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122화 (123/171)

제122화. 벼랑 끝에서 (2)

“호수가 더 마음에 듭니다.”

음식을 먹다 ‘어째서요?’라고 묻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제라니아에게 프란츠는 새콤한 음료인 플라체가 담긴 잔을 건네주었다.

“강은 어딘가로 흘러가지만, 호수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을 테니까요.”

프란츠의 손이 잘게 썰린 사슴고기가 담긴 접시를 맞은편에 놓았다.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은 제라니아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망정이지, 제가 국왕 폐하를 부려 먹는다는 소문이 나도 할 말이 없었다. 괜찮다고 말해도 프란츠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상한 구석에서 제멋대로인 면이 있는 남자였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건 없잖아요.”

“…흘러가는 시간이 아쉬운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솔직하게 털어놓는 프란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라니아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더 열심히 즐겨야죠. 나중에 돌이켜 봤을 때 아, 나는 즐거웠구나. 할 수 있게요.”

제라니아는 처음 만났을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긍정적이고 미래를 낙관하며, 여전히 많은 것에 도전하고자 했다. 제 곁에 있겠다는 약속 역시 마찬가지였다.

‘프란츠. 당신이 나와 함께 있어서 평범해질 수 있는 거라면, 계속 곁에 있을게요. 당신이 행복하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그는 가끔 생각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제라니아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은 과연 행복한 걸까.

어머니와 함께했던, 따뜻한 물에 들어간 것처럼 평온하고 즐겁기만 하던 순간과는 달라도 많이 달랐다. 사랑을 자각한 뒤로부터 그는 언제나 두려웠다.

가끔 튀어나오는 악몽이 있다. 제라니아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며 자신에게 이별을 고하는 모습이. 처음 그 꿈을 꾸었을 때, 프란츠는 제 내면에 내재하고 있는 두려움의 실체를 깨달았다.

내게는 당신을 붙잡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구나.

당신이 무엇에도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결혼을 했는데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거침없이 제 손을 놓고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럴 때마다 계약서를 떠올렸다. 마지막에 적었던 약속은 무사히 지켜지고 있다. 그러니 제라니아 역시 약속을 지키겠지.

그러나 무슨 일이 생겨서 계약이 틀어진다면?

기한이 길어질수록 변수가 생기기 마련이다. 하물며 평생에 걸친 계약이 아무런 문제없이 이어지리란 보장은 할 수 없었다.

곁에만 있어달라고 말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제대로 당신을 달라고 했어야 했을까. 더 많은 걸 바라도 괜찮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제 속내를 알게 된다면,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어 할지도 모르니까.

약한 모습을 보이면 질려할지도 모른다. 힘으로 붙잡아 두려고 하면 벗어나버릴 게 분명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얻으려면 선물을 하라고 하는데, 귀한 선물을 건네면 제라니아는 늘 부담스러워했다. 그렇다고 이 부분에 타협하고 싶지 않았다.

좋아하기 때문에, 언제나 제가 보기에 가장 좋은 것만 주고 싶었다. 고집을 버린다면 해결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럴 수가 없었다.

모래성을 쌓는 것처럼, 작고 작은 생각들이 하나둘씩 쌓여 형태를 이루었다. 점점 심해지고 있는 두통은 그 반증인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제라니아를 앞에 두었을 때는 괜찮았다.

들키고 싶지 않았다.

만족하겠다고 다짐해놓고, 욕심은 다달이 커져만 간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고작 그 한마디를 말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꼴이라니.

속으로 조소했다. 아, 보이지 않는 마음을 확신하는 일이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프란츠?”

의아한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제라니아를 보고 프란츠는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어 말했다.

“아닙니다.”

목이 쉬어 있지 않아 다행이었다.

무난하게 담화가 이어지던 중, 제라니아가 얼마 전 크리스토퍼를 만났던 이야기를 꺼내자 프란츠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기분이 가라앉아 있는 것 같더라고요. 걔도 속에 쌓아두는 면이 있어서. 제대로 묻지는 못했는데 걱정이 돼서요.”

7년 전 셀리나가 죽은 뒤로, 휴스타인 공작가를 대하는 제라니아의 태도는 한층 조심스러워졌다.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묻고 전과 같이 지내려 노력하면서도, 뭔가 틀어지고 있다는 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재판이 열리던 그날, 아론 휴스타인은 분명 무언가를 포기했다. 아론의 태도에서 제라니아는 선을 긋고자 하는 의지를 읽었다.

그렇다고 손 놓고 내버려둘 수는 없었기에 어떻게든 최선을 다하고자 했다. 노력한다고 언제나 보상이 돌아오는 게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분명 더 후회할 테니까.

그건, 찬찬히 어긋나기 시작한 톱니바퀴의 궤도를 어떻게든 유지하고자 하는 발버둥과도 같았다.

걱정하는 제 표정을 뭐로 해석한 건지, 프란츠가 불쑥 말했다.

“너무 친한 것 아닙니까.”

“네?”

의미심장한 말에 제라니아는 잠깐 침묵했다가, 방금 전 떠오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었다.

“설마, 질투를 하신다거나 그런 건….”

“맞습니다.”

단박에 긍정하는 프란츠에게 제라니아는 당황해서 손사래를 쳤다.

“그런 사이 아니에요.”

암암리에 정부를 두는 귀족들이 많다는 건 알고 있지만 자신에게는 별세계 이야기였다. 가정에 충실한 부모님을 보고 자란 영향도 있겠지만, 지금 자신은 프란츠를 신경 쓰는 것만도 여유가 없었다.

“…당신 성격에 그럴 리 없다는 건 압니다.”

그가 조금 늦게 대답했다. 어색한 침묵이 테이블 위를 점령했고, 식기와 접시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렸다.

그 침묵의 결이 점차 느슨해질 때까지.

“내일은 도시를 둘러봐야죠. 재미있을 것 같아요.”

식사를 마치고, 제라니아는 천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의욕이 넘치는 눈빛으로 조잘거리는 제라니아의 음성에 프란츠는 귀를 기울였다.

“외국에서 들어오는 물품들이 상당하다고 들었는데, 뭐가 있을지 기대돼요. 투말리에 기반을 둔 상단들이 가끔씩 들어온다고 하니까.”

투말리 공화국. 이 대륙에서 유일하게 공화국 체제를 가진 해상 무역 국가였다. 마법 하나 없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대륙의 국가들이 유독 교류를 꺼리는 대상이기도 했다.

사상적인 문제일 거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처음 공화정에 대해 접했을 때는 놀랐다. 다수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다수의 사람이 직접 지도자를 뽑아 국가를 다스리는 구조라니.

매력적이라 생각했으나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닌지라 프란츠한테도 말한 적이 없었다. 왕족이 국가를 다스리는 건 정말로 당연한 일이니까. 그 당사자인 이에게 꺼낼 문제는 아니었다.

특이한 물건, 하니 자연스럽게 프란츠가 가지고 있는 마법 거울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티레인 경은 괜찮겠죠?”

그가 무슨 임무를 나간 건지 제라니아 역시 보고를 들어 알고 있었다. 이렌스는 괜찮을 거라 했지만, 신혼여행 당시 팔과 손에 붕대를 감고 나타났던 모습을 생각하면 걱정스러운 게 사실이었다.

기사들은 다 이렇게 몸을 아낄 줄 모르는 건가? 편견 어린 생각을 속으로 중얼거리는 제라니아의 앞에서 프란츠가 기가 막힌 듯이 대꾸했다.

“여기까지 와서 그 녀석 걱정을 왜 합니까.”

“아무래도 위험한 일이잖아요. 경도 꽤 막무가내인 구석이 있어서 걱정이 돼요.”

“믿을 만한 자들과 함께 갔으니 괜찮을 겁니다.”

정예 기사들은 물론, 실력 있는 신관들을 여럿 붙여주었다. 이 정도까지 해줬는데 죽지는 않겠지. 아렌타와 같은 상황을 되풀이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 걱정은 돌아가서 해도 늦지 않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연락을 할 테니까요.”

프란츠는 잔에 입술을 대고, 남아 있는 와인을 느릿하게 마셨다. 피처럼 붉은 액체가 그의 입 속으로 천천히 흘러 들어갔다. 제라니아는 그 모습을 제법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그와 살면서 의외다 싶은 구석은 많았지만 그중 제일 신기했던 건 그가 술을 잘한다는 사실이었다. 제법 많은 양을 마셨는데도 취기 하나 없는 얼굴을 보니 자연스럽게 코델리아가 연상이 됐다.

둘이서 대작을 하면 과연 누가 이길까.

소소한 호기심이 발효된 빵처럼 부풀다가 뻥 터졌다. 튀어나오는 웃음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제가 아끼는 사람들이 함께하는 일상은 상상만으로도 너무나 눈이 부셨다. 과거에 남겨둔 이들을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이 욱신거리지만, 힘을 내어 나아갈 수 있는 건 지키고 싶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너무 즐거워서…. 그래서 잊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굴곡이 없는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 * *

“항복, 항복! 그만하자고, 형님!”

루크가 검을 내던지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더는 못 움직이겠다며 두 손 두 발 다 드는 동생을 내려다보던 크리스토퍼가 알겠다는 듯 목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근처 나무에 걸어둔 두 장의 천을 가져온 크리스토퍼가 하나를 루크에게 던졌다. 천은 루크의 얼굴 위로 정확하게 안착했다. 숨을 몰아쉬며 얼굴을 벅벅 닦던 루크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리 기분이 저조해?”

단련에서 이 정도로 몰아치는 건 드문 일이다. 의아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탁한 녹색 눈동자에 비친 제 얼굴을 본 크리스토퍼는 침묵했다.

혼란스러운 얼굴에서 동요를 지워내며 크리스토퍼가 선언했다.

“잠시만 쉬자.”

“잠시라니, 아직 더 남았다고?!”

이쯤 하면 되지 않았냐며 중얼거리는 루크를 그는 냉정하게 내려다보았다.

검을 배우기는 했어도 저만큼 실력이 늘지 않는 건, 루크가 검에 열정을 불태우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요령을 부리는 성격이어서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었지만 검술과는 맞지 않았다.

아버지를 비롯해 가문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과묵하고 차분한 성격에 속했으나 루크는 달랐다. 능동적인 성격만큼이나 야심이 있는 아이다. 그렇기에 아버지나 자신의 행보를 이해하지 못했다. 셀리나의 죽음을 겪은 뒤로는 그러한 생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런 그가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나올까. 최근 있었던 일이 크리스토퍼의 머릿속을 자꾸만 무겁게 했다.

시작은 클라단에서 온 서신이었다. 서재로 불려 간 크리스토퍼는 아버지의 손에 들린 편지를 보았다. 인장에 새겨져 있는 문양을 보니 발신자는 케라온 공작이었다.

의아했다. 같은 공작가라지만 그들과는 거의 교류한 적이 없었다. 7년 전, 제라니아에게 시비를 걸던 그 자식에게 대놓고 망신을 준 뒤로 사이는 한층 더 험악해졌다.

자신을 불러두고도 아버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묵묵히 기다리고 있자, 점잖은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회담을 갖고 싶다는군.’

‘갑자기 말입니까?’

수상쩍기 짝이 없는 제안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정말 놀라운 건 그다음이었다.

‘최소한의 인원만 데리고. 그래서 너를 데려가려 한다.’

가겠다고 말하는 아버지의 말이 지나치게 현실감이 없었다. 진심이십니까? 그렇게 묻는 자신에게 아버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아버지라면 저런 편지는 받자마자 촛불에 태워버렸을 것이다. 그들은 호전적이고 제멋대로이며 무슨 꿍꿍이를 가진 건지 알 수 없는 이들이다.

처음으로 알란 케라온을 대면했을 때부터 그랬다. 입꼬리를 올리고 있지만 전혀 웃지 않고 자신을 탐색하는 눈. 어린 나이에도 경계심이 들어 아버지의 등 뒤로 몸을 숨겼었다.

바닥에 던져놓은 목검을 다시 집어 들었다. 생각을 비우려면 몸이라도 움직이는 게 나았다. 질색하는 루크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가 서늘했다.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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