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화. 역설의 미학 (1)
[이번에 왕국에서 사절단이 왔다지요?]
[소문은 익히 들었으나 그 이상으로 절색이더군요. 공국에서 온 공녀도 그렇고, 눈부시게 아름답더이다.]
[여인을 보냈다는 건, 역시 그런 뜻이겠지요?]
[이게 다 우리 왕국의 세가 드높다는 증거가 아니겠소.]
[올리비아 공주와 국왕 폐하께서 나란히 서 있는 걸 봤는데, 정말이지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아닐 수 없더군요.]
“…라니, 이 인간들이 미쳤나!”
과자를 와그작 씹어 먹는 코델리아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전투적으로 타르트를 우물거리는 동생의 잔에 칼리아가 차를 따라주었다. 코델리아가 적당히 식은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무슨 놈의 결혼이야! 언니가 있는데.”
제가 듣고 있다는 걸 알자마자 허둥지둥 자리를 피하던 수다쟁이들을 떠올리며 코델리아는 이를 갈았다.
“험한 말 쓰지 말랬지.”
너는 언제쯤에나 점잖아질 거냐며 칼리아는 잔소리를 했고, 제라니아는 느긋하게 찻잔을 들어 올렸다. 코델리아가 속이 터진다는 듯 제 가슴께를 두드렸다.
“언니는 왜 이렇게 태평해? 이게 남의 일도 아니고.”
“초조해할 이유가 있니?”
“초상화를 보내는 선이 아니라, 직접 온 걸 보면 뻔하지. 어떻게든 결혼을 성사시켜 보겠다는 뜻 아니겠어?”
“걱정 마. 프란츠는 안 그래.”
차를 마시려던 제라니아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자연스럽게 편한 호칭을 부른 제라니아의 얼굴을 두 사람이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는 태연한 척 찻잔을 입술에 댄 뒤 꿀꺽 차를 넘겼다.
“그, 러니까 폐하께서는 안 그러신다는 거지.”
나를 좋아한다고도 했고, 계약할 때부터 다른 사람은 볼 생각 없다고 했으니까.
“국왕 폐하는 그렇다 치고, 입을 막 놀리는 인간들은?”
“말은 늘 나왔잖아. 이제 와서 휘둘려봐야 얻는 게 뭐가 있겠니.”
7년 전 결혼을 발표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뒤에서 수군거리는 이들은 언제나 있었다. 여인이면서 기가 세다거나, 고분고분한 맛이 없다거나, 국왕 폐하와 비교하면 밋밋한 인상이라거나.
대놓고 앞에서 떠드는 이는 없었으나 소식이야 들리기 마련이었다. 이제 와서 신경 쓰는 게 더 우습지 않겠나.
“그건 그런데….”
“그리고 결혼을 한다 해도, 후궁으로 들어오게 될 텐데. 사실 국가 대 국가의 결혼이라고 치면 좀 이상해. 격을 생각하면 이건 명백하게 디나이안과 리하르타넨이 손해 보는 장사거든.”
동맹을 맺더라도 왕비로 보내는 게 보통일 텐데. 제가 버젓이 왕비로 있는 상태에서 굳이 결혼 동맹을 고집한다라.
생각에 잠긴 제라니아의 얼굴이 투명한 초록색 찻물 위로 은은하게 비쳤다.
“나를 내쫓을 생각인가? 아니면 귀천상혼을 염두에 두고 왕위 계승자 자리를 노리나?”
디나이안은 귀천상혼이 엄격한 나라에 속하므로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근래에는 제법 완화됐다지만 덕분에 근친혼이 제법 성행했던 시기도 있었다.
크레이츠는 타국에 비해 덜한 편이었지만 귀족이라면 어쨌거나 핏줄을 따지기 마련이었다. 일부다처제가 허락되는 이 나라에 사생아가 왜 생기겠나. 평민의 자식을 제 핏줄이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귀족들이 많아서였다.
후궁으로 들어오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그에게 아들이라도 생기면 일이 복잡해졌다. 계승을 두고 소위 개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자신이 공작의 직계라지만 타국의 군주와 비교하면 격이 부족하니까.
아니면 프란츠를 꼬드겨 결혼한 뒤 자신과의 이혼을 종용하려는 생각이거나. 여인에게 홀려 옆자리를 갈아치운 국왕의 선례가 없는 게 아니니 이 또한 신빙성이 없진 않았다.
물론, 어느 쪽이든 프란츠가 그 꼴을 볼 리가 없었다. 사실 지금 걱정인 건 다른 문제였다.
무서운 소리를 중얼거리며 곰곰이 찻잔을 내려다보고 있던 제라니아의 입에 고소한 비스킷이 쏙 들어왔다. 제가 준 과자를 우물거리는 제라니아를 보며 코델리아는 말끝을 흐렸다.
“좀 평범한 사랑의 고민을 할 수는 없는 거야, 언니…?”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에 코델리아는 알 만하다는 듯 눈을 흘겼다.
“솔직히 에반젤린 공녀는 모르겠지만, 올리비아 왕녀 쪽은 눈빛이 수상하다고.”
“그건 나도 동감이야.”
가만히 있던 칼리아까지 말을 얹자, 제라니아는 살며시 머뭇거리다 털어놓았다.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이 문제는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닌걸.”
“언니는 폐하의 정비잖아. 언니가 관여할 일이 아니면 누가 관여할 일인데?”
“국왕 폐하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치정 싸움을 바라는 이들에게 대놓고 먹이를 줄 순 없잖아.”
자신이 나서봐야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호사가들에게 입방아를 찧을 빌미를 건넬 뿐이다. 제라니아는 한순간의 기분으로 일을 키울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누가 언니보고 직접 나서래? 그냥 국왕 폐하한테 ‘저 말고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시는 건 싫어요.’ 한마디만 하면 되지 않아?”
“그건 안 돼.”
“왜?!”
“폐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외교고 뭐고 당장 내 눈앞에서 그 사람들을 치우려고 할 거야. 그래서는 안 되잖아.”
차를 호록 마시는 제라니아의 얼굴에 난감함이 가득 묻어났다. 칼리아와 코델리아는 할 말을 잃었다.
“진짜야?”
“응.”
제라니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프란츠는 국정을 논의할 때는 냉정하고 단호했으나, 이번 사절단 문제는 시작부터 낌새가 달랐다.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거절했음에도 구태여 여자들을 데려온 것에 그는 제법 화가 나 있었다.
이 상황에 자신까지 말을 얹었다간 정말로 그들을 국경 밖으로 내쫓아 버릴지도 모른다.
예전처럼 모든 문제를 마냥 무심하게 받아들이는 것보다야 한결 나았지만, 이건 이것대로 고민이었다. 프란츠가 평소보다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보기랑 많이 다르네.”
칼리아의 말에 제라니아는 하하 웃으며 뺨을 긁적거렸다. 온화하던 표정이 손바닥을 뒤집듯 진지하게 변했다.
“이번 조약은 중요해. 무사히 마무리되면 최소 10년간은 전쟁이 없는 치세를 이룰 수 있어. 지도자가 교체되는 게 아닌 이상.”
“헤리타는?”
“거긴 설득이 불가능하고.”
적어도 이번 대에는. 제라니아는 조용히 뒷말을 삼켰다.
헤리타 왕국을 다스리는 셀레만 왕조는 온 대륙에 악명이 자자한 이들이었다. 마법에 관해 크레이츠가 제한을, 트라이탄이 친화를, 클라단이 배척을 선택했다면 헤리타가 선택한 길은 통제였다.
그들은 마법에 관한 한 주변국들과 비교도 할 수 없는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으나 그 내부의 체제는 지독히도 보수적이었다.
뛰어난 마법 능력을 통해 국가에 이바지해 귀족 작위를 받은 평민 여성과, 어릴 때 보인 마법 재능 때문에 억울하게 노예가 되어 죽을 때까지 부려 먹히는 이들이 공존하는 나라였다.
그런 체제에 맞서 내부에서 분란이 발생하기 시작한 지도 오래되었다.
이번 대에 들어서 서쪽 국경선이 잠잠해진 이유는 그래서였다. 그 전까지도 작은 소요가 자주 발생했었지만 이 정도로 조용했던 적은 없었다. 내란이 해결된다 하더라도 몇 년간은 내수를 회복하는 것에 집중하겠지.
해결이라.
그렇게 표현해도 되는 걸까.
심란해진 마음을 달래려 제라니아는 남은 차를 쭉 들이켰다. 서로 시선을 교환하던 두 사람 중 칼리아가 입을 열었다.
“제리.”
“응?”
“…언제나 이성적으로 굴려고 할 필요는 없어.”
미묘하게 변하는 제라니아의 표정을 살피며 칼리아는 조용히 덧붙였다.
“쓸데없는 걱정이라면 미안해. 하지만, 나는 가끔 네가 너무 많은 것을 참아 넘긴다고 느낄 때가 있어.”
코델리아가 팔짱을 끼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는 정말 착해. 다정하고. 네가 하는 모든 행위가 미칠 영향을 계산하면서 움직이는 거 알아.”
많은 것을 알기 때문에 경거망동하는 것을 꺼리는, 칼리아가 보는 제라니아는 그런 성향이었다.
“지난 몇 년간 네 그런 성향이 좀 달라졌다고 생각했어…. 좋은 쪽으로.”
“…….”
“너도 알잖아. 네가 어떤 모습을 보이든, 우리는 널 사랑할 거야. 네가 우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는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까. 그러니, 아름답고 온전한 것을 내보이려고만 할 필요는 없다고.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내보여도 된다고.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겠어.”
차분히 듣고 있던 제라니아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하지만 언니, 나는 정말 괜찮아.”
“…….”
“나라고 화를 내지 않는 건 아니야. 정말로 화가 나는 건 그런 일이 아닐 뿐이지.”
타인의 선동과 가십에 휘둘려 미워할 필요가 없는 사람에게 제 감정을 쏟고 싶지 않았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가급적 좋은 감정들만을 나눠 주고 싶었다.
“누군가를 대할 때는 늘 조심스러워져. 호감은 쉽게 거둬도, 미움은 되돌리기 어려우니까.”
“사람이 언제나 그럴 수는 없잖니.”
“그러려고 노력할 수는 있잖아. 누군가의 분노를 달래는 것에는 부드러운 한마디면 족한 것처럼.”
칼리아의 눈가에 그늘이 졌다. 그는 심사숙고한 끝에 입을 열었다.
“…네 의지를 존중해. 하지만, 제리. 다정함이 언제나 사람에게 좋은 감정만을 남기는 건 아니야. 날카로운 말이나 행동이 아니라도 타인은 충분히 상처 입을 수 있어. 너도, 상대도 말이야.”
“…….”
“느낌이 이상하다 싶으면, 속에 담아두지만 말고 꼭 이야기해. 알았지?”
진심 어린 충고에 제라니아는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내보였다. 알 수 없는 미소가 제라니아의 입가에 매달렸다.
“응, 명심할게.”
다과회를 마치고 제라니아는 처소로 돌아왔다.
시녀들을 내보낸 그가 널따란 방에 홀로 덩그러니 앉았다. 거울을 노려보는 제라니아의 머릿속에 은빛 머리칼의 여인이 떠올랐다.
올리비아의 첫인상은 기품 있고 단정했다. 목소리는 우아했고 싱긋 웃는 얼굴은 사랑스러웠으며 누구와 대화하든 배려하는 자세로 응했다. 외양만큼이나 선한 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예쁜 사람은 무엇을 하더라도 사랑스럽다는 말이 있기도 하니까.
문제라면 역시 프란츠를 대하는 태도가 심상치 않다는 점이었다. 과하지는 않았지만 시선이나 행동이나, 프란츠에게 호의가 있는 건 분명했다. 제라니아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분명 좋은 사람인데….”
왜 호감이 가지 않을까.
거울을 들여다보던 제라니아는 문득 보이는 제 표정에 화들짝 놀랐다. 처음 보는 얼굴이 도장을 찍듯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살짝 침울해 보이기도 했다.
고개를 털어냈다. 이건 자신답지 않았다. 이제껏 아무렇지 않게 넘겼던 일들이지 않나. 새삼스럽게 이럴 필요가 없는데 왜 이리 생각이 많아지는 걸까. 묘하게 속이 답답했다.
프란츠의 얼굴을 보면 조금은 나아질까?
“지금쯤 업무를 보고 있으려나.”
내일부터 이틀간 사절단을 환영하는 연회가 주최된다. 그 뒤에 조약을 의논하게 된다. 그들이 오기 전 협상 조건은 충분히 논의해둔 상태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제라니아가 밖으로 나갔다. 저를 따르는 호위와 시녀들과 함께 복도를 걸어가는 걸음걸이가 사뭇 단정했다.
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 맞은편에 보이는 얼굴에 제라니아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무리를 이끌고 그들의 앞에 멈춰 선 은색 머리칼의 귀공자가 싱긋 웃으며 예를 갖추었다. 자색 눈동자가 별을 담은 것처럼 반짝거렸다.
“안녕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