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화. 벼랑 끝에서 (3)
- 아니 그래서, 진짜 왕비님이랑 놀러 가셨단 말이야?
거울 너머로 기가 막혀 하는 티레인에게 이렌스는 차분히 대꾸했다.
“뭐 어떻습니까. 몇 년간 두 분 다 바쁘셨으니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요. 조만간 외국에서 사절단이 오면 쉴 틈도 없으실 텐데.”
국왕이 왕궁을 비운 상태라, 현재 어지간한 안건은 재상인 벨루인이 처리하고 있었다. 선대 때보다 벌이는 일도 많고 사업도 많지만, 재정부에서도 일벌레라 불리던 사람답게 피곤해하는 것 같아도 순순히 응했다.
“쓸데없이 농이나 걸려고 연락한 건 아니겠지요. 일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어서 용건이나 말하라는 매정한 목소리에 티레인은 가볍게 툴툴거리다가 곧 한숨을 내쉬었다.
- 진전이 있겠냐고. 진짜 발품 이렇게 팔아보는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는데.
“그간 너무 편히 살았나 보군요.”
- 넌 진짜 말이나 못하면…. 어휴, 어쩌겠냐. 다 내 업보인 것을.
이걸 때릴 수도 없고. 그런 마음을 담아 한껏 노려보는 티레인의 시선을 이렌스는 가볍게 무시했다.
“맞다, 신전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조만간 조사대를 파견할 것 같더군요.”
- 오, 그래? 그럼 조사하다가 마주칠지도 모르겠구만, 이거.
“가급적이면 만나지 않도록 주의해 주십시오.”
거울을 들여다보는 이렌스의 얼굴에 작은 수심이 들어찼다.
셀리나 왕자비를 죽이고 국왕을 독살하려 한 마법사를 신전은 끝내 잡지 못했다.
이렌스는 그 점을 의아하게 여겼다.
크레이츠 왕국에서 신전이란 마법의 보고다. 신전은 마법에 관한 모든 정보와 지식을 독점하며, 그 대가로 마법에 관련된 문제를 책임질 것을 왕실과 약속한 사이였다. 일종의 계약이라 봐도 무방했다.
그런 신전에서 보낸 수색대가 고작 마법사 한 명을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놓치다니. 서른 명이 넘는 신관들을 동원해 일대를 싹 뒤졌는데도 말이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내부에서 농간을 부린 게 아니고서야.
그런 강력한 마법 능력이 외부에서 양성되었다고만 생각하는 것도 편견이었다. 어쩌면, 마법사는 신전 내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나라에서 마법사에게 신전만큼 안전한 감옥은 없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협력자가 신전 내에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것도 꽤 위쪽에.
“아무튼 조심하십시오. 또 멍청하게 놓쳤다간 이번에야말로 국왕 폐하 손에 죽을 겁니다.”
신전에 따로 공문을 보낸 이유는 내부에 있을 게 분명한 관련자를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정말 이번 실종 사건이 7년 전의 그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면, 어떻게든 사태를 덮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신전이라고 그들의 명예를 실추시킬 생각은 없을 테니 최선을 다하겠지. 내부자가 신전에서 보낸 수색대에 신경 쓰는 동안, 티레인을 포함한 일행은 제법 자유롭게 사건을 수사할 수 있을 것이다.
- 내가 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할 것 같아? 그나저나 뭔가 이상하단 말이야.
“무엇이 말입니까.”
- 피해자들 사이에 이렇게까지 공통점이 없을 수가 있나 싶어서. 그냥 사람이면 마구잡이로 끌고 가나 싶을 정도로 일치하는 점이 없어. 빠르게 단서를 찾으려면 조금 편법을 써야 할 것 같은데.
“함정을 파겠다고요?”
- 빙고. 그렇지. 미끼를 던지긴 해야 입질이 오지 않겠어.
티레인이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그는 곧장 용건을 말했고 이렌스는 준비해 두겠다는 대답을 건넸다. 뭘 생각하고 있는지는 뻔했으나 말려봤자 듣지 않을 테니 그만두었다.
지금은 제법 몸을 사린다지만 특유의 대범하고 과격한 면모는 여전했다. 그래도 이젠 단서를 찾겠다고 불타는 고아원에 몸을 던진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딱히 목숨에 미련이 없는 것처럼 무모하게 굴던 인간이 변한 이유는 분명했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이렌스는 나지막이 웃음을 터트렸다.
- 왜 웃어?
“아니, 당신 같은 인간도 결혼을 하니 그렇게 변하나 싶어서. 제법 웃기지 않습니까.”
- 넌 참 웃긴 것도 많아서 좋겠다. 하긴, 네가 결혼을 한다면 그게 더 신기하긴 할 텐데.
“필요하다면 하겠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 켁, 국왕 폐하랑 똑같은 소리 하지 마라. 소름 돋으니까!
티레인이 결혼을 하겠다 말했을 때, 제롬은 술을 마셨냐고 물었고 프란츠는 모르는 누군가를 보는 것처럼 그의 전신을 눈으로 훑었으며 이렌스는 기어코 정신이 나간 거냐는 말을 던졌다.
후작의 눈치를 본답시고 사교계에서 그를 배척하던 시절에도 티레인은 인기가 있는 편이었다. 잘생기고 건장한 체격에, 성격이 호방하고 재력까지 갖췄으며 신분 역시 확실한 남자를 마다할 여인이 몇이나 있겠는가.
미혼의 여성들과 숱한 염문을 뿌렸던 남자가 난데없이 결혼을 한다니, 누구라도 놀랄 게 분명했다.
심지어 상대가 남편을 일찍 잃고 애가 딸린 과부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렌스는 진심으로 티레인의 머릿속이 궁금해졌다. 물론 남의 일이기에 구태여 묻지는 않았다. 신경 쓰기 귀찮았으므로.
- 진짜 너무하네. 국왕 폐하가 결혼하신다고 했을 때보다 더 놀라는 거 보니 솔직히 서운할 뻔했다고.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건가 싶었을 뿐입니다.”
- 뭐, 이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생략된 주어가 무엇인지 눈치채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는 넷 중 가장 웃음이 많지만 그만큼 속을 내보이지 않는 인물이었다.
언젠가 술에 취해 이안이 선물을 보냈다고 말하며 일그러진 얼굴로 웃던 남자를 이렌스는 목덜미를 쳐서 재웠다. 그가 참아줄 수 있는 술주정은 두 시간이 한계였다.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어리둥절한 얼굴로 아침에 일어난 티레인을 뻥 차서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그가 베풀 수 있는 최선의 호의였다.
티레인은 봄이 가고 이제 막 초여름에 들어선 6월에 결혼식을 올렸고, 그다음으로 자신이 결혼한 상대의 성씨를 비어 있는 제 성씨에 채웠다.
그제야 그가 왜 결혼을 선택했는지 이렌스는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새로 생긴 가족을 진심으로 아끼는 것도 사실이겠지만.
“후작가의 후계자로 태어나서, 고작 자작가의 성씨를 받고 좋아하는 겁니까.”
- 글쎄, 겨우 자작밖에 안 되는 빈즈 씨가 할 말인가?
능글맞은 대꾸에도 거울 너머로 보이는 무심한 얼굴에는 어떠한 감흥도 없었다.
이렌스 빈즈. 빈즈 자작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겨우 열다섯의 나이로 왕실 관리로 임명되었던 그의 인생에는 언제나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최소 백작 이상이어야만 임명될 수 있다는 재정장관 자리를 꿰찬 것부터가 그걸 증명했다.
제라니아를 만났을 때, 이렌스는 그가 자신과 동류임을 바로 깨달았다. 왕비보다는 관리가 어울린다는 생각은 여전했지만, 국왕 폐하가 이혼을 해줄 리가 없으니 어쩌겠는가. 이제는 농담으로도 꺼낼 수 없는 말이었다.
그는 지금 죽기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았다.
- 도대체가, 결혼을 하면, 어? 일도 좀 적당히 시키셔야 하는 거 아니야? 이번 주에 레티아랑 놀아주기로 했었단 말이지. 하아….
이제 아홉 살이 된 딸의 얼굴을 떠올리며 티레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정을 아는 한나야 잦은 출타를 이해해 줬지만 레티아는 아니었다. 집에 돌아갈 때마다 입을 댓 발로 내미는 이 귀여운 숙녀를 어쩌면 좋을까.
“국왕 폐하께서 그 정도의 인간미가 있으셨다면 일이 배는 편했겠지요.”
- …너는 정말 갈수록 주둥이가 팔팔해지는 것 같은데. 목 잘 붙어 있냐? 수시로 확인해라.
“그러잖아도 왕비님을 열심히 방패로 쓰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시답잖은 말을 몇 차례 주고받은 뒤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거울을 품에 넣은 뒤 이렌스는 종이를 꺼내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 * *
한데 덩어리진 거대한 행렬이 수도의 성문을 막 지나쳤다.
갑옷을 입고 앞장서는 기사들의 뒤로 화려한 마차가 뒤따랐다. 디나이안 왕국을 상징하는 은색 초승달이 그려진 푸른 휘장이 마차 옆으로 곱게 포개어져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개선장군처럼 왕궁을 향해 나아가는 사절단의 행렬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어느새 왕궁 앞에 도달했다. 도열한 기사들의 앞에 국왕 부부가 서 있었다. 말을 타고 들어오던 기사들이 양옆으로 빠지고, 굴러온 마차가 느릿하게 그 앞에 멈춰 섰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미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정한 인상을 가진 남자의 얼굴에는 미소가 완연했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새까만 제복이 무척 잘 어울렸다.
그런데, 남자가 마차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마차 안쪽에서 나온 새하얀 손이 그 손 위에 가지런히 포개졌다. 뭐라 말할 틈도 없이 손의 주인이 곧 모습을 드러냈다.
앞서 내린 남자를 떠올리게 하는, 은색 머리칼을 하나로 동그랗게 묶은 여인이 마차에서 내렸다. 그는 어깨가 살짝 드러나는 연분홍빛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치맛단을 덮고 있는 반투명한 레이스가 움직임을 따라 하늘거렸다.
은방울꽃을 연상시키는 청초한 미인의 정체가 누구인지는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인물의 방문에 놀라고 있던 제라니아는 제 손에 닿는 온기에 반사적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프란츠의 얼굴에 가식적으로나마 둘러져 있던 웃음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제라니아의 손을 꼭 붙든 채, 무표정한 얼굴로 제게 가까이 다가오는 이들을 응시했다.
여자의 손을 잡은 남자가 천천히 두 사람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남자가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안녕하십니까, 국왕 폐하.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에드윈 라이네. 그리고 이쪽은 제 누이, 올리비아 라이네입니다.”
“안녕하세요, 올리비아 라이네입니다.”
구슬이 굴러가는 듯 낭랑한 목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오빠인 에드윈을 따라,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인사를 마친 올리비아가 살며시 눈을 들어 그들을 쳐다보았다.
프란츠의 얼굴을 보자마자 여인의 푸른 눈동자가 멍하게 풀어졌다. 무례할 정도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올리비아에게 프란츠는 어떠한 언질도 하지 않았다.
제라니아는 그의 행동에서 상대를 없는 셈 치겠다는 강한 의지를 읽었다.
“어서 오십시오. 프란츠 리나엔입니다.”
무뚝뚝하게 대답한 프란츠가 남은 손을 뻗어 에드윈과 악수를 했다. 제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말간 시선을 가차 없이 무시한 그가 뒤돌아서 걸어갔다. 제라니아 역시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냉정한 대응에도 에드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그들을 따라갔다. 그의 시선이 깍지를 끼고 있는 두 사람의 손에 잠시 머물렀다 떨어졌다.
제 손을 가두듯 힘주어 잡은 커다란 손의 온기를 느끼며, 제라니아는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억눌렀다.
협상이 어째 순탄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