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117화 (118/171)
  • 제117화. 6년 후 (4)

    “걱정이 되긴 해요. 방향성이 달라지는 만큼 충돌의 가능성을 피할 수 없으니까요.”

    “관습에서 벗어나는 행위는 반발을 불러올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설령 요구를 전부 들어준다고 해도, 터질 문제는 언젠가는 터지게 되어 있으니까요.”

    무뚝뚝한 위로에 제라니아는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에도 심란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게 한참 대화를 나누다가, 저녁을 먹은 뒤 두 사람은 제라니아의 처소로 돌아왔다. 잠옷으로 입는 새하얀 가운을 입은 채로 제라니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도 자고 가시게요?”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허리를 숙여 제라니아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익숙하게 입맞춤을 받아들이며 제라니아는 눈을 감았다.

    프란츠는 한 번도 자신의 처소로 제라니아를 부르지 않았다. 늘 직접 찾아왔다. 이유를 묻자 그는 아쉬운 사람이 찾아가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몇 년간 같이 살면서 생각한 거지만, 그는 담백하면서도 집요한 면이 있었다. 느릿하게 이어지던 입맞춤이 끝난 뒤 제라니아는 힐끗 그의 얼굴을 보았다.

    태연하기 짝이 없는 얼굴과 달리 귀는 무척 붉었다. 그걸 보자 장난기가 발동한 제라니아는 방심하고 있는 프란츠의 입에 살짝 입술을 붙였다가 떼어냈다.

    “와, 당신 얼굴 엄청나요.”

    물감을 풀어낸 것처럼 그의 얼굴까지 전염되는 붉은 기에 제라니아는 나직이 탄성을 터트렸다. 자신만큼은 아니지만 쑥스러운지 상당히 붉어진 제라니아의 뺨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프란츠가 조용히 대답했다.

    “…놀리지 마십시오.”

    때아닌 기습에 불만스러워 보이는 프란츠를 보니 자꾸 웃음이 나왔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당신의 이런 표정을 보겠어요?”

    다양한 표정을 짓는 그를 보고 싶었다. 자꾸 놀리게 되는 건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밖에서는 체면을 차려야 하니 자제했지만, 지금은 둘만 있으니 괜찮았다.

    몽글몽글한 기분이 심장을 부드럽게 감쌌다.

    “으앗!”

    허리가 붙잡히고, 제 몸이 공중으로 번쩍 떠오르는 것에 제라니아는 깜짝 놀라 프란츠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저를 안아 든 프란츠와 시선을 마주했다.

    사랑스러운 무언가를 보는 것처럼 예쁘게 휘어져 있는 눈초리를 본 순간, 제라니아는 웃으며 프란츠의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그 일련의 과정이 자연스럽고 친밀했다.

    그 상태로 천천히 걸어간 프란츠가 조심스럽게 제라니아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여인을 전부 감싸 안았다. 제라니아는 그대로 프란츠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 다음, 둘은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반투명한 보랏빛의 휘장이 침대를 둘러싸자 온전히 둘만의 세계였다. 밖은 이미 어두워졌고, 시녀들 역시 나간 덕에 주변은 무척 고요했다.

    두 손을 모으고 천장을 올려다보는 자세로 누워 있던 제라니아의 눈이 조용히 깜빡거렸다. 어둠에 익숙해질 무렵 살며시 고개를 돌리자, 언제부터였는지 자신 쪽을 보고 돌아누워 있는 프란츠가 보였다. 제라니아는 불쑥 입을 열었다.

    “프란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그가 자신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제라니아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조곤조곤한 말투로 꺼내놓았다.

    “만약, 아주 만약에. 전쟁을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나라 간에 서로 국경을 침범하고 침해받는 일이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만큼이나 흔한 시대였다. 선대가 추앙받는 건 어쨌거나 그 일련의 고리를 다소 끊어내고 정리했기 때문이다.

    남이 들을세라,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제라니아의 얼굴은 진지했다.

    “전쟁을 거쳐 왕국이 이만큼 번창했다는 걸 알고 있어요. 승리했기 때문에 지배받지 않았다는 것도요. 하지만 가끔 왜 싸워야만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

    “이기는 쪽이든 지는 쪽이든, 결국 희생은 피할 수 없는걸요.”

    수요가 없다면 공급도 없다. 고아원이 많은 이유는 그만큼 고아가 많기 때문이고, 고아가 많은 이유는 가장이 죽은 뒤 먹고살기 힘들어 아이를 내다 버린 여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자들이 죽어나가는 이유는 대개 전쟁이었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이들이라고 아주 멀쩡하진 않았다. 장애를 얻어 돌아오는 이들이 많았고, 몸이 멀쩡하다 싶으면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이들도 상당수 보았다. 환청을 보거나 이명을 듣는 이들도 있었다.

    직접 겪어보지 않았기에 말을 꺼내는 건 언제나 조심스러웠다. 필요하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는데, 가슴은 자꾸만 의문을 제시했다.

    전쟁에 나가 활약하거나 전사하는 것은 기사로서 명예롭다고 여겨진다. 제라니아는 그런 생각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희생을 피할 수 없는 순간이 물론 있겠죠. 하지만…. 선택지 중에 희생하지 않아도 되는 길이 있다면, 그런 길을 선택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묵묵히 듣고 있던 프란츠가 입을 열었다.

    “손해를 보게 되더라도, 그 손해보다 이득이 클 거라 생각하기에 벌이는 일이겠지요.”

    그들이 살아가는 시대에서, 전쟁은 일상이었다. 국가 간의 전쟁은 물론, 내부에서도 끊임없이 크고 작은 내전이 발생했다.

    이유는 각양각색이었다. 사람들은 때로는 명예를, 때로는 생존을, 때로는 이권을 위해, 때로는 정체성을 지키고자 전쟁을 선택했다.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부딪치는 것도 있을 테고 말입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사람이 언제나 이성적인 결정만을 내릴 수는 없으니까. 손뼉도 두 손이 마주 닿아야 온전히 소리가 난다는데, 상대가 평화를 원하지 않는다면 어쩌겠습니까.”

    싸워야지. 가볍게 덧붙이는 프란츠의 푸른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그는 검을 싫어했지만, 동시에 현실적이었다. 이상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혐오하면서도 그런 방식을 아주 버리지는 못했다.

    무언가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으니까. 국가든, 사람이든 간에.

    “그러니, 내 세대에 온전히 전쟁이 없으리라는 보장은 할 수 없습니다. 가만히 앉아 당할 수만은 없으니까요.”

    살기 위해서 남을 죽이는 게 당연시되는 시대였다. 프란츠가 바로 그 산증인이었다. 전쟁에 나가지는 않았다지만, 그는 살아남기 위해 손에 많은 피를 묻혀야만 했다. 사람을 죽이는 걸 즐긴 적은 없으나 필요하다면 망설이지 않았다.

    녹색 눈동자가 상대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이후에도 그는 한결같았다. 합리적이고 냉정하며,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는 점까지도.

    제라니아는 프란츠의 그런 면을 좋아했다. 무조건 제 말을 들어주길 바라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언제나 옳을 수는 없으니까. 진지하게 제 말을 귀담아들어 준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는 정말로 노력하고 있었다. 6년 전 제게 건넸던 약속대로.

    “지킬 것이 있다면 싸워야 한다는 걸 알아요. 당장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갈등이 아주 없지는 않으니까요.”

    “…….”

    “하지만 그래도, 노력하다 보면 달라지는 게 분명 있지 않을까요. 아주 작고 미미한 변화일지언정.”

    곧바로 많은 것이 달라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 세대에서 변화가 두드러지지 않더라도, 이걸 도움닫기 삼아 이후가 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수많은 역사서가 증명하듯이.

    다시 고개를 돌려 천장에 시선을 둔 채로 제라니아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분쟁을 막은 건 후회하지 않아요. 두 번 시도할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요.”

    벨로아와 충돌하게 될 시 예상되는 피해 규모가 어마어마하지만 않았어도 이 정도로 강수를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산이 엄청나게 빠진 만큼 작년에 재정부가 비상이 걸리기는 했지만, 그만큼 걷히는 세금이 상당한 것이 다행이었다.

    제라니아는 이불을 좀 더 끌어 올려 제 코끝을 덮었다. 눈만 내놓은 채로 프란츠에게 힐끔 시선을 두었다. 그는 여전히 제라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곁에 가도 괜찮아요?”

    그렇게 묻자마자, 커다란 손이 제라니아의 등을 감싸 안았다. 홱 잡아당겨진 제라니아의 이마가 프란츠의 어깨에 닿았다. 살갗이 닿아 있어서인지 두근두근,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프란츠.

    “나는 잘하고 있나요.”

    깃털처럼 가볍고 작은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스며들었다. 제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걸 프란츠는 애써 모른 척했다.

    그는 이 순간이 좋았다. 누구에게나 상냥하지만 선이 확실하며, 남한테 의지하는 것을 꺼리는 제라니아가 유일하게 제게만 온전히 그 속을 내보일 때가.

    차오르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제라니아를 와락 끌어안았다. 품에 안겨 있는 온기가 사라지지 않는 것에 안도했다. 마주 안아 오는 손이 정말로 기뻤다.

    “물론 그렇습니다.”

    공허하기만 하던 인생에 자꾸만 낯선 감정이 끼어들었다. 기쁨이니 슬픔이니, 그런 건 자신과 한참 먼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사랑을 모르던 시절에는.

    몇 년이 지났음에도 감정을 인지하는 것은 여전히 더뎠다. 오래 쌓여온 습관이 순식간에 고쳐질 리 없었다. 한 박자 늦게 자각하고 버벅거리는 일을 반복하는 자신을 제라니아는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었다.

    당신을 사랑스럽다 여길 때마다 생각한다. 좀 더 내게 기대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당신이 나 없이 살 수 없게 된다면 좋을 텐데.

    음습한 욕망을 뒤로 물러둔 채, 풀어져 있는 갈색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제라니아에게서는 바람의 향기가 났다. 시원하고 청량한 체향이 안정감을 주었다.

    불쑥 들이닥치는 공포가 눈가를 짓눌렀다. 혼자여도 괜찮다고 생각하던 자신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지금은 혼자 남는 것이 두려웠다.

    프란츠는 속으로 자문했다. 마음이 커질수록 상대를 가두고 싶어지는 건 과연 정상일까.

    충동이 번질 때마다, 결혼식 다음 날을 떠올렸다. 제라니아가 제게 조용하게 화를 내던 순간을 떠올리면 순식간에 마음이 차게 식었다.

    실수해선 안 된다. 제라니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한 번 등을 돌리면 절대 다시 돌아보지 않을 테니까.

    그는 여전히 제라니아를 제외한 모든 것에 무감각했고, 가끔 그런 자기 자신에 자괴감을 느꼈다. 자신은 평범하게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조차 이토록 어려워하는 인간이었다.

    제라니아에게는 소중한 것이 많았다. 정말로 많았다. 그나마 그중 하나가 될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그에게 유일했으면 좋겠다는 양가감정에 시달렸다.

    확실한 건, 이런 자신을 제라니아에게만은 절대 들켜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튀어나오는 대답과 함께 뱉어지는 숨결이 가슴께를 간지럽혔다. 빼꼼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는 제라니아와 시선을 마주했다. 졸음기가 묻어나는 녹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반짝거렸다.

    “프란츠, 있잖아요.”

    전쟁이 없는 시대가 올 수 있을까요. 조그맣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프란츠는 도리어 반문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 말과 함께 제라니아는 스르륵 눈을 감았고, 곧 잠에 빠져들었다. 새근새근 잠들어버린 말간 얼굴을 프란츠는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그의 입이 조용히 달싹였다.

    “그거 압니까.”

    사실 나한테 그 모든 건 크게 의미가 없다는 걸.

    누가 들을까, 차마 내뱉지 못한 말들이 입 안을 돌아다니다 혀에 짓눌러져 녹아들었다.

    가끔, 제라니아를 바라보고 있으면 막막해질 때가 있었다. 멀리 보이는 지평선을 응시하듯, 닿지 못할 무언가를 좇는 것처럼 아득한 기분이 전신을 휘감았다.

    불안하게 박동하는 심장을 애써 무시하며 생각했다. 당신의 소원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제라니아의 얼굴을 끌어당긴 프란츠가 하얀 이마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저, 지금만 같기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