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화. 6년 후 (6)
왕좌에 앉은 프란츠의 시선이 아래에 서 있는 남자들에게로 향했다. 디나이안 왕국에서 온 사절단이 고개를 숙인 채 그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고할 것도 없었다. 프란츠는 미간을 누르는 대신 검지로 왕좌의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우아한 손가락이 제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 넘겼다.
“조만간 협의할 조건을 조율하는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지. 단, 그 방식에 있어서는 피차 논의가 부족한 것 같으니 보류했으면 하네. 그대의 왕에게 그렇게 전하도록.”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완곡한 대답에 사절단은 알겠다는 답변과 함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들이 물러가자마자 어전은 금세 시끄러워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리하르타넨 공국에서도 이틀 전 비슷한 내용의 서신을 보냈던 차였다. 이제 막 다섯 살에, 세 살이 된 제 자식들을 가지고 결혼을 운운할 리가 없으니 주체는 자신인 게 분명했다.
어이가 없었다. 기껏 왕궁을 청소해 놨건만 무슨 놈의 결혼이란 말인가. 이게 다 선대가 뿌려놓고 간 업보라 생각하니 절로 부아가 치밀었으나, 그는 평온한 안색을 유지했다.
협상 조건을 두고 떠드는 와중에도 귀족들은 슬쩍슬쩍 프란츠의 눈치를 봤지만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했다. 위압감이 서려 있는 얼굴은 평소의 국왕과 다를 게 없었다.
길고 짜증 나는 회의가 끝나고 귀족들을 전부 다 내쫓은 뒤, 프란츠는 천천히 걸어 집무실로 향했다. 잠시 후 이렌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늦었군.”
“전갈을 받자마자 뛰어왔습니다만, 왜 이리 성질이십니까?”
질문하면서도 알 만하다는 듯이 제 얼굴을 훑어보는 이렌스에게 프란츠는 짜증스레 말했다.
“이미 들었을 텐데.”
“국왕 폐하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시더군요. 역시 태양이라 불리시는 분답다고 해야 할까요.”
무뚝뚝한 얼굴로 농담을 하던 남자가 재차 덧붙였다.
“그렇지만 역시, 왜 그리 짜증이 나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막말로 다시 또 결혼을 하실 생각은 없으시지 않습니까? 제가 왕비님 곁에만 가도 눈을 이렇게 뜨시면서 말이죠.”
이렌스는 제라니아와 가장 친한 사람 중 하나였고, 그만큼 프란츠가 보내는 시선의 의미 역시 잘 알았다. 감정적으로 구는 주군의 모습이 꽤나 신선해, 도리어 농을 걸었더니 이젠 아주 미운털이 박힌 모양이었다.
하긴, 그간 너무 많이 놀려먹긴 했지. 이렌스는 반성 아닌 반성을 했다.
“생각은 없더라도, 무슨 수작인지는 알아봐야 할 테니까. 내가 이미 결혼을 했다는 걸 알면서도 이런 제안을 보내는 이유라든가.”
“하긴, 이미 정비가 버젓이 있는데 혼인 장사로 공주를 보낸다는 게 이상하긴 합니다. 와봤자 후궁의 자리에나 앉게 될 텐데요.”
“디나이안이나 리하르타넨은 보통 한 명의 아내만을 들이니까 말이지.”
주변국들이 일부일처제를 고수하는 반면, 크레이츠는 오래전부터 일부다처제 체제를 유지해왔다. 이는 타국 왕족에 비해 유독 손이 귀한 리나엔 왕조의 특성도 있었지만, 전쟁이나 내전을 자주 겪다 보니 죽어나가는 남자들이 많아 과부가 된 여성을 부양하기 위한 제도였다.
혼란한 시기에는 내부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영주의 딸들을 아내로 맞아 동맹을 맺는 정략결혼의 형태로 활용되기도 했다.
“당장 국가 이미지에도 별로 좋지 않으니까요. 리하르타넨은 몰라도 디나이안은 특히 그렇지 않습니까.”
만에 하나 결혼이 성사되더라도, 왕국과 왕국 사이의 대등한 결합이라기보다는 마치 이쪽에 공주를 바치는 모양새로 보일 만했다.
“아니면,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동맹을 맺어야 할 만한 이유가 있다거나.”
가만히 제 턱을 어루만지는 프란츠의 눈동자가 탁하게 가라앉았다.
“디나이안에 미혼인 공주는 지금 딱 하나였던가.”
“예, 스물둘인가 되었을 겁니다.”
자신과는 여덟 살 차이였다. 정략결혼에 나이를 따지는 게 우습다지만, 까지 생각했다가 문득 프란츠는 선대 국왕과 아이렌 전 왕비의 나이 차이를 떠올리고 이맛살을 구겼다.
“리하르타넨 공국은 과년한 연배의 공녀가 없는 걸로 아는데.”
“그것이, 최근 울프 메디나가 잃어버린 딸을 찾았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잃어버린 딸이라. 프란츠는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했다.
“사생아인가?”
“그것까지는 확실치 않지만, 정보에 의하면 그쪽도 이제 스물이 되었습니다.”
“그렇군.”
사생아든 뭐든, 당장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그들이 부리나케 결혼 동맹을 제의하는 배경에는 흥미가 있었다.
“디나이안과 리하르타넨에 사람을 더 보내보도록 해라. 협상에 쓸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으니.”
“여부가 있겠습니까, 국왕 폐하.”
천천히 고개를 조아리는 이렌스를 내보내고, 프란츠는 침대로 가 앉았다. 수심에 잠긴 푸른색 눈동자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무언가를 쥐듯 손가락을 폈다 접었다. 눈앞에 없는 여인의 모습을 상상했다.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다가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마를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며 침대에 풀썩 몸을 눕혔다.
어의를 부를 생각은 없었다. 보나 마나 몸에는 이상이 없다는 말을 반복할 테니. 가슴속에 스멀스멀 피어나는 감정들을 말없이 눌러 담은 채로,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직은 견딜 만했다.
아직은.
* * *
튼튼한 돌벽이 도시 외곽을 둘러싸고, 계단형으로 쌓여 있는 영토의 맨 꼭대기에 회색의 성이 자리했다. 음울해 보이는 외관을 가진 성의 창문 안쪽으로 의자에 앉아 등을 돌리고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그를 마주한 남자의 얼굴이 유리창 위로 희멀겋게 떠올랐다.
“아버님, 진심이십니까.”
아버지인 공작의 눈치를 살피며 윌터는 한껏 진중한 목소리를 내었다. 남자는 국왕의 앞에서도 태연자약한 그가 유일하게 긴장하는 상대였다.
“내가 네게 농을 걸 이유가 있더냐?”
“아닙니다.”
커다란 어깨가 수면을 두드리는 물수제비처럼 흠칫 튀어 올랐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여전히 용맹한 사자를 떠올리게 하는 남자에게 윌터는 다시금 고했다.
“하지만, 그들이 과연 저희와 뜻을 같이하겠습니까. 그렇게 왕실에 아양을 떨던 이들이 아닙니까. 잘못하면 일이 틀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를 부득 사리무는 아들을 지그시 바라보던 알란이 픽 웃음을 내뱉었다.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기사들 앞에서 검을 부딪치다가 톡톡히 망신을 당했던 사건을 언급하자, 윌터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지나간 승부에 연연하지는 않습니다.”
날카로운 시선이 윌터의 얼굴을 느릿하게 훑었다. 흥미가 떨어진 듯 두 손을 겹치고 의자에 등을 기대며 알란은 고갯짓을 했다.
“그나저나, 루이스 그 자식은 그대로 내버려두실 겁니까?”
이제 막 근신에서 풀려난 동생을 떠올리며 윌터는 불만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문제를 처음으로 논의했을 때, 세 자식의 반응은 제각기 달랐다. 당연하게 찬성을 외친 윌터와 달리 샤를로테는 침묵했고, 루이스는 눈을 치켜뜨고 입을 열었다.
꼭 그래야만 하겠냐고.
‘단순히 무력만이라면 저희 쪽이 우세할 겁니다, 아버님. 하지만…. 다른 방법을 모색할 수는 없겠습니까.’
같은 피를 물려받았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소심하고 허약한 이였다. 낑낑거리는 강아지 같은 놈이 겁에 질린 눈으로도 바득바득 입을 여는 꼴이 윌터는 퍽 우스웠다.
요 몇 년 사이, 수도를 들락날락하더니 왕실 놈들에게 감화되기라도 한 것일까.
그들은 기사였다. 원하는 게 있다면 무력으로 쟁취하는 것이 당연했다. 저희의 방식에 멋대로 끼어든 순간부터 이미 협약은 깨진 거나 마찬가지다.
그깟 회유에 넘어가다니, 태생이 나약하기 짝이 없는 머저리다웠다.
“충분한 감시를 붙였으니 문제는 없을 것이다.”
내통할 가능성이 있는 만큼, 잘 단련된 병사들에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라 일러두었다. 감옥에 가두지는 않았다. 그는 제법 관대한 아버지였으므로, 아들의 나약함을 너그러이 보아줄 수 있었다.
“그런 녀석 하나가 계획에 차질을 빚을 리가 있겠느냐. 지금 중요한 건 다른 일이다.”
‘이미 아시겠지만, 왕실의 정예군을 만만하게 보셔서는 안 됩니다. 일단은 때를 기다리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건방지게 구는 루이스를 막아서며 침착하게 의견을 내놓는 샤를로테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필요하지 않은 말은 하지 않는 딸의 성정을 알기에, 알란은 보다 더 신중해지기로 했다.
사실 선대가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낌새는 있었다. 새 국왕이 즉위하고 난 뒤로 그 예감은 한층 더 분명해졌다.
왕실은 자신들에게서 무기를 빼앗고, 억지로 펜을 쥐여주려 한다.
웃기는 소리.
누가 그에 동의했던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일방적으로 내미는 요구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을, 케라온을 휘두를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휩쓸려 가기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건 반란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정체성을 지키고자 내거는 투쟁이었다.
알란은 가문의 인장을 찍어 봉랍한 편지를 손에 들고 흔들었다. 배부른 맹수처럼 나른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머물렀다.
“사람이 가장 흔들리기 쉬운 순간이 언제라고 생각하느냐.”
“예?”
“바로, 벽을 마주했을 때지.”
넘어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아주 높은 벽.
단단한 나무일수록 부러지는 순간, 되돌릴 수 없었다. 알란은 확신했다. 그 남자는 분명 넘어올 것이다.
“회동을 준비해라.”
곧 만나게 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