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113화 (114/171)
  • 제113화. 과거로부터의 장례식 (5)

    “이런 감정이 어떻게 사랑일 수 있을까요.”

    아끼는 만큼이나, 잃어버릴까 겁이 났다. 가둘 수 있다면 진작에 가두었을 것이다. 지금 그에게는 그럴 수 있는 권력과 힘이 있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거센 욕망이 뻗으려는 손을 계속 멈추게 했다.

    나는 나로 인해 망가지는 당신을 보고 싶은 게 아니었으므로.

    밝게 웃는 당신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언제까지고 그렇게 웃는 당신을 볼 수 있다면, 내 욕망 따위는 얼마든지 누르고 또 누를 수 있다고.

    당신이 이런 나를 두려워하지 않게. 그래도 곁에 있을 만하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목을 가다듬었다. 평정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는데도, 정제되지 못한 감정들이 자꾸만 목소리를 떨리게 했다.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니-.”

    평생 한 가지만을 좇았고, 그것이면 된다 여겼던 삶이었다.

    “…내게 아무 감정이 없다 해도 괜찮습니다.”

    복수심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원하는 건 모두 이루어줄 테니, 계속 내 곁에 있어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생겼을 뿐.

    당신을 끌어안고 있음에도 자꾸만 갈증이 났다. 어떻게든 하고 싶다가도, 마음 가는 대로 하자니 그것대로 겁이 났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가 가질 수 있는 무언가를 쥐고 있는 것처럼, 딱 그 정도만 절박했다.

    영원히 해갈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았다. 삶이 조금 더 버겁더라도 당신이 있다면 견딜 만하리라.

    좀 더 낭만적으로 말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제가 듣기에도 퍽 초라한 고백이었다. 타인에게 감정을 드러내는 게 너무도 오랜만이라 그런지 여러모로 엉망이었다.

    할 수 있는 말은 다 했으므로 그는 조용히 대답을 기다렸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제라니아의 손이 프란츠의 가슴을 세게 밀어냈다. 순순히 힘을 빼고 뒤로 물러나면서도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굳었던 프란츠는 발갛게 부은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제라니아와 마주했다.

    왜 갑자기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프란츠와 달리 분한 것처럼 입술을 잘근 깨물던 제라니아가 입을 열었다.

    “당신을 좋아해요. 아주 많이.”

    느닷없는 선언에 놀라기도 잠시, 말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말 같은 거 하지 마세요. 그걸 당연하게 이야기하지 마세요.”

    언제나 득과 실을 따지던 남자가 자신을 끌어안고 애원하는 순간, 가슴이 먹먹하면서도 동시에 분기가 치솟았다.

    아무 감정도 없어도 괜찮다니, 진심인가? 한쪽이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퍼붓는, 그런 게 건강한 관계일 리 없었다.

    적선하듯 거둬지는 관계여도 괜찮다니. 당신이 그런 취급을 받을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골머리가 아팠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뒤틀린 걸까, 이 사람은.

    “더 많은 걸 바라도 괜찮아요. 나는 당신을 착취하고 싶은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는 자신 혼자 일방적으로 감정을 가진 것처럼 말하는데, 제라니아라고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자신은 이 정도로 다른 사람을 신경 써본 역사가 없었다. 당장 방금 전까지도, 혼자 있게 두고 싶지 않아서 온 왕궁을 이 잡듯이 뒤지지 않았던가.

    사랑인지는 확신할 수는 없어도, 인간적인 호감의 범주를 한참 넘어선 건 분명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얼떨떨한 얼굴을 한 프란츠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쨌거나 이 상황이 기회라면 기회였다. 삶이 그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을지 몰라도, 내가 당신에게 가치가 있을 수 있다면.

    그 가치를 기꺼이 그를 살리는 것에 사용할 것이다.

    “나는 당신이, 무언가를 아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저 자신이 될 줄은 몰랐지만. 소매를 들어 제 눈가를 북북 문지른 제라니아가 프란츠를 바라보았다.

    “프란츠. 당신이 나와 함께 있어서 평범해질 수 있는 거라면, 계속 곁에 있을게요. 당신이 행복하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예전에도 했던 약속을 다시 한번 입에 담았다.

    “원하는 게 있으면 꼭 얘기해요. 전부 들어줄 수는 없더라도, 노력해볼 테니까. 당신 말고 다른 사람을 아예 보지 않는 건 아무래도 어렵겠지만요.”

    마지막에 덧붙이는 말에 웃음기가 번져 있었다. 제라니아는 장난스럽게 부연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 안 해도, 우린 어차피 결혼한 사이잖아요. 당신이나 나나 어느 한쪽이 죽기 전까지는 함께여야 한다고요.”

    “죽지 마십시오.”

    농담 삼아 한 말인데 진지한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죽는 건 두렵지 않은데, 당신이 죽는 건 두렵습니다. 그게 나로 인한 거라면 더 참을 수 없습니다.”

    제라니아가 화살을 맞을 뻔했을 때도 그랬고, 이번 마차 사건 때도 그랬다.

    미끼가 되어 밖으로 나갔을 때, 셀리나 왕자비를 죽인 마법사와 제라니아가 마주쳤다는 보고를 듣고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다행히 무사했다지만 마법사를 놓쳤다는 사실이 그물에 걸린 돌처럼 찝찝함을 남겼다.

    아렌타에서 있었던 일을 들었을 때도 이만큼 동요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자각했다. 무언가가 확실히 변했음을.

    상상만으로도 막막하고 괴로웠다. 끔찍한 무언가를 목도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갈팡질팡하는 자신의 속내를 능숙히 숨기며 그는 쓸쓸하게 말했다.

    “이래서 사랑 같은 거, 하지 않으려고 한 거였는데.”

    직접적인 말에 제라니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를 사랑하신다고요?”

    이미 방금 전에 고백 비슷한 말을 들어놓고도, 유난히 깜짝 놀라는 얼굴이 귀여워 프란츠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버려 두었다.

    “어떻게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실 사랑이라는 말로 정의하기에는 더없이 음습한 집착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보통 좋아하는 것이 생기면 밖에 자랑하거나, 보석함에 담아 자기 혼자만 보려 한다는데 누가 봐도 자신은 후자였다.

    내보이기 싫었고 혼자만 보고 싶었다. 제라니아가 자신 말고 다른 사람에게 다정한 것도 싫었다. 제라니아는 자신이 농담을 한 줄 아는 것 같은데, 유감스럽게도 딱히 농담으로 한 말은 없었다.

    문득 허탈해졌다. 과한 집착에 아내를 가두다시피 하는 남자들에 대한 사례는 종종 들어왔으나, 설마 자신이 그런 이들과 비슷한 부류일 줄이야. 물론 충동이 인다지만 정말로 실행에 옮길 생각은 없었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내가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꿈을 꾸는 게 아니라, 현실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너무 고통스럽다고, 거기까지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분명 행복한데도 그만큼이나 괴롭다니, 이 무슨 모순이란 말인가. 이해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점점 익숙해지실 거예요.”

    “…….”

    “사람이 언제까지고, 꿈만 꾸고 있을 순 없잖아요.”

    자, 이쪽으로 와요.

    부드럽게 웃으며 제라니아가 손을 내밀자, 커다란 손이 그 위를 덮었다. 천천히 카펫을 벗어나 홀의 정중앙에 섰다. 자세를 잡는 제라니아에게 프란츠가 물었다.

    “춤이라도 한 곡 추자는 겁니까?”

    “파티장도 아니고, 음악도 없지만요.”

    싫냐고 묻는 제라니아에게 프란츠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예고 없이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창밖에서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쏴아아- 비가 쏟아졌다.

    장막처럼 내리는 빗소리를 장단 삼아 움직였다. 결혼 전, 파티에서 같이 추었던 춤이었다. 추다 보니 기억이 나는지 제라니아는 조금 더 자신 있게 몸을 움직였다. 빙글빙글 홀을 도는 움직임을 따라 드레스 자락이 넓게 퍼졌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만면에 미소가 가득한 제라니아의 얼굴을 푸른 시선이 집요하게 훑었다. 허리를 잡은 손에 살며시 힘이 들어갔다.

    당신도 나를 사랑하냐고, 그렇게 묻고 싶은 마음을 프란츠는 조용히 거두어들였다.

    많은 걸 바라지 않기로 하지 않았던가. 제라니아는 괜찮다고 했지만, 과연 제 속내를 전부 알고서도 도망가지 않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원하는 게 있으면 무엇이든 말하라 했지만, 원만한 관계 유지를 위해서라도 비밀로 남겨야 하는 게 있었다.

    이대로도 괜찮았다. 제라니아의 말대로 그들은 이미 결혼한 사이고, 그 무엇도 자신들을 갈라놓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런 게 있다 해도, 무슨 수를 써서든 배제할 것이다.

    프란츠의 눈이 서늘하게 빛나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제라니아는 프란츠를 올려다보며 웃어 보였다.

    아무도 없는 둘만의 연회장에서, 그들은 계속 춤을 추었다. 지나가는 손님처럼 방문했던 소낙비의 장막이 걷히고, 다시금 해가 보일 때까지.

    * * *

    주변이 어두웠다.

    푹신한 침대에 앉아 눈을 깜빡였다.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암흑에 눈이 적응했을 무렵, 제 얼굴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느껴졌다.

    부드럽게 뺨을 쓸어내리던 손가락이 천천히 목을 타고 뒤통수 쪽으로 움직였다. 묶여 있던 머리카락이 풀려 흘러내리는 감각이 목덜미에 달라붙었다.

    사락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머리장식을 풀어 내린 손이 제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들어가더니 가볍게 쓸어내렸다. 말캉한 감촉이 제 입술에 닿는 것과 동시에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 같았다. 맞잡은 손은 평소보다 조금 더 뜨거웠고, 내려다보는 눈빛은 다정하다. 어둠 속에서 보아서일까, 유난히 깊어 보이는 눈을 마주하다가 그를 꼭 끌어안았다.

    나를 붙잡으려는 듯 절박해지는 손길과 조금은 거칠어지는 숨소리. 당신의 눈가가 불그스름했다. 감정을 마음껏 토해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물기 없는 눈가는 끝내 무표정할 뿐이다.

    당신은 그저 울지 못하는 것뿐이라는 걸 언제쯤 깨달아줄까. 그저 참아내기만 하는 것에 너무나도 익숙한 당신이 가여우면서도 목 끝까지 울컥 치미는 감정이 있다. 복잡하게 엉켜들어 그 가닥을 쉬이 짐작할 수 없는 감정이.

    나는 슬픈 걸까.

    왜 당신을 보면 이런 기분을 느끼고 마는 걸까.

    영문 모를 감정을 뒤로한 채 당신의 눈가를 조심히 쓸어내리자, 당신이 그 손을 잡아 손바닥에 입을 맞춘다. 입술이 맞닿은 피부에서부터 느껴지는 간질거리는 기분이 전신에 퍼졌다. 나지막이 웃음을 흩뿌렸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확신할 수 있었다. 당신이 진실로 나를 소중히 대하고 있노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눈빛으로, 나를 만질 리 없으니까.

    그러니까 괜찮았다. 닿아 있는 온기는 삶의 표상. 당신은 무사히 살아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그럴 수 있도록 힘낼 테니까. 당신도, 나도.

    모든 것이 끝난 뒤, 안심했는지 긴장이 풀어진 몸을 추슬렀다. 그가 내준 팔을 베개 삼자 낮고 부드럽게 속삭이는 음성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긴장한 것처럼 어딘지 딱딱한 느낌이 묻어났지만 눈치채지 못했다.

    잠들어도 됩니다. 곁에 있을 테니까.

    그렇게 자장가와도 닮은 그 목소리에 안심하며, 조용히 잠이 들었다.

    ( 1부완결. 2부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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