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화. 6년 후 (5)
붉은 지붕을 얹은 아름다운 저택으로 들어가자, 고용인들이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고급스러운 장식품과 그림들이 걸려 있는 복도를 지나자 밀어서 열 수 있는 육중한 나무 문이 나타났다.
문을 열자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응접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크림색의 벽지로 도배된 방의 바닥에는 양모로 만든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었고, 열 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새까만 소파가 자리했다. 소파의 뒤편에는 아직 불을 켜지 않은 벽난로와 박제된 사슴 장식이 존재감을 과시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여인들의 시선이 제라니아에게로 꽂혔다. 코델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언니!”
격식 없는 호칭과 함께 쪼르르 달려와 자신을 끌어안는 코델리아의 등을 토닥이며 제라니아는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금빛 머리카락을 하나로 땋아 내린 여인, 한나 메이가 정중히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왕비님.”
“…그냥 이름이어도 되는데.”
문을 닫으면서 제라니아는 민망한 듯 중얼거렸으나, 여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소파로 와서 앉으며 간단한 안부를 나누던 중 에스더가 말했다.
“아일라 전하는 좀 늦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가요?”
올해 열아홉 살이 된 아일라는 현재 수도 외곽에 살고 있었는데, 왕실에서 자신과 어머니에게 내주었던 저택을 개조해 학교로 사용하고 있었다.
자신과 비슷하게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모아 간단한 기초 교육과 수어를 가르치고, 최근에는 신관들과도 교류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분을 보고 있으면 정말 열심히 사신다 싶어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것 같은데.”
“아직 스물도 안 된 아가씨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죠.”
“에이, 그 나이면 돌도 씹어 먹는다고 하잖아요. 기력이 있으니까 가능한 거죠.”
“코델리아 양은 어땠나요?”
“전 지금도 팔팔한데요.”
능청스럽게 말하는 코델리아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왕궁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왔음에도 아일라는 프란츠를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치를 봐야만 하는 환경에서 벗어난 탓인지 훨씬 밝고 명랑해졌고, 예전보다 입을 여는 빈도도 늘었다.
며칠 전 핀의 무덤가에서 조우했을 때도 그랬다.
6년 전에 사건을 해결하면서 왕실은 핀에게도 국가적인 훈장을 수여했다. 역모를 막는 것에 공헌했다는 이유였다. 죽은 이는 말이 없다 하던가. 부질없는 짓이 아닌가 하면서도 최소한의 것은 챙겨주고 싶었다.
핀의 장례식은 선대 국왕이나 셀리나와 비교하면 참으로 조촐했다. 마치 죽음에도 그 급이 있다는 것처럼.
그 후로도 제라니아는 종종 핀의 무덤을 찾아갔고, 꽃을 들고 서 있는 아일라와도 마주쳤다. 셔츠와 바지, 소년처럼 차려입고 있던 아일라를 처음 봤을 때는 꽤나 놀랐다.
전보다 큰 키와 젖살이 빠져 갸름해진 얼굴, 날이 서 있던 예전과 달리 제법 부드러워진 눈빛까지.
아이는 성장한다는 것을 그 순간 확연하게 느꼈다.
영원히 어른이 되지 못할 이의 무덤 앞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아이를 마주하는 건 생각보다 더 묘한 기분이었다. 제가 예전에 꾸었던 꿈을 대신 실현해가고 있는 아일라의 모습을 보니 자연스럽게 자신의 현재를 반추하게 되기도 했다.
예전부터 그리던 이상을 구현해가고 있고, 그런 의지를 나눌 사람들이 곁에 있었다. 충분히 만족스럽다 생각하는데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욕심이 많아서인지도 모른다.
조급하게 마음먹지 않기로 했다. 급하게 가고자 하면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아까와는 달리 활기가 도네요. 왕비님이 오셔서 그런가?”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양 과장되게 말하는 에스더에게 제라니아는 웃으며 대꾸했다.
“띄워줘도 남는 거 없는데요.”
“정말요?”
“간식으로 먹을 건 가져왔어요.”
가져온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손길이 정갈했다.
담소가 시작되고 온갖 정보가 오고 갔다. 각자의 근황이라든가 사교계에 떠도는 소문들은 물론, 여성끼리만 모인 자리라 그런지 제법 질 낮은 농담들이 오가기도 했다. 정숙함을 요구받는 만큼 노골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떠들자면 이런 장소가 적격이었다.
“그거 아세요? 오턴 백작이 실링카 부인한테 추파를 던졌다던데.”
“세상에, 점잖은 척은 다 하더니!”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게 불구경 다음으로 치정 싸움이라는 말답게, 복잡하게 엉켜 있는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빠지지 않았다.
가십에는 흥미가 없는지라 간간이 맞장구를 치는 정도에 그치며 제라니아는 여인들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살롱에 참석하는 이들 중 과부가 아닌 이상 독신인 이는 거의 없었다. 과년한 여인에게 결혼은 당연시되었다. 칼리아나 코델리아가 결혼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제법 관대한 아버지를 둔 덕이었다.
적정한 선을 두고 가십을 대하는 칼리아와 달리 코델리아의 눈은 시종일관 반짝거렸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생각한 건데요, 한나. 머리 장식이 정말 예쁜데, 어느 장인의 솜씨인가요?”
한나의 머리칼에 꽂혀 있는 화려한 나비 형태의 핀을 본 에스더가 눈을 빛냈다.
에스더는 살롱의 일원들 중에서도 유독 유행에 관심이 많은 이였다. 세련된 차림새로 나타나 사교계에 유행을 불러일으킨 뒤, 그걸 이용해 사업을 했다. 관심을 즐기는 만큼 실리적인 성향이 강한 여인이었다. 제법 순한 성격의 남편을 생각하면 의외라 할 만했다.
그런 행위를 두고 고상하지 못하다 돌려 까는 이들도 간혹 나타났으나 에스더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니 에스더가 관심을 갖는다는 건, 곧 다음 사교계의 유행이 될 새로운 아이템을 찾는다는 말과도 같았다.
“글쎄요. 저도 남편이 준 거라 잘 몰라서.”
부드럽게 대화를 끊어내는 한나를 보며 에스더는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말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군.
한나의 옆에 앉아 있던 엘리자베스가 타르트를 슬쩍 에스더의 앞으로 내밀었다. 에스더는 포크로 그것을 쿡 찍어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이 얘기는 여기까지 하겠다는 합의의 표시였다.
에스더와 같은 여인이 드물지는 않았다. 장원이 붕괴되고 도시가 성장하면서 귀족들은 그토록 천시하던 상업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크레이츠 왕국은 내륙에 위치하고 있어 무역은 대개 육로로 이루어졌다. 디나이안 왕국과 리하르타넨 공국, 가끔씩 남쪽에 자리한 투말리에서도 간혹 상단이 방문해 물건을 사고팔았다.
살롱에 모인 여인들은 남편의 영지를 관리하는 것은 물론 재산을 불리기 위해 상단이나 길드에 투자를 하기도 하고, 살롱의 이름을 걸고 재능 있는 이를 후원하는 일도 있었다.
물론 그것만이 아닌, 좀 더 은밀한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다.
“남편이랑 또 한바탕한 거예요?”
“네. 하여간,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니까요.”
노라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걷어 넘겼다. 노라의 남편인 이튼 백작은 젊고 부유한 귀족이면서 아내에게 끔찍하기로 유명한 애처가였다. 아내를 위해서라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것처럼 구는 백작을 보며 모두가 노라를 부러워했다.
막상 그 당사자의 입장은 세간의 의견과는 많이 달랐지만.
“나를 주머니에 넣고 매일같이 들여다봐야 만족할 거냐고요! 내가 자기 옆에 없으면 그때부터 의심을 하는데, 지겹기 짝이 없어요. 지치기도 하고.”
차로 속을 달래는 노라의 가슴께가 오르락내리락했다. 언제나 소매가 긴 드레스를 고집하는 노라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여인들 역시 말없이 차를 들이켰다.
“이젠 하다못해 시종들까지 의심하니까…. 자꾸 그러면 이혼하고 확 신전에나 들어가 버릴 거라고 했더니 노발대발하더라고요.”
노라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결혼하면 좋을 줄 알았는데…. 문화생활 하나 다녀오는 것도 이렇게 힘들어질 줄은 몰랐죠. 직접 살롱을 열어보려고 해도, 시인을 초청하는 건 또 반대하지 뭐예요.”
“에이,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죠?”
“그 설마가 맞아요. 남편은 세상 모든 남자들이 날 사랑할 거라고 믿거든요.”
객관적으로 봤을 때, 노라는 분명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화폭에 담길 것 같은 고상한 미모는 미혼이던 시절부터 여러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꽤 부유한 남작가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물려받을 넓은 영지가 있다는 것도 인기의 한 요인이었다.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요. 남자는 자기주장이 강한 것보다는 좀 우유부단한 게 차라리 낫다니까.”
에스더가 심드렁하게 말하며 파이 조각을 포크로 찍어 올렸다. 비어 있는 찻잔에 차를 따르며 레이나는 조용히 대꾸했다.
“그러다 바람이라도 나면 어쩔 생각이죠?”
“어머, 혹시 마음에 걸리시는 일이라도 있으세요?”
레이나의 남편인 오르테가 백작이 정부를 여럿 두었었다는 사실은 사교계에서도 유명했다.
자신을 째려보는 눈빛에도 에스더는 먹음직스러운 살구 파이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꼭 누구를 씹듯이 전투적으로 파이를 씹어 삼킨 뒤 피식 웃었다.
“어차피 바람날 인간이면 어떤 성격이든 간에 나게 되어 있다니까요. 그렇다면 날 휘두르려고 하는 남자보다야 내가 휘두를 수 있는 상대가 낫지 않겠냐, 하는 말이죠.”
제법 의미심장하게 말하던 에스더가 문득 화제를 전환했다.
“그러고 보니 왕비님은 어떠세요? 국왕 폐하랑.”
“네?”
갑자기 자신에게로 날아온 화살에 제라니아는 마시던 차를 뱉을 뻔했다. 칼리아조차 자신을 흥미진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에 제라니아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 잘 지내고 있는데요.”
좌중이 야유했다. 에스더가 빙그레 웃으며 짓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답에 너무 성의가 없으신 거 아닌가요?”
“하지만 정말 문제가 없는걸요.”
“국왕 폐하는 인기가 좋으시잖아요. 즉위하시고 나서 인기가 훨씬 느셨던데.”
국왕이 된 직후, 태도가 변한 프란츠의 모습에 사교계에서는 한창 말이 돌았다. 여전히 공식 석상에서는 미소를 짓지만, 평소에는 차갑고 무심한 얼굴로 일관하는 것이 마치 사람이 변한 것 같다는 말이 오갔다.
그런데도 프란츠에게로 향하는 수줍고도 열렬한 시선들이 훨씬 늘었다. 그 현상을 본 코델리아는 ‘다들 모두한테 친절한 남자보다는, 나쁜 남자가 나한테만 웃어준다는 게 좋은 거지.’라는 평을 내놓았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국왕 폐하를 좋아하는 분이 많다면…. 좋은 일 아닌가요?”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제라니아를 보며 에스더는 물론, 다른 여인들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레이나가 대표로 말을 꺼냈다.
“왕비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그분이 참석하시는 연회에 공작처럼 화려하게 치장하고 오는 여인들이 상당합니다.”
물론 안다. 연회에 동반 참석했을 당시에도 프란츠에게 말을 거는 여자들을 꽤 많이 봤었다. 그래도 제가 자리를 비웠을 때를 노려 접근하는 걸 보면 최소한의 예의는 차리는 것 같았다.
처음에 그 장면을 직접 봤을 때는 아무래도 기분이 미묘하긴 했었다.
“그렇다 한들, 눈길을 주는 이가 없는데 무슨 걱정이겠어요.”
프란츠는 그런 여인들을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전부 무심하게 거절했다. 익숙한 듯 상대를 떨쳐내는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지만 피곤해 보여서, 제라니아는 재빨리 프란츠에게로 다가갔었다.
자신을 보자마자 누그러지는 눈빛을 보니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왜 그런 기분을 느끼는지 몰라 가슴에 손을 올리고 한참을 기다렸다.
심장이 평소보다 조금 빨리 뛰었다.
“국왕 폐하께선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신걸요. 어쩔 수 없죠.”
그는 여전히 젊었고, 유능한 데다 왕국에서 손꼽게 아름다운 남자였다. 크리스토퍼나 리암을 보고 자라, 잘생긴 얼굴에는 다소 면역이 있다 생각한 자신도 가끔 아침에 제 옆에서 자고 있는 그를 볼 때면 놀랄 때가 있었다.
어떤 문제에서든 악의보다는 호의가 나았다. 당신이 어떤 형태로든 애정을 받는 것은 달가웠다.
왜냐하면, 당신은 충분히 그럴 만한 사람이니까.
여인들은 재빨리 서로에게 눈짓했다. 무언의 합의 끝에 노라가 더 뭐라 말하려던 순간, 아일라가 도착했다는 시종의 전언을 듣고 대화는 중단되었다.
사환 같은 차림새로 들어오는 아일라를 모두가 환영했고, 들리지는 않지만 시끄러운 건 아는지 아일라는 귀를 막는 시늉을 했다.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제라니아는 부드럽게 웃었다.
* * *
시종이 내민 종이를 받아 든 프란츠가 고이 접어져 있는 서찰을 열어 그 안의 내용을 확인했다. 요약하면 우호적인 관계, 즉 동맹을 맺고 싶다는 내용이었는데 그걸 위해 제시한 방법이 심상치 않았다.
[하여, 가문 사이의 결합을 통해 결속을 다지고 동맹을 맺을 것을 제안하는 바이며….]
요약하자면 바로, 정략결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