고 있는 서른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보였다. 제 옆에 기대는 오라버니에게 칼리아는 무던하게 인사를 건넸다.

“의외네. 오늘은 불참할 줄 알았는데.”

프레드릭이 피식 웃으며 들고 있던 술잔을 흔들었다.

“걱정돼서 와준 오라버니한테 말이 너무 짧은 거 아니냐.”

벌써 소문이 이 인간의 귀에까지 들어갔나. 칼리아가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그래, 그런 인간이 동생을 그렇게 달달 볶아대나 싶네.”

“공사는 구분해야지. 나는 그 애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프레드릭이 저를 힐끔거리는 여성들에게 다정하게 웃으며 눈짓했다. 작게 탄성을 내지르며 속닥거리는 이들을 힐끔 쳐다보던 칼리아가 가볍게 혀를 찼다.

“그새 또 수작을 걸었어?”

“수작이라니, 말이 거칠구나. 교류를 했을 뿐이란다.”

“교류 좋아하시네. 결혼한 게 언제인데, 제발 적당히 좀 하지 그래.”

칼리아는 눈을 흘겼다. 눈앞의 인간은 보수적인 주제에 제 딴에는 인생을 열심히 즐기는 이중적인 면모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 여성 편력을 생각하면 지금은 양반이라 칭할 만은 했다. 그때는 남의 여자한테는 손대지 않는다는 철칙을 제외하면 망아지가 따로 없었다.

결혼하고 나서도 이 모양이니, 파멜라가 순한 성격이 아니었다면 진작 한 번은 머리채가 쥐어뜯겼을 것이다.

“호감을 얻어둬서 나쁠 건 없어. 언젠가 다 쓸모가 생기지.”

언제 봐도 이해가 안 되는 사고방식에 칼리아는 침묵을 택했다. 갑자기 튀어나와서 이게 무슨 헛소리인지.

“그리고, 인기가 좋은 건 너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방금 한 생각 취소.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보아하니 이번에도 다 퇴짜를 놓은 듯한데. 아무리 여성이 정숙해야 한다지만, 넌 너무 결벽적이야.”

잔에 담겨 있는 붉은 액체가 건들건들 움직이는 프레드릭의 손길을 따라 출렁거렸다.

“아버지 속 좀 그만 썩이지 그래? 물론 넌 지금도 아름답지만, 미모는 영원하지 않잖아. 구혼자가 있을 때 해결해야지, 언제까지 결혼을 미룰 생각이야? 아버지 건강 안 좋으신 거 알면서.”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가 그를 타이르듯 말했다. 칼리아는 잔을 입에 가져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자신을 바보로 아는 건지. 보통 여인은 혼기가 차기 전 시집을 가지 못하면 신관이나 되어야 할 팔자라지만 자신은 공작의 자식이었다. 재산만 있다면 일흔 먹은 노인네든, 사십이 넘은 여인에게든 알랑거리는 인간은 널리고 널렸다.

“릭, 날 가지고 장사라도 하고 싶어?”

세력을 확장하고 싶어서, 아직 어린 딸들 대신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냐. 그런 의미를 담아 묻자 프레드릭은 가만히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갈색 머리칼이 그의 손아귀에 감겨들었다.

“순수하게 걱정돼서 하는 말이다만.”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오지랖 부리지 마.”

“까칠하기는.”

술을 한 모금 마시며 프레드릭이 넌지시 말했다.

“혹시,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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