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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125화 (126/171)
  • 제125화. 역설의 미학 (2)

    새하얀 제복을 입은 남자가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며 우아하게 손을 내밀었다. 어쩔 수 없이 그 위에 손을 겹치며 제라니아는 남자의 이름을 차분히 읊조렸다.

    “에드윈 전하.”

    “편하게 에드라고 불러주셔도 됩니다.”

    내밀어진 손등에 살며시 입맞춤을 남기는 그의 눈가가 곱게 휘어졌다. 주변에서 작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도 그럴 게, 그는 누구나 한 번쯤은 떠올릴 동화 속의 왕자님 그 자체였다.

    결례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재빨리 손을 빼내면서 제라니아는 길을 막아선 채 비킬 기미가 없어 보이는 에드윈의 모습에 난감해졌다.

    남자는 더없이 정중한 듯싶으면서도 친근하게 굴었다. 여동생을 챙길 때나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다정한 성격이라 봐도 좋을 듯했다.

    하지만, 환영식 때 제게 눈웃음을 치던 얼굴을 떠올리면 제라니아는 지금도 등골이 서늘했다. 억지로라도 웃어야 하는 자리인데도 점점 표정이 굳어가는 프란츠를 겨우 달래 분위기를 수습했었다.

    그런 쪽으로는 눈치가 없는 건지, 다 계산된 행동인지 애매모호했다.

    얼핏 보기에는 루이스와 비슷했다. 유해 보이는 외양에다 제게 미적지근한 호감을 표한다는 점이. 그렇지만 사람이 달라서일까, 받는 느낌이 미묘하게 달랐다.

    “길을 비켜주지 않겠어요?”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차분하게 말했다. 복도 한가운데서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눈치를 주자 남자는 그제야 알았다는 양 낮게 탄성을 토해냈다.

    “어디로 가시는 길이십니까?”

    “국왕 폐하를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집무실에 찾아가시는 거라면 지금은 안 계시던데요. 오늘은 일찍 업무를 마무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제라니아는 저도 모르게 창문 쪽을 돌아보았다. 아직 밖은 밝았고, 저녁 식사까지 넉넉하게 한 시간은 남아 있었다. 웬일로 벌써 업무를 끝냈지?

    “바쁘시지 않다면, 잠깐만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은데요.”

    공손한 권유에도 제라니아는 딱 잘라 거절했다. 그는 초조한 듯이 눈을 깜빡거렸다.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정말 안 되겠습니까?”

    단정하게 뻗은 눈꼬리가 축 내려갔다. 제법 처량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은발의 미남자가 여인에게 매달리는 모습은 뭇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여기서 재차 거절하면 저기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또 무슨 말을 퍼트릴지 몰랐다.

    어떻게든 자리를 피할까, 아니면 이대로 받아들여서 속셈이 무엇인지 탐색해보는 게 나을까.

    “복도 한가운데서 무얼 하십니까?”

    그때,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에드윈의 뒤로 잘 익은 체리처럼 짙붉은 머리색을 가진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제라니아는 그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유진 에스파.

    에스파 후작이 왜 여기에? 문득 피어오른 의문은 그가 들고 있는 종이뭉치와 함께 해소되었다. 서류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아 프란츠와 논의할 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유진은 양팔이 불룩하게 부풀어 있는 새까만 튜닉에 같은 색의 바지를 차려입고 있었다. 부드러운 인상이라 평해지는 얼굴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어서인지 신경질적인 느낌을 풍겼다.

    두 사람 앞으로 다가온 유진의 미간이 느른하게 풀어졌다. 언제 그랬냐는 양 상냥한 미소를 짓고서 에드윈에게 말을 걸었다.

    “그쪽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누구입니까?”

    “에드윈 라이네입니다.”

    “아아, 왕자님이셨군요.”

    자신을 간략히 소개하며 유진은 손을 내밀었다. 가볍게 악수를 나누는 에드윈은 웃고 있었지만 왠지 떨떠름해 보였다. 체격은 에드윈이 한참 컸지만 유진의 옷차림 때문인지 차이가 그렇게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손이 무척 부드러우시군요.”

    칭찬인 것 같으면서도, 기사 집안이면서 검을 휘두르지 않는 유진의 입장을 교묘하게 비꼬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유진은 싱긋 웃으며 응수했다.

    “그렇습니까? 검을 쥘 일이 없어서 말이지요. 존경하는 국왕 폐하의 치세를 만끽하고 있습니다.”

    상황을 흘리듯 넘긴 유진이 제라니아를 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그의 오른쪽 입가에 보조개가 피었다. 무슨 일로 왔냐고 묻자 유진은 차분하게 답했다.

    “국왕 폐하를 알현하러 왔습니다만, 이미 자리를 파하셨다고 들어 돌아가던 참이었습니다. 왕비님께서는 어인 일이십니까?”

    “저도 국왕 폐하께 가던 길이었습니다. 급한 일이라면 제가 대신 전해 드릴까요?”

    “호의에 감사드립니다만, 직접 뵙고 말씀드려야 하는 일이라 곤란합니다.”

    “그럼 같이 가시겠어요? 중요한 일이라면 가급적 빨리 전해 듣는 게 나을 테니까요.”

    “그래 주신다면 저야 감사드리죠.”

    넉살 좋게 대답하는 유진을 뒤로한 채 제라니아는 에드윈을 향해 한껏 미안한 표정을 꾸며냈다.

    “아무래도 오늘 이야기를 나누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먼저 실례해도 될까요?”

    “아닙니다. 내일 연회에서 뵙겠습니다.”

    국정 문제가 언급되어서 그런지 에드윈은 순순히 물러났다. 눈앞에서 퇴짜를 맞았는데도 그는 평연한 얼굴로 제라니아와 유진을 배웅했다.

    그를 지나쳐 걷기 시작하던 제라니아가 힐끔 눈을 들어 제 옆에서 걷고 있는 유진을 바라보았다. 예쁘게 말려 올라간 입매와 다르게 눈을 가늘게 좁히고 있는 그에게 말했다.

    “눈이 좋지 않으신가요?”

    “예? 아아. 그렇습니다. 보조기를 끼는데도 영 나아지지 않아서 말입니다.”

    유진은 피로한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넌지시 말했다.

    “그나저나, 제대로 말씀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포기한 것 같지 않던데.”

    “말을 맞춰줘서 고맙게 생각해요.”

    “저야 손해 볼 것 없으니까요.”

    그 자리를 빠져나올 구실로 자신을 활용한 걸 알면서도 유진은 아무렇지 않게 어깨만 으쓱였다.

    “인기가 많아도 피곤하겠구나 싶습니다.”

    “후작 각하께 듣기엔 퍽 민망한 이야기인데요.”

    결혼 전에도, 결혼한 후에도 사교계에서 제법 염문을 몰았던 그의 행실을 지적하자 유진은 “저는 못 먹을 포도에 열을 올리진 않습니다.”라고 대꾸했다.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던 중 국왕의 처소가 있는 복도로 들어서자 거짓말처럼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에 맞춰, 제라니아의 목소리가 유진에게만 들릴 만치 낮아졌다.

    “그러고 보니, 혹시 루이스 공자에게 무슨 일 있나요? 요즘 연락이 안 오더라고요.”

    그가 다스리는 영지는 클라단과 인접해 있었다. 혹 소식이 들린 게 있지 않을까 싶었으나 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저보단 윌터 경이나 샤를로테 경에게 묻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영지로 귀환한 윌터와 달리 샤를로테는 3년 전 수도로 상경해 왕실 기사단에서 복무 중이었다. 왕실 기사단에 소속된 최초의 여성 기사라 그런지, 한바탕 신고식을 거하게 치르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잘 적응하고 있는 듯했다.

    “윌터 경은 클라단에 내려가 있고, 샤를로테 경은 말하기 곤란하다고 해서요.”

    유진은 알 만하다는 듯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또 갇혀 있는 모양이군요.”

    “갇혀 있다고요?”

    “공자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해서 말입니다. 체벌을 하더라도 그 정도가 최선이라고 하더군요.”

    어릴 때 죽을 뻔했던 이후로 루이스 케라온에게 가해지는 체벌의 강도는 한층 낮아졌다. 공작이 딱히 자비를 베풀었다기보다는 명예의 문제였다.

    전투에서 공을 세우려다 목숨을 잃은 것도 아니고, 체벌을 받다가 기력이 다해 죽었다고 하기엔 가문의 체면이 서지 않으니까.

    “그렇지만 서른이 넘은 남자를 가둔다는 표현은, 좀 부자연스럽지 않나요?”

    처소 앞에 멈춰 선 제라니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걸까. 시종을 부르려던 그의 손목을 살며시 붙잡은 유진이 얼굴을 가까이 했다. 놀란 채로 그 자리에 멈춘 제라니아의 귓가에 나직한 속삭임이 닿았다.

    “힘 있는 자가 승리하고, 강한 자가 우위를 선점하며, 가지고 싶다면 거침없이 빼앗습니다.”

    주어가 없어도 무엇을 말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눈을 크게 뜨는 제라니아에게 유진은 의뭉스러운 미소를 내보였다.

    “부자연스럽다는 말의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요.”

    질문을 던지는 그의 말투는 느긋했으나, 태연한 얼굴은 잘 만든 가면처럼 인위적인 느낌이 났다.

    “공자의 시도는 언제 봐도 가상합니다만, 그건 마치 인간에게 개미가 말을 거는 것과 같죠. 손톱으로 눌러 죽이면 그만인 존재가 자꾸만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데, 죽이지 않고 내버려 둔다는 점에서 충분히 자비롭지 않습니까?”

    아프지 않게 제 손목을 단단히 틀어쥔 손의 무게를 느끼며 제라니아는 조용히 되물었다.

    “그래서, 내게 그것을 납득하라는 뜻인가요?”

    “아니요. 왕비님의 그런 관심이 공자에게 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

    “물과 기름이 섞일 수 있겠습니까. 경계를 긋고 공존하는 것이 최선일 텐데요.”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조언 고마워요. 하지만, 나는 물에 빠진 사람이 눈앞에 있다면 어떻게든 그 사람을 구해주고 싶어요. 둑이 무너져 나까지 휩쓸릴지 모른다는 걸 알아도.”

    단호하게 답하는 제라니아의 녹색 눈동자를 마주하며 유진은 조용히 입을 달싹거렸다.

    “…그렇군요.”

    짧은 대답과 함께, 남자는 언제 잡았냐는 듯이 손목을 놓고 양손을 들어 보였다.

    기다리고 있겠다 말하는 유진을 뒤에 남긴 채 제라니아는 처소로 들어갔다. 묘한 찜찜함이 그림자처럼 길게 늘어졌다.

    * * *

    “와, 사람 진짜 많네.”

    하나로 틀어 올린 머리카락과 화사한 연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코델리아가 들고 있던 와인을 쭉 들이켰다.

    “칼리아 공녀, 혹시 춤을 한 곡….”

    “지금은 내키지 않아서요.”

    가볍게 구혼자로 보이는 남자를 쫓아낸 칼리아가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바글바글한 인파를 피해 두 사람은 활짝 열린 창문 근처에 서 있었는데, 실내만이 아니라 야외 정원에도 테이블이 설치되어 있었다. 봄이라 그런지 따사로운 햇볕이 화려하게 피어 있는 화단으로 쏟아졌다.

    “그나저나 코디, 너 지금 몇 잔째 마시는 거니?”

    “괜찮아, 괜찮아. 이 정도 마신다고 취하진 않는다고.”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하려던 칼리아는 이내 포기하고 창문을 통해 야외로 시선을 옮겼다. 프란츠의 곁에서 인사를 받던 제라니아는 어디로 간 건지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왕녀로 보이는 여인이 열심히 말을 걸고 있었지만 국왕의 반응은 더없이 심드렁했다. 웃고 있었지만 대답하기 귀찮아하는 게 그를 잘 모르는 칼리아의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예쁘기는 했다. 은빛 머리카락에 화려한 보석이 달린 핀을 꽂은 모습이 설화에 나오는 작은 요정을 연상시켰다.

    사람들이 난리를 치던 이유가 이거였군. 지루한 사교계에서 새로운 가십이란 언제나 흥미로운 법이다. 눈만 내놓고 그들을 관찰하던 칼리아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림에 귀를 기울였다.

    “저런 미인이 저렇게까지 하는데, 어쩌면 저리도 냉정하실까.”

    “여인을 난처하게 하는 건 미덕이 아닐 텐데요. 선대 국왕 폐하를 생각하면….”

    “여러모로 선대와는 다르기는 하시지요. 왕궁이 이렇게 재미없어질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쉿, 들리겠습니다.”

    재미 좋아하네. 칼리아는 한숨을 쉬며 천천히 부채질을 했다. 사람이 많아서 더운 건지, 열 받아서 더운 건지 모르겠다.

    “저 꼴을 그만 보고 싶은데.”

    얘는 언제 돌아오는 건지.

    한편, 제라니아는 얼얼한 느낌에 귀를 어루만졌다.

    “누가 내 이야기를 하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가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화장실이 연회장에서 멀다 보니 한 번 오가는 데만 해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대부분의 귀족들이 연회장에 있어서 그런지 복도는 꽤 한산했다. 저 앞에 있는 모퉁이를 돌면 곧장 야외로 나가는 통로가 나온다. 걸음이 살며시 빨라졌다.

    모퉁이의 끝이 보이던 순간이었다.

    방문 중 하나가 열리고, 제라니아의 손목을 하얀 손이 덥석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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