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역설의 미학 (3)
지겨웠다.
프란츠는 제 앞에 서 있는 작은 여인을 감흥 없이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적당히 인간을 마주하는 시늉이라도 했겠지만, 그럴 기분이 나지 않았다. 평판이야 좀 말아먹어도 괜찮았다. 오히려 그렇게라도 해야지 이 지긋지긋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이상 결혼에는 뜻이 없다고 충분히 피력했는데도 이 모양이라니. 금수도 이 정도로 반복하면 알아듣는 시늉이라도 할 텐데.
아이들이라도 있으면 이 지루함이 조금은 덜했을지도 모르지만, 제니스는 사람 많은 곳을 싫어했고 아이라는 오빠를 챙기겠답시고 궁에 남았다. 하긴 어린애들이 재미있어할 만한 자리는 아니었다.
그는 오랜만에 제 어깨에 매달린 국왕이라는 직위가 무겁다고 느꼈다. 다 떠나서, 유일하게 잘해주고 싶은 사람이 곁에 없으니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제라니아가 자리를 떠난 뒤, 에드윈 라이네까지 어딘가로 가버린 덕분에 여인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
홀로 남은 왕녀에게 말을 걸고 싶어 하는 듯한 남자들의 시선이 상당했으나 그는 제 옆을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멀찍이서 저를 지켜보는 이들을 보니 마치 우리에 갇힌 동물이 된 기분이었다. 예전에는 무덤덤하게 넘겼던 것들에 왜 이리 짜증이 나는 걸까.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조심스레 묻는 목소리에 프란츠는 힐끔 시선을 내렸다. 금빛이 영롱한 시드르가 담긴 잔을 꼭 쥐고 있는 올리비아의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프란츠는 인내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는 필요하지 않은 일에 감정을 터트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냉철한 이성은 눈앞의 여인이 이 문제와는 상관없다는 사실을 피력했다.
이건 국가 대 국가의 문제였고, 유일한 상속자가 아닌 이상 혼사에 여인의 의사가 반영되는 일은 적었다. 이미 아내가 있는 남자에게 팔려 오듯 격에 맞지도 않는 혼인을 하고 싶어 하는 귀족 여성이 있을 리가 없었다.
다만, 상대가 제게 이렇게 관심을 보이리라는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상관이 있으면 안 되나요?”
당돌하게 말하는 올리비아를 바라보며 프란츠는 천천히 눈초리를 접어 웃었다. 어머니를 닮아 화사한 미모를 가진 남자의 입술이 서서히 움직였다.
“예, 관심도 없는 상대에게 시간을 쏟는 성격이 아니라서.”
작게 속삭이는, 건조하기 짝이 없는 음성에 올리비아는 제 귀를 의심했다. 다정한 미소와 달리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이질감을 자아냈다.
제 키를 한참 뛰어넘는 체격이 자못 위협적으로 보였다. 긴장한 듯 올리비아의 손이 들고 있던 잔을 꼭 쥐었다.
“…제가 아름답지 않으세요?”
올리비아는 용기 있게 질문했다. 여인은 제가 남한테 어떻게 보이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칭송받아온 미모였다. 데뷔탕트에서는 사람들의 시선을 독차지했으며, 구혼자의 수 역시 발에 차일 만큼 많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혼담은 올리비아에게는 더없이 모욕적인 일이었다.
자신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데다, 이미 아내에 자식까지 있는 타국의 국왕이라니. 재취여도 기절할 판인데 상대가 혼담을 거절하겠다 에둘러 말했다는 사실에는 기가 막혔다.
혼담에 관해 듣고, 황망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는 올리비아를 달래기 위해 국왕 부처와 왕자들은 안간힘을 써야 했다.
‘사절로 보낸 이들이 말하길, 크레이츠의 지금 국왕은 무척 잘생기고 유능한 남자라고 하더구나.’
‘올리비아, 늘 그러지 않았니. 적어도 네 오라버니보다는 잘난 사람이 좋다고 말이야.’
‘들리는 소문에는 제법 점잖은 이라고 하던데, 다행이지 뭡니까. 선대 국왕은 호탕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여자를 밝혀서….’
좋은 게 좋은 거라 말하는 가족들에게 묻고 싶었다.
언니들은 다 좋은 남편을 만나 잘 살고 있는데, 왜 저는 제 오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남자한테 시집가야만 하나요?
그렇게 되묻기에 올리비아는 온순하고 마음이 약했다. 나름대로 반항을 했지만, 결국 왕족으로서의 의무를 이야기하는 아버지를 이기지는 못했다. 눈물짓는 시녀들의 배웅을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상대가 이 결혼에 뜻이 없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제 얼굴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라는 가족들의 말이 두려웠지만, 어떻게든 결혼을 피하고자 노력하기로 했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서 오십시오. 프란츠 리나엔입니다.’
그 생각은 마차에서 내려, 국왕으로 보이는 남자를 보자마자 온데간데없이 날아가 버렸다.
햇살이 부서지는 것처럼 찬란한 금색 머리카락과 화가의 손길이 닿은 듯한 섬세하고 아름다운 얼굴, 우락부락한 기사들과 달리 적당히 근육이 붙은 몸, 목소리까지도 살짝 낮은 미성이었다. 우아하다는 말이 잘 어울렸다.
올리비아는 살면서 이토록 근사한 남자를 만난 적이 없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해서 딱 자신의 취향이었다. 저도 모르게 상대를 빤히 쳐다보는 결례를 저지를 정도였다.
물론 이성으로는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상형이 앞에 있는데 들뜨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지나치게 차가웠다. 이쪽의 속셈을 꿰뚫어 보고 경계한다고 생각해도 너무 매정하다.
그렇게까지 내가 싫은가? 하지만 어째서?
“객관적인 평가를 바라는 거라면, 아름답습니다.”
살짝 움트려는 용기를 남자의 다음 말이 가차 없이 꺾었다.
“내게 무엇을 바라든, 포기하는 게 나을 겁니다. 무엇도 이룰 수 없을 테니.”
“…….”
“이 결혼을 원하지 않는 건 피차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지루함을 걷어낸 눈동자가 흥미롭다는 듯 올리비아를 응시했다. 마른 고목처럼 생기가 없던 남자에게서 물을 뿌린 것처럼 생동감이 돌았다. 매정한 말만 하지만 자신을 윽박지르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래서, 올리비아는 손에 쥐고 있던 시드르를 꼴깍 한 모금 삼키고 입을 열었다.
“제가 아름답다고 하셨는데, 왜 저를 원하지 않으세요?”
“…….”
“아름다운 것을 원하는 건 사람의 본능이잖아요.”
대범한 질문을 던지는 여인의 눈동자가 생기롭게 반짝거렸다. 프란츠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가, 대답했다.
“옳습니다. 하나 그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지요.”
그에게 세상의 기준은 크게 의미가 없었다. 필요하니 맞춰서 생각할 뿐이었다.
“당신은 분명 아름답지만, 그걸 알아줄 수 있는 이는 내가 아닙니다.”
프란츠는 문득 떠올렸다. 여인과 비슷한 나이에 제라니아를 만났다는 사실을.
당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국왕이 죽은 순간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 채로 죽지 못해 살아갔겠지. 따분하고 단조로운 인생을 걸으면서도 그게 무엇이 문제냐고 생각했을 것이다.
평범하게 하루를 보내고, 내일을 기대하고. 미래를 기약하는 자신이 여전히 낯설었다. 잔잔하기만 하던 감정이 국자로 휘젓는 것처럼 종잡을 수 없이 변해가는 감각은,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실감하게 했다.
새파랗던 눈동자가 물을 탄 듯 차차 투명해졌다. 답지 않게 감상에 젖은 탓인지 프란츠는 조금 더 솔직해졌다.
“나는 당신이 그렇게까지 매달릴 만한 가치가 없는 인간입니다. 지금의 상황이 당황스럽긴 하나, 아직은 당신에게 책임을 물을 생각이 없습니다.”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그럴 수 있다는 서늘한 경고가 올리비아의 피부를 훑고 지나갔다.
“만약, 국왕 폐하께서 결혼을 하시지 않았다면요?”
그래도 나한테 이렇게 매정했을까? 그렇게 묻는 올리비아에게 프란츠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올리비아 왕녀. 의미 없는 가정 따위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건 지금이니까요.”
아름다운 자색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으나, 프란츠는 조용히 외면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제라니아는 저를 붙든 손을 뿌리쳤다. 커튼을 쳐두어서 그런지 제법 어둑한 방이었다. 닫힌 문에 등을 기대고 있는 상대를 마주 보았다.
“에드윈 왕자.”
“이런, 놀라게 해드렸나요?”
그의 손이 닿지 않을 거리만큼 뒤로 물러선 제라니아의 시선이 재빨리 방 안을 훑었다. 휴게실로 보이는 공간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지요?”
“실례했습니다. 지나가시는 걸 보고 저도 모르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표하면서도 에드윈은 문에서 비킬 생각이 없어 보였다.
“비켜주세요.”
“왜 그렇게 서두르십니까?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요.”
“…….”
“아, 국왕 폐하께 들킬까 봐 염려하시는 건가요.”
제라니아는 조용히 질문했다.
“그분과 이 상황이 무슨 상관인가요?”
“그거야, 국왕 폐하께서는 왕비님을 아끼시잖습니까. 단순히 관심 좀 보였다고 눈빛이 살벌해지는 걸 보면 말이죠.”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시치미를 떼는 제라니아를 지그시 바라보는 에드윈의 눈가가 초승달처럼 곱게 휘어졌다.
“정말 모르셨습니까? 환영식에서부터 오늘까지 쭉 그랬는데. 오늘도 왕비님을 계속 옆에 끼고 있지 않았습니까. 마치 내 것이라고 과시하는 것처럼요.”
사흘이란 기간은 어느 정도 궁의 분위기를 파악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시녀들 몇을 살살 구슬리기만 해도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었다.
사실 국왕보다는 왕비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조용하고 얌전한 천성이라 들은 것에 비해 그간 왕비가 주도한 정책들은 꽤나 공격적이었다.
왕비에 대한 이야기도 간혹 흘러나오기는 했지만, 사생활에 대해서는 마땅히 건져낼 만한 게 없었다. 아무래도 국왕이 워낙 화려해서 묻히는 건가.
처음에는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눈치를 보는 시녀의 모습에 곧 깨달았다. 정보가 없는 게 아니라 통제되고 있다는 걸. ‘말할 수 있는 사실’과 ‘말해서는 안 되는 사실’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었고, 왕비에 대한 이야기는 후자에 속했다.
주체가 누구인지는 뻔했다. 국왕이겠지. 한편으로는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나 의문이 들기도 했다.
이토록 은근하게만 견제를 표할 필요가 있나. 욕망을 감추고 점잖은 체하는 게 귀족의 미덕이라 하지만.
“답답하지 않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