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6화. 6년 후 (3)
뒤를 돌아보자 익숙한 얼굴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라니아를 끌어안은 채로 프란츠는 얼굴을 그의 어깨 위에 툭 얹었다.
“깜짝이야. 언제 온 거예요?”
“방금 왔습니다.”
그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국왕이 되고 나서 가장 바뀐 건 그의 말투였다. 사람들을 하대하는 것도 그렇거니와 어느 순간부터 미소를 짓는 일도 그만두었다.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을 꾸밀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일까.
국왕이 되었으니 아무래도 이전과 같을 수는 없겠지 싶다가도 자신에게는 한결같이 존대를 고수하는 모습에 심장이 간질거렸다.
이게 뭐라고 이러는지 모르겠네.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들을 힐끗 살피던 프란츠가 가만히 손짓했다. 망설이는 제니스와 달리 아이라는 쪼르르 다가갔고, 아이라의 허리를 양손으로 붙잡은 프란츠가 아이를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아이라가 까르르 웃었다.
“우와! 나 키가 컸어요!”
프란츠는 안아 든 딸을 어깨 위로 올려 목말을 태웠다. 아이라는 유독 높은 곳을 좋아했고, 다른 사람보다도 아버지의 어깨 위를 가장 선호했다. 제 머리를 쥐어뜯는 손길에도 프란츠는 덤덤했고, 조마조마한 건 제라니아의 몫이었다.
“그, 위험하지 않아요?”
감히 국왕의 어깨 위를 점령하고도 아이라는 해맑기 짝이 없었다. 제니스는 어머니의 옷자락을 더욱 꽉 붙들면서도 동생한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떨어질까 봐 조마조마한지 가뜩이나 커다란 눈이 더욱 커졌다.
“괜찮습니다. 나중에 크면 해주고 싶어도 못 할 테니까요.”
그는 살가운 성격이 아니었고, 아이를 대하는 건 유독 서툴렀다. 처음에는 제 자식들조차 만지는 것을 조심스러워할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이 해달라고 하는 건 웬만해서는 거절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아이라를 데리고 방 안을 돌아다니다가, 프란츠는 딸을 천천히 바닥에 내려주었다. 신나게 웃고 있는 아이라의 옆으로 쪼르르 다가간 제니스가 하얀 볼을 세게 꼬집었다.
“아야!”
“위험하다고 했잖아!”
“안 떨어진다니까?! 젠은 겁쟁이야, 겁쟁이!”
“나 겁쟁이 아니야!”
아웅다웅하는 둘을 보며 이마를 짚는 제라니아와 달리 프란츠는 조용히 말했다.
“그만.”
나직하게 깔리는 목소리에 위압감이 서렸다. 아버지의 한 마디에 둘은 싸움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무릎을 굽힌 채 아이들과 시선을 맞췄다.
“싸우더라도 손은 쓰지 말라고 했을 텐데.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건, 야만적인 행위다.”
제법 엄격하게 말하며 그는 제니스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왕이 될 자라면 차분하게 문제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시작부터 냉정함을 잃으면, 그 순간부터 지고 들어가는 거니까.”
“네….”
제니스는 시무룩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걸 왜인지 불만스럽게 쳐다보는 아이라를 보며 제라니아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한참 아이들과 놀아주던 중, 피곤해 보이는 제라니아의 안색을 본 프란츠는 시종들을 시켜 아이들을 방으로 돌려보냈다. 그제야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풀썩 앉은 제라니아가 쭉 기지개를 켰다.
“진짜 체력이 떨어지긴 했나 봐요. 이제 막 저녁이 되었을 뿐인데 이렇게 지치다니.”
“어전에서 그렇게 싸워댔으니, 피곤하지 않은 게 더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무심히 대꾸한 프란츠가 근처에 있는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뼈가 있는 말에 제라니아는 웃음을 흘렸다.
“뭐 어쩌겠어요. 그렇다고 아버지가 영원히 공작위에 앉아 있을 수 있는 것도 아닌걸요.”
아이작 바이첸은 《어스빌 선언》을 마지막으로 아들인 프레드릭에게 데브론 공작령과 작위를 물려주고 사실상의 은퇴를 했다. 프란츠는 계속 그를 보내주지 않으려 했으나, 선대가 죽은 이후 시들해진 그의 안색을 보고 결국 사직을 허가했다.
비어 있는 재상직에는 벨루인 폴리에트가 임명되었고, 아버지를 대신해 영지에 주로 머물던 프레드릭 바이첸이 수도로 올라왔다.
그는 어전에 참석하는 순간부터 제라니아와 가장 대립하는 인물이 되었다.
보수적이면서도 제법 시야가 넓은 아이작과 달리 프레드릭은 전형적인 귀족에 가까웠다. 남매이기만 했을 때는 원만하게 지냈는데, 정치적으로 만나니 이만큼 문제인 상대가 없었다.
민생을 중시하는 제라니아와 귀족의 이익을 우선하는 그는 그 목표부터가 물과 기름처럼 엉키려 해도 엉킬 수 없는 관계였다. 둘 다 이성적인 만큼 어느 정도 대화로 조율하기는 했으나 타협점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보데로아 후작이 사라지고 난 뒤로 제법 수그러들었던 기존의 귀족파들이 그를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한 것을 보고 제라니아는 혀를 내둘렀다.
프레드릭을 상대하고 있자니 프란츠가 왜 아이작을 가급적 오래 붙들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작은 내수를 촉진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 손해를 보더라도 감수했으나 프레드릭은 달랐다.
하긴, 자기의 권리를 빼앗으려 드는 것에 얌전히 앉아 당하는 이가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하나뿐인 오빠와 충돌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머리가 아프긴 했으나, 언젠가는 겪었을 일이라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사실 프레드릭의 입장에선 자신이 이단아에 가까울 것이다. 그와 아주 척질 생각은 없었기에 적당히 타협하고는 있었다.
정치란 그런 거니까.
어전에서 만날 때만 그렇지, 밖에서는 여전히 나름 사이좋게 지내고 있으니 괜찮았다. 그는 제법 좋은 외숙부였고 조카들을 귀여워했다. 관습을 워낙 중시하는 게 문제일 뿐.
“그래도, 그 말엔 동의해요.”
“뭘 말입니까.”
“너무 몰아붙이면 오히려 문제가 벌어질 수도 있다는 거요.”
“…벨로아에 관해 생각하고 있습니까.”
제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프란츠는 제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원칙적으로는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버리기는 아깝지만 제대로 대우할 생각이 없는, 클라단 내에서 벨로아의 위치는 딱 그러했다. 마법사들이 모여 사는 도시라 그런 것도 있을 것이다.
도시 벨로아. 마법사들의 성지.
마법사들의 자치령이라고 불리는 이 도시는 영지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인 것과 동시에 프로모 왕국 시절부터 핍박받던 마법사들이 모여 만든 장소였다.
마법사들은 인간을 뛰어넘는 능력을 토대로 그들에게 간섭하려는 이들을 물리치며 도시를 발전시켰다.
그들이 가진 무력을 무시할 수 없었던 케라온은 벨로아와 협약을 맺었다. 도시는 자치권을 부여받는 대신 필요할 때 그들의 능력을 일부 제공할 것을 약속했고, 이는 12년 전 벌어졌던 전쟁에서 실현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들은 트라이탄과 마찬가지로 신전에 편입되기를 거부했으나, 왕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여전히 영토 내에서 배척받았다.
프로모에서는 태어나는 아이가 맨 처음 쥐는 게 나뭇가지라고들 한다. 조금 더 자라면 목검을 쥐고, 무리를 형성하면서 내부에서 서열이 정해진다. 영토의 대부분이 산과 숲이 많은 험지인 것도 이러한 분위기에 영향을 미쳤다.
그런 만큼, 신체의 단련보다도 정신적인 수양과 마력을 제어하는 것을 우선시하는 마법사들을 이해할 수 있을 리 만무한 것이다.
문제는 1년 전, 윌터 케라온이 훈련 중인 기사단을 이끌고 벨로아에 들렀을 때 발생했다. 그는 길을 열어줄 것을 요구했고 벨로아는 받아들였다.
그가 군사를 이끌고 들어와 몇 날 며칠을 머물 줄 알았더라면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윌터가 끌고 들어온 기사들이 길을 지나가던 마법사들과 싸움이 붙어 난장판이 되었을 때, 그는 길길이 날뛰었다. 기사들이 더 많이 다치기는 했으나 상황을 따져보면 먼저 시비를 건 건 그들이었다.
그러나 윌터는 적반하장으로 나오며 높은 배상금을 요구했고, 그제야 벨로아의 수장들은 그가 이곳에 온 목적이 저것임을 짐작했다. 재판을 한다 한들 재판권을 가진 건 공작이 보낸 관리들인 만큼 도시민들에게 불리한 싸움이었다.
고민 끝에 벨로아의 시민들은 파격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공작가를 누를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인 왕실에 파발을 보내 상황을 정리해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왕실은 어떻게든 둘 사이를 중재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케라온은 자치권을 내세워 아무리 왕실이라도 영지 내부의 문제에 간섭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왕실은 케라온 공작가에 벨로아의 법적 관할권을 전부 인계할 것을 요구하는 수를 두었다. 그 대가로 엄청난 양의 자금을 제시하기는 했으나 사실상 벨로아의 편을 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왕실에 관할권이 넘어가는 순간 케라온은 더 이상 벨로아에 관여할 수 없었다.
벨로아의 도시민들은 왕실의 결정에 환호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붙는 배척에 지긋지긋해하던 이들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예산에는 좀 무리가 갔을지 몰라도, 벨로아가 내재한 발전 가능성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투자였다. 금액이 합리적이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나름대로 평화롭게 끝냈음에도 그들이 반발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내부에서 벌어진 문제에 간섭했다는 것도 그렇지만, 아마.
“내전을 벌이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을 것 같긴 해요. 일부러 행패를 부리러 간 걸 보면요.”
여차하면 벨로아는 투쟁을 불사할 기세였고, 케라온이라고 그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본보기를 보이기 위함이겠지.
당장 표면적인 문제만 보더라도, 케라온은 예전부터 벨로아에 도시 내로 숨어 들어온 죄인들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으나 도시는 자치권을 이유로 그 청을 거절해왔다.
죄인 대부분이 여성인 데다 죄목이 가족 살해죄이며, 죽은 인물들 대부분이 기사라는 점을 생각하면 인과관계는 금방 보였다. 가정 내에서 폭력이 오가는 건 흔한 일이었으니까. 케라온의 입장에서는 앞길이 창창한 기사들을 죽인 대역죄인일 뿐일 테지만.
그러니, 이참에 벨로아의 기세를 꺾어놓을 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경고였으리라. 그들이 날고 기어도 자신들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내민 경고.
아무리 저항해봐야 그들은 클라단 영지 소속이었다. 희생은 좀 날지 몰라도, 밖으로 통하는 경로를 전부 틀어막으면 언젠가는 굴할 수밖에 없다.
이 문제에 윌터가 엮여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제라니아는 쓰게 웃었다. 여전히 변한 게 없구나, 그 사람은.
“아마도 내가 방관할 거라 계산했겠지요. 사실 어느 정도는 정답이기도 했고 말입니다.”
사실 왕실의 입장에서 정말 문제를 원만하게 넘어가고자 했다면 케라온의 편을 들었어야 맞았다. 프란츠가 즉위한 이후로 왕실과 케라온의 분위기가 미묘해진 것은 사실이고, 이 사건은 그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전환점이 될 수 있었다.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습니다. 나는 실리를 따져서 판단한 거니까.”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길래 그래요?”
“세상 모든 근심이 다 당신 것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그렇기에 제라니아는 고민해야만 했고, 프란츠 역시 저울질에 신중했다.
내전을 감수하고 케라온의 편을 들 것인지, 벨로아의 편을 들어 가급적 원만하게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
진지한 토론과 논의를 통해 제라니아는 프란츠를 설득하는 것에 성공했고, 어전에서의 회의를 거쳐 실행에 옮겼다. 이 결정이 케라온과의 정치적인 관계에 영향을 주리라는 걸 알았지만, 벌어질 일을 예상하면서도 문제를 방치할 수는 없었다.
짓밟고 짓밟히는 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라도, 피를 흘리지 않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클라단에 여러 가지 지원을 보내고 있는 것도 그 일환이었다.
힘의 논리만이 아닌, 좀 더 온건한 방향을 선택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