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112화 (113/171)
  • 제112화. 과거로부터의 장례식 (4)

    “그게 무슨 소리예요?”

    미쳤냐고 묻는 듯한 시선에도 프란츠는 태연하게 말했다.

    “난 절대 그 누구에게도 죽어줄 생각이 없습니다. 당신을 제외하고는.”

    살아남겠다는 약속을 지키고자 최선을 다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명제를 부정할 수 있는 건, 당신의 앞이기 때문이리라.

    처음이었다. 어머니보다 누군가를 우선하고 싶은 건. 아마 마지막이 되겠지. 그는 차마 뱉어내지 못한 말을 꿀꺽 삼켰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하는 프란츠의 눈이 깊고 어두웠다. 그가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순간 제라니아는 말문이 막혔다.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말했다.

    “전하께서는, 죽고 싶으신 건가요.”

    프란츠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에 제라니아는 목 안쪽이 꽉 막힌 것처럼 갑갑해졌다.

    천 년과도 같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는 무겁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죽고 싶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살고 싶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피부가 하얀 탓인지, 홀이 어두운 탓인지 그의 얼굴이 무척 피로해 보였다. 당장이라도 잠들고 싶은 것처럼 초췌한 낯빛이 남자를 한층 더 처연하게 보이게 했다.

    “당신 손에 죽는다면, 그래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뒤는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유언장을 이미 맡겨 두었으니까. 이렌스가 알아서 할 겁니다.”

    제라니아는 이렌스도 그 유언장의 내용을 모르고 있으리라 직감했다. 그 성격에 그런 걸 순순히 받아 들 리가 없었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들으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래도 확신했다. 그는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한 거라는 걸.

    “내가 당신을 죽이고 싶어 할 리가 없잖아요.”

    “나 같은 인간이 왕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겠지요.”

    프란츠는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라고 반박하려던 순간, 그가 선수를 쳤다.

    “나와 같이 있으면 욕심이 생긴다지 않았습니까. 당신이라면, 할 수 있습니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설마, 그 말이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

    “당신이 평생 추구했던 길이잖아요. 그걸 그렇게 내버리겠다고요?”

    “내버리는 게 아니라, 맡기는 겁니다. 믿을 만한 사람한테.”

    확신이 깃든 차분한 음성에 숨이 턱 막혔다. 믿는다는 그 한 마디가 폐부를 강하게 짓눌렀다.

    프란츠는 나를 믿는다. 그가 원하는 복수를 내가 대신 이루어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죽음으로 던질 수 있다.

    그가 하는 말을 반박해야 하는데, 부정할 수 없었다. 맥락만을 본다면 틀린 말이 하나 없었다. 나 역시 무력이 아닌 지혜가 우선되고, 모두에게 그래도 조금이나마 공평하게 기회가 돌아가는 세상이 오길 바랐으니까.

    하지만 그가 없는 세상을 바랐던가?

    그걸 위해 당신을 희생해야 하나? 정말로?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모든 게 준비되었다 싶으면 그는 기꺼이 모든 것을 뒤로한 채 눈을 감을 것 같았다. 강렬한 거부감에 제라니아는 몸서리쳤다.

    싫어!

    일렁이는 녹색 눈동자가 프란츠를 지그시 응시했다. 무어라 말하려는 듯 달싹거리던 입술이 아교로 붙인 듯 딱 다물렸다.

    그렇지만 어떻게? 무슨 수로 그를 설득할 수 있지.

    프란츠와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는 그 시절에서 조금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인형같이 아름다운 얼굴, 죽은 나무처럼 생기 없는 눈동자.

    그래도 지금처럼 벽을 보고 대화하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풀어낼 수 없는 난제를 목도한 기분이 이럴까.

    어릴 때는 그냥 돌아섰다. 그게 옳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나는 그 아이를 잘 몰랐으니까. 아이가 바라지 않는다면 참견하지 않는 게 맞다 여겼다.

    나에 대한 거라면 몰라도, 남의 문제에는 고집을 부리지 않으려 애썼다. 다른 사람과 나는 다르니까. 나 자신이 세상이 요구하는 나의 역할을 싫다고 거부하는 만큼, 내가 타인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왜 지금 이렇게도 당신을 말리고 싶을까. 그러지 말라고 애원하고 싶을까.

    친한 이들의 죽음을 건너왔다. 무척 슬펐지만, 울지 않기 위해 애썼다. 괴로워하고만 있기에는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뜨끈한 감촉과 함께 시야가 흐려졌다. 눈을 깜빡거리자 후드득,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목을 타고 올라오는 슬픔을 삭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또박또박, 말을 뱉어냈다.

    “왜 자꾸, 그런 말을 하는 건가요.”

    방울방울 떨어지던 눈물이 검집을 타고 흘러가 바닥을 까맣게 물들였다. 옅은 푸른색 눈동자가 놀란 듯 동공을 열었다. 당황한 듯이 일그러지는 프란츠의 얼굴을 직시하며, 제라니아는 양손으로 검을 꽈악 움켜쥐었다.

    “프란츠, 나는 당신의 심정을 전부 이해하지는 못해요. 사람이 어떻게 자신 아닌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어요.”

    어떻게 당신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서로 정말이지 다른 인생을 살아왔는데. 우리는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고, 분명 이해할 수 없는 간극이 존재했다.

    그렇지만, 그런 자신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혼자서만 모든 걸 감당하려고 하는 거예요.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잖아요.”

    당신이 지고 있을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다. 그저 순전한 마음으로.

    “분명, 곁에 있겠다고 했잖아요. 나는 진심이었어요.”

    당신을 만나고 나서야, 나는 내가 결핍된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 그런 나를 부정하지 않는 당신이 신기했다. 그러면서도 혼자 있으려는 당신이, 가끔씩 내보이는 눈을 떼면 금방이라도 스러질 것 같은 모습이 눈에 밟혔다.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나한테 이상적인 파트너라고 그랬으면서. 그렇게 말해놓고 나를 혼자 내버려둘 셈이에요? 당신은 그래도 정말 괜찮은 건가요?”

    “…….”

    프란츠는 대답하지 못했다. 눈에 띄게 흔들리는 눈빛을 본 제라니아는 조금 더 밀어붙였다.

    “당신이 그랬잖아요. 사람이 모든 걸 혼자 해낼 수는 없다고. 나나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도울 수 있어요.”

    “…….”

    “힘든 일이 있으면 지금처럼 털어놓으면 돼요. 쌓아두기만 하면 병이 날 뿐이에요. 당신은 이런 말을 괜히 꺼냈다고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니에요.”

    챙그랑, 힘이 풀린 제라니아의 손에서 검이 대리석 바닥에 깔린 카펫 위로 떨어져 나직하게 소리를 냈다.

    “죽겠다는 소리 같은 거, 다신 하지 마세요.”

    단호한 음색으로 말하며 제라니아는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움찔, 어깨를 떠는 프란츠와 마주한 그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프란츠의 손을 붙잡았다.

    셀리나를 떠올렸다. 필요할 때 제대로 손을 뻗어 붙들어주지 못한 친구를. 후회처럼 남은 미련의 조각을 기억해냈다.

    타인의 인생에 간섭하고자 한다면, 그 삶에 발을 걸칠 각오가 있어야 했다. 나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이기적인 소리라는 건 알지만, 절 위해서 노력해 주세요. 어느 순간 어느 때, 죽고 싶은 순간이 오더라도, 절 위해서 살아주세요.”

    그렇더라도 욕심을 부려보기로 했다. 같은 실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아. 그런데도 손이 떨렸다. 두려움을 꾹 참고 웃어보려 했지만 눈물이 멎지 않았다.

    “그 정도는…. 계약이 아니라도 부탁할 수 있잖아요. 저는 당신이…. 죽는 걸 바라지 않아요. 프란츠.”

    죽는다는 말을 내뱉을 때, 제라니아는 열기가 목을 꽉 누르는 감각을 느꼈다. 가까운 누군가가 죽는 걸 달가워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마는, 이토록 강렬하게 사람의 죽음이 상상되는 건 처음이었다.

    죽은 사람을 대면하는 만큼이나 살아 있는 당신을 목도하는 것이 버거웠다. 이토록 꽉 붙잡고 있는데도, 물거품처럼 제 눈앞에서 사라질 것만 같았다.

    프란츠는 머뭇거리다, 붙잡히지 않은 손을 들었다. 제라니아의 눈가를 문지르는 길고 곧은 손가락에 물기가 묻어났다.

    “울지 마십시오.”

    “…….”

    “…왜 우는 겁니까. 고작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프란츠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의아한 시선을 했다. 얼굴을 닦아준 뒤, 가볍게 작은 어깨를 끌어당긴 그가 제라니아를 품에 안았다. 그가 입고 있는 의복의 부드러운 천이 얼굴에 닿았다.

    가만히 서 있던 제라니아가 두 손을 뻗어 그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눈가에 닿은 비단이 축축이 젖어들었다. 그 상태로 말이 없는 제라니아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프란츠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당신을 보고 있으면 참 신기합니다.”

    “…어떤 점이요?”

    “내가 이토록 감정적인 인간일 수 있다는 것이.”

    제라니아는 그를 올려다보려 했으나, 단단한 손이 그의 뒤통수를 붙잡아 고정했다. 보지 말라는 듯이.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

    “나는 살면서 당신같이 강렬하게 내 시선을 끌어당기는 상대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웃기게도, 당신이 옆에 있으면 마치 내가 평범한 인간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당신은 내 본질을 알면서도 화를 내지 않습니다. 언제나 나를 먼저 이해하려 하죠. 인간이 다른 인간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음에도, 당신은 내게 언제나 한결같았습니다. 내게 화가 났던 그 순간에조차.”

    덤덤한 목소리가 고해하듯 말을 쥐어짰다. 차분한 음성이 깃털처럼 귓가에 내려앉았다.

    “그래서 당신이 아까워졌습니다.”

    나같이 껍데기만 남은 인간에겐 과분하다 여겼다. 다음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혼을 해서 다행이라고.

    그러면, 어쨌거나 당신은 나를 떠나지 못할 테니까. 나를 두고 다른 이들에게 눈을 돌릴지언정 그 자리에 머무를 테니까.

    당신과 함께 있으면 괴로웠다. 잊었다고 느꼈던 감정들이 자꾸만 의식을 헤집고 나와 심장을 쥐어짜는 것 같았다. 자신을 버린 주인에게 항의하듯이.

    그런데도 곁에 두고 싶었다. 아니, 그러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만큼 당신이 탐이 납니다. 당신이 그 눈에 나 말고 다른 이를 담는 게 싫을 정도로.”

    마냥 순수한 감정만을 가진 건 아니었다. 아무 데도 가지 못하게 붙들고, 누구도 그를 보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이런 제 눈에조차 아름다운 게 남들 눈에 아름답지 않을 리 없었다.

    죽음을 바라보기만 하는 자신과 달리 삶을 찬미하는 제라니아의 모습은 사랑스러웠다.

    사랑스럽다라, 속으로 조소했다.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어리석기 짝이 없는 자야.

    프란츠는 허탈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속에서 피어난 감정들이 그의 얼굴을 마구 휘저었다. 제라니아를 더욱 힘주어 껴안으며 고개를 숙여, 비밀을 고하듯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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