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115화 (116/171)
  • 제115화. 6년 후 (2)

    왕세자 시절부터 그를 총애했기로 유명했던 국왕은 왕비에게 몇 가지 권한을 부여했는데, 그중에는 내정에 관여하고 어전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권리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여인은 얌전히 영지나 관리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면 된다 생각하던 기존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그들의 반발심은 왕비가 어전 회의에 참석해 내민 교육 개편안을 보았을 때, 왕비의 아버지인 바이첸 공작의 눈치를 보면서도 불만을 표출하는 면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런 행태에 공작은 조용히 눈썹을 꿈틀거렸으나 나서지는 않았다. 왕비는 쏟아지는 질문에 의연하게 대처했고, 구체적인 설명을 통해 상대의 트집을 물리쳤다.

    법도가 있어 그 이상으로 무례하게 굴 수는 없었던 만큼 귀족들은 이를 악물었으나, 정작 국왕은 그 날 선 구도를 흥미롭다는 듯이 관조할 뿐이었다.

    《어스빌 선언》의 주체가 왕비라는 것이 알려진 이후, 그간 지휘했던 여러 가지 정책들이 암암리에 알려지면서 왕비는 민중의 지지를 한 몸에 받았다. 일관되게 국민들을 위하던 그간의 행보가 빛을 발한 것이다.

    조용하고 차분한 성품으로 유명한 왕비도 회의 중에 국왕과 종종 대립하고는 했는데, 그 논쟁이 어찌나 길어지던지 중간에 끊어야 하는 경우가 생기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물론 그것만이 문제의 끝은 아니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차분하게 묻는 제라니아의 시선이 제 반대편에 선 진갈색 머리칼의 남자에게로 향했다. 서른 중반으로 보이는 단정한 이목구비의 남자, 프레드릭 바이첸이 나직이 고했다.

    “메라이스에 보내는 특허장을 물러 주십시오.”

    메라이스는 왕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로, 강을 끼고 있고 교통이 편하여 상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주를 이루었다.

    덩치가 커서 여러 영지에 발을 걸치고 있는 만큼 이권이 꽤 복잡했고, 신전과 주변 영주들이 법적 관할권을 나눠 가지고 있어 매년 말썽이 벌어졌다.

    상비군 주둔을 승인한 뒤, 자율권을 일부 보장받은 도시 몇몇은 요 몇 년간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그중 하나였던 메라이스는 일부 권리를 더 보장해 달라고 주장하는 시민들이 도시 내에서 농성을 벌였다.

    왕실은 그들의 요구가 적힌 공문을 받아본 뒤 재판권의 발부는 불허하나, 왕실에 헌납하는 세율을 좀 더 올리는 대신 상업에 필요한 통행세나 거래세, 관세 등을 일부 감면하겠다는 특허장을 발부하기로 했다.

    귀족들은 이 결정에 크게 반발했다. 그 대표 격인 인물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도시가 발전하면 그 주변에 경제적으로도 두루 좋은 영향을 줄 겁니다. 영주들에게도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닐 텐데요.”

    왜 이제 와서 이러냐고 돌려 묻는 것에 프레드릭은 진지하게 답했다.

    “저희 쪽에서 권한을 부여하는 것과, 그쪽에서 직접 요구한 것을 들어주는 것은 명백히 다릅니다. 한 번 허락하기 시작하면 그들은 점점 더한 것을 요구할 겁니다.”

    상업의 발전으로 도시의 자금력과 군사력은 어느새 영주들을 위협할 수준으로 성장했다. 때문에 도시민들과 영주들 사이의 충돌은 나날이 커져만 갔고, 영주들은 도시가 이 이상 자신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드는 것을 원치 않았다.

    선대는 그래도 영주들의 편을 들어주었으나 지금의 국왕은 그와 달랐다. 물론 아주 귀족들을 등진 건 아니었으나 명확하게 선을 그었고, 그건 왕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무엇이든 억누르려고만 하면 더한 반발이 오기 마련입니다. 적당히 의견을 수용하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이 이상 농성을 지속하게 둘 수도 없지 않나요.”

    도시민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에 영주들과 신전의 세를 누르고자 하는 의도가 정녕 없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애초에 왕권 강화라는 명목이 없었다면 프란츠를 설득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재판권까지 허락하기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지나치면 없느니만 못했다. 이 이상 신전과 영주들의 반발을 살 필요는 없는 것이다.

    면세권을 거두고 기세가 다소 사그라들었다 하나 신전이 가진 자본과 영향력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들이 가진 자원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언제까지고 버틸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맹렬하게 타오르던 불꽃도 언젠가는 잿더미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불꽃이 무엇을 얼마나 많이 태울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쯤에서 진화하는 게 현명하지 않겠습니까.”

    “불을 끌 때는 물을 부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모래로 꺼야 하는 불에 물을 부으면 도리어 역효과가 나기 마련입니다. 벨로아의 경우처럼 말이지요.”

    벨로아의 이름을 듣는 순간, 프레드릭의 눈동자가 알 수 없는 감정을 담고 깜빡거렸다.

    마법사들의 도시 벨로아의 관할권을 두고 왕실과 케라온 공작가가 대립했을 때, 프레드릭은 케라온의 편을 들어 도시의 인수를 반대했다. 어제의 적은 오늘의 동지라고 했던가. 아버지를 닮아 셈에 냉정한 그였기에 내릴 수 있는 결정이었다.

    잠시 침묵했던 프레드릭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외람되오나 왕비님께서는, 귀족의 살을 깎아내어 평민들에게 주고 싶으신 겁니까.”

    대담하기 짝이 없는 발언에 그 주변에 서 있던 귀족들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살벌해진 분위기 속에서도 제라니아는 싱긋 웃었다. 제 어깨에 얹어진 벨벳 망토가 오늘따라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이 정도에 깎여 나갈 살이라니, 너무 물렁한 게 아닌가 싶은데요.”

    바가지로 주고 포대로 받은 프레드릭의 눈썹이 살짝 위로 꿈틀거렸다. 실처럼 팽팽하게 당겨지는 분위기 속에서, 무심히 상황을 관조하던 프란츠가 입을 열었다.

    “바이첸 공작. 그대의 말에도 일리가 있네. 그러나, 애초에 그대들의 선에서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여기서 이렇게 논의할 일도 없었으리라 생각하는데, 아닌가?”

    “…….”

    내부의 결속력을 중시하는 탓인지, 도시민들의 농성은 벌써 한 달이 넘게 지속되었다. 이는 메라이스가 가진 군사력과 자금력에 힘입어 가능한 일이었다.

    질질 끌어봐야 양쪽 다 손해만 보는 상황에서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고작 도시 하나를 제압하자고 군대를 투입할 생각은 없네. 이보다 손해 없이 끝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내게 알려줬으면 좋겠군.”

    “…….”

    “더 할 말이 있나?”

    “…없습니다.”

    프레드릭이 입을 다물자, 그 이후로 입을 여는 이는 거의 없었다. 회의가 마무리되고 난 뒤 밖으로 나가던 제라니아는 제 옆으로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누군지 알았기에 돌아보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온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귀족들을 너무 자극하지 마십시오. 지금도 아슬아슬하다는 걸 모르지 않겠지요.”

    충고 아닌 충고를 남기고 프레드릭은 제라니아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걸어가는 단정한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제라니아 역시 대기하고 있던 시녀와 기사들을 이끌고 제 갈 길을 걸어갔다.

    오늘 회의에 케라온 공작이 불참해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랬다면 시간이 두 배가 넘게 걸렸을 것이다.

    “어머니!”

    처소로 돌아오자마자 제라니아의 허리를 향해 와락 달려드는 누군가가 있었다. 붉은빛이 도는 곱슬머리를 가진 귀여운 여자아이가 제라니아를 올려다보며 밝게 웃었다.

    “다녀오셨어요!”

    아이는 이제 세 살이 된 것치고 정말 키가 컸는데, 이것만은 아버지를 닮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제라니아는 제 허리를 끌어안은 딸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머리 장식이 없는 걸 보니 또 불편하다고 떼어낸 모양이다. 이걸 본 순간 절망할 시녀들의 비명 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아이라, 어머니가 불편해하시잖아.”

    백금발에 가까운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남자아이가 멀찍이 서서 핀잔을 줬다. 아이라는 뒤를 홱 돌아보며 하나뿐인 제 오빠, 제니스를 향해 소리쳤다.

    “사실 젠도 달라붙고 싶으면서! 방금 전까지 다리를 탁탁거렸잖아.”

    “…난 괜찮거든.”

    동생보다 두 살 많다고 제법 의젓한 모습을 보이려는 제니스를 보며 제라니아는 웃고 말았다. 가만히 손짓하자, 망설이던 소년은 재빨리 제라니아의 앞으로 다가왔다. 멀뚱히 서 있는 아들의 어깨를 끌어안아 토닥였다.

    “어서 오렴.”

    “그건 제가 해야 하는 말 아닌가요, 어머니.”

    아이가 또박또박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제라니아가 제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는 손길에는 얌전히 몸을 맡겼다.

    예쁜 백금발과 하늘색의 눈동자, 인형같이 예쁜 얼굴의 소년은 어린 시절 만났던 프란츠를 꼭 닮아 있었다. 귀염성 없는 말투조차 그와 참 판박이였다. 말랑말랑한 볼을 살짝 잡아당겼다 놓아주자, 아쉬운 얼굴을 하면서도 말은 안 한다든가 하는 점이 특히 그랬다.

    내 아들이지만 이 정도면 프란츠가 혼자 낳은 거 같은데.

    전에 한 번 그렇게 말했더니, 프란츠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면서 ‘제가 저 녀석보다는 나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물론 신빙성은 없었다.

    “아버지는 언제 오시나요?”

    종달새처럼 재잘거리는 아이라를 보며 제라니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국왕 폐하는 저쪽 처소에 계실 텐데?”

    “하지만 아버지는 거기보다는 여기 있으실 때가 많잖아요.”

    제니스의 것과는 다른, 조금 더 파란 눈동자가 지그시 제라니아를 쳐다보았다. 내성적이고 차분한 편인 제니스와 달리 아이라는 제법 활발하고 똑똑했다. 그리고 궁금한 건 못 참는 호기심 강한 면모가 두드러졌다.

    외양적인 것만 보면 아무래도 자신보다 프란츠를 더 많이 닮은 건 아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애들은 날 별로 안 닮은 것 같아.

    아쉬움을 담아 한 소리 했더니 리암은 못 들을 소리를 들은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제니스는 몰라도 아이라는 그냥 너라고 일갈하던 그는 건강한 게 어디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그럴 게 리암의 아들인 미하일은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다. 리암보다 밀드레드를 더 많이 닮은 만큼, 건강 문제도 함께 물려받은 모양이었다.

    프란츠가 왕위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리암은 호위 기사를 그만두고 밀드레드와 함께 고향인 셀바 영지로 내려가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 이후로 아버지의 밑에서 몇 년간 교육을 받던 그는 최근에서야 공작을 대리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다시 수도로 올라왔다.

    이후 그는 간간이 제라니아를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흘러가는 상황을 보면 조만간 작위를 이어받을 듯했다.

    “어머니, 무슨 생각 하세요?”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아이라에게 제라니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글쎄, 귀엽다는 생각?”

    “저는 멋있어요! 귀엽지 않아요!”

    당당하게 주장하며 아이라는 양손을 허리에 얹고 제라니아를 올려다보았는데, 정말 마구 쓰다듬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옆에서 괴생명체를 보듯이 아이라를 보며 슬쩍 제라니아의 드레스 자락을 붙잡는 제니스는 덤이었다.

    예법대로라면 아이들에게도 존대를 써야 했으나, 지금은 주변에 사람이 없으니 괜찮았다. 워낙 가족끼리 허물없이 친근하게 자라온 만큼 제라니아는 이런 부분에는 꽤 물렀다.

    그러던 중, 갑자기 아이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이지? 뭐냐고 묻기도 전에 제라니아의 허리를 커다란 손이 붙잡아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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