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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114화 (115/171)
  • 제114화. 6년 후 (1)

    하늘을 붉게 물들이던 태양이 암초에 걸린 배처럼 서산 너머로 가라앉고, 짧아진 낮을 따라 음울한 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어둑해지기 시작한 거리를 싸늘한 바람이 휘이잉 불어 지나갔다. 밖을 나다니던 사람들은 제 옷깃을 붙드는 추위를 피해 아늑한 집에 몸을 맡겼다. 순식간에 거리는 텅 비었다.

    어둠이 지천에 내려앉자, 건물에 매달려 있는 창문 너머로 하나둘씩 불빛이 새어 나왔다. 유리창에 달라붙은 주홍색 불빛이 차가운 밤을 몰아내며 은은하게 반짝였다.

    으스스하다 싶을 정도로 조용한 거리를 뛰어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갈색 셔츠와 바지를 걸치고 있는 소년의 붉은 고수머리가 살랑살랑 움직였다.

    “와, 늦었다!”

    소년은 이제 막 심부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집에 돌아오라는 주의를 듣긴 했으나, 이렇게 시간이 늦어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가을이라 확실히 해가 짧아지긴 했는지 벌써 어두웠다.

    빨리 집에 가서 저녁 먹어야지. 그렇게 생각하던 소년의 귓가에, 바람에 섞여든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미약하기 짝이 없는 소리가 아기 고양이의 발톱처럼 고막을 할퀴었다.

    두려움을 떨치듯 천천히 걸음을 빨리하다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리는 소년의 공포를 먹고 점점 커지기만 했다. 집으로 가기 위해 바로 보이는 모퉁이를 돌았다.

    탁,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모퉁이를 돌아보자마자 소년은 바짝 얼어붙었다. 제가 지나온, 간간이 불빛이 켜져 있던 거리와는 달리 여기는 전부 불이 꺼져 있었다. 꼭 빛이 암흑에 집어삼켜진 것만 같았다.

    압도적인 어둠을 대면한 탓에, 쉬이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소년의 바로 앞쪽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서서히 일어나는 형체를 본 소년의 주근깨 어린 얼굴에 공포감이 선연했다. 두려움에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새까만 괴물이 소년을 집어삼켰다.

    * * *

    문을 열고 넓은 홀로 들어서, 붉은 카펫을 따라 걸어가면 높게 쌓아 올린 계단이 보인다. 그 계단의 맨 위에 자리한 옥좌에는 수려한 생김새를 가진 젊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햇살을 머금은 듯이 밝은 금발에 라피스라줄리를 연상시키는 군청색의 눈동자, 선명한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는 마치 예술가의 손에 빚어진 조각상처럼 보였다.

    대각선 위에 자리한 커다란 창문에서부터 쏟아진 하얀 햇빛이 남자를 흠뻑 적셨다.

    긴 팔다리에서부터 목까지 빈틈없이 가린 단정한 옷차림과 달리 그의 주변은 퍽 엉망이었다. 지팡이는 바닥에 내팽개쳐 두고, 왕관은 왕좌의 장식대에 걸어 놓았으며 검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남자는 당당했다. 마땅히 제가 있어야 하는 자리라는 듯, 왕좌에 앉아 한쪽 팔에 얼굴을 괴고 있는 모습이 더없이 오만해 보였다. 따분하다는 듯 눈을 깜빡이던 그의 입술이 느릿하게 말을 자아냈다.

    “그래서.”

    “최근 몇 달간 수도에서, 실종 사건이 잇달아 발생하고 있습니다.”

    계단 아래에 서 있는 회색 머리칼의 남자, 이렌스가 곧장 대답했다. 지금 어전에는 그와 프란츠, 티레인과 제롬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사라지는 이들에게 마땅한 공통점은 없어 보입니다. 나이 든 노인에서부터 어린애, 젊은 남녀까지 다양합니다. 평민이 다수지만 귀족 신분인 이들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소식이 끊긴 사람만 찾아봤기 때문에 정확성은 다소 떨어질 수 있습니다.”

    “사람 한둘 사라지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텐데?”

    굳이 이렇게 시간을 내서 보고해야 하는 일이냐고 묻는 주군에게 그는 차분히 응했다.

    “목격자가 있습니다.”

    “목격자?”

    “길을 지나가던 청년인데, 그림자가 어린 소년을 삼키는 것을 보았다 하더군요. 들킬까 봐 조용히 숨어 있다가 날이 밝자마자 경비대에 찾아가 알렸다 합니다. 그걸 토대로 알아본 결과입니다.”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간 이렌스가 제가 들고 있던 종이뭉치를 프란츠에게 내밀었다. 프란츠의 손가락이 종이를 팔랑팔랑 넘겼다. 한참 동안 자료를 읽다가, 마지막 페이지를 확인한 뒤 프란츠가 말했다.

    “…어전 회의에서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는?”

    “아직 외부로 말이 새어 나가서는 곤란하니까요. 우선 경비대에 신경 써두라고 전언해 두었습니다.”

    이렌스는 이 사건이 6년 전, 감쪽같이 사라졌던 조직의 잔재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조심스레 선보였다.

    국왕이 된 프란츠의 지원과 본거지를 뒤져 알아낸 정보를 토대로 그들은 거대한 그물망을 쳤고, 틈새로 미끄러져 도망치려는 놈들을 악착같이 쫓아가 그 뿌리를 완전히 뽑아내고 조직을 와해시켰다.

    그러나 사라진 이들의 행방과 국왕의 죽음에 얽힌 진실은 끝내 밝혀내지 못했다. 그 사실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찜찜한 기억으로 남았다.

    사실 이렌스가 보고한 피해 규모만 보면 소규모 인신매매단들이 설치는 수준에 가까웠다.

    경비를 더 세운다 한들 소소한 범죄까지 뿌리 뽑는 건 불가능한 데다, 왕이 되고 나서 거하게 물갈이를 했더니 인력은 늘 부족했다.

    이렌스가 가진 뛰어난 직감과 거시적인 시야가 아니었더라면 그렇게 신경 쓸 일이냐고 되물었을 것이다. 하나 프란츠는 그러는 대신 이렌스의 옆에 서 있는 티레인을 향해 눈짓했다.

    “알아보도록.”

    “예, 당장 수색대를 꾸리겠습니다.”

    회의의 종결이었다.

    * * *

    프란츠 리나엔이 재위한 지도 벌써 6년이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왕족들을 전부 궁에서 내보낸 뒤, 대대적인 물갈이를 했다. 겉으로는 반역자가 더 있을 가능성을 색출하기 위해서라 공표했으나, 실상은 거미줄처럼 복잡하기 짝이 없던 왕궁의 관계도를 정리하는 작업에 가까웠다.

    들어오는 이보다는 나가는 이들이 훨씬 많았고, 왕족을 수행하던 이들도 사라진 탓에 궁은 무척 휑했다. 반년이 지나 정리가 얼추 마무리되자, 왕실에서는 새로운 인력을 차출하기 위해 공고를 내다 붙였다.

    기존의 공고와 다른 점이라면, 신분의 제한을 두지 않고 사람을 뽑는 특별 전형이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평민을 왕궁에 들이겠다는 정신 나간 발상에 귀족들은 크게 반발했으나, 민심은 상당히 고조되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시종, 시녀로 선발된 이들은 얼마간의 교육을 받은 뒤 왕실에 소속되었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건물들이 국가사업이라는 이유로 건설되기 시작했다. 그것이 아카데미의 원형이라는 것이 알려진 것은 1년 뒤였다.

    왕이 된 지 2년이 되던 해에 그는 노예제 폐지를 발표했다. 단, 노예문서를 수거하는 대신 귀족들에게 일정량의 돈을 지급하고, 해방된 노예들은 그 돈을 온전히 갚으면 자유민이 될 수 있는 점진적인 방식을 차용했다.

    영지의 재정이 갈수록 어려워지면서 도시로 도망가는 농노나 노예들이 속출하고 있던 만큼, 언제 빈껍데기가 될지 모를 노예문서에 연연하는 귀족은 별로 없었다.

    곧 수많은 문서들이 불쏘시개가 되어 사라졌고, 노예였던 이들은 새로이 작성된 계약에 따라 국가라는 주인에 묶여 세금을 내는 입장이 되었다.

    같은 해 6월, 왕실은 가장 기본적인 교육 기관인 아카데미의 수를 대폭 늘리겠다는 이른바 《어스빌 선언》을 발표한다.

    이제껏 왕국에 존재했던 아카데미나 대학은 신전에서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도시 내에 몇몇 아카데미가 새로 생기기도 했으나 하급 귀족이나 부유한 평민들만이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 생겨나는 아카데미들은 그 체계가 전혀 달랐다. 시험을 쳐야 하거나 높은 교육비를 지불해야 했던 아카데미의 장벽을 대거 낮춰, 공부하고 싶은 자라면 누구나 싼값에 쉬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개편했다.

    이는 교육이 특권층의 전유물에 가까웠던 그간의 관습을 완전히 뒤집는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실이 공표된 뒤 기존의 평민들과 농노들, 노예제가 폐지되어 제대로 된 봉급을 받을 수 있게 된 이들이 전부 아카데미로 몰려들었다. 도시에서 일하는 기술직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그들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수업을 들었다.

    간단하게나마 글을 쓰고 읽을 줄 아는 이들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면서, 공고의 형태 역시 간단한 단어를 사용해 보내기 시작하자 비리가 크게 줄었다.

    고용 계약도 대부분 구두로 진행되던 예전과 달리 점점 문서화되어 갔고, 억울하게 독박을 쓰는 경우도 차츰 줄어들었다.

    장원이 줄어들면서 도시가 점점 커지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면서 여러 산업과 상업이 급속도로 발전해갔다.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처럼 대대적인 개혁이 진행되는 가운데, 내부에서 다소 혼란이 벌어지긴 했으나 의외로 크게 문제는 없었다. 주변국의 정세가 꽤 잠잠했기 때문이었다.

    서쪽의 마법 왕국 헤리타는 왕국의 다수를 이루는 평민층과 왕정 사이의 대립이 몇 년에 걸쳐 고착화된 상태였고, 동쪽의 리하르타넨 공국은 오랜 내전이 이제 막 끝난 참이라 내정을 안정시키기도 바빴다.

    북쪽에 자리한 디나이안 왕국 역시 나라 곳곳에서 크고 작은 분란이 벌어지고 있어 외부에 눈을 돌릴 여력이 없는 상태였다.

    마치 천운을 타고났다 싶을 정도로 적당한 시기를 틈타 개혁을 끌어가는 중심에는, 이제 막 왕위에 오른 새파랗게 젊은 국왕과 더불어 그의 하나뿐인 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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