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111화 (112/171)

제111화. 과거로부터의 장례식 (3)

왕좌에서 일어난 프란츠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뚜벅뚜벅, 울리는 발소리와 어전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엉켜들었다.

계단을 다 내려온 프란츠와 딱 다섯 걸음 정도를 사이에 두고 제라니아는 멈춰 섰다. 둘은 서로를 지그시 마주 보았다. 침묵이 기이하게 얽혀갔다.

“여기까지 어쩐 일입니까.”

웃는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건네는 프란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라니아가 결연한 태도로 말했다.

“전하.”

“제라니아.”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거예요?”

프란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으나 제라니아는 속지 않았다.

“너무 많아서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시치미 떼지 말아요. 그렇게 계속, 나한테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셈인가요?”

“…….”

“아니면, 내가 그렇게 믿음직하지 못한 건가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조용히 듣고 있던 프란츠는 다음 순간, 표정이 굳었다.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으려고 한 이유를 제대로 말하지 않은 거죠.”

“…그냥 가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거짓말. 왕비님 때문이잖아요.”

누구를 말하는지는 바로 알았다. 입을 다무는 프란츠에게 제라니아는 차근히 제 추측을 늘어놓았다.

“왕위에 집착한 이유에 왕비님이 있는 거죠. 왕위가 도구라고 한 것도 그래서고.”

“그렇게 간단한 건 아닙니다.”

“그럼 제발 설명을 해줘요.”

나지막한 어투로 제게 호소하는 제라니아를 프란츠는 냉정하게 응시했다.

“기다리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그런 눈을 하지 않았더라면 계속 기다렸을 거예요.”

“내가 무슨 눈을 하고 있길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 가지는 것 같은 눈이요.”

프란츠도 놀랐고, 제라니아도 놀랐다. 입 밖으로 내고서도 제가 이런 말을 했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것처럼 제라니아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명료하게 말하던 평소와 달리 더듬거리는 음성이 프란츠에게 천벌처럼 내리꽂혔다.

“텅 비었고, 아무것도 남지 않아서, 그 허망함을 이기지 못해 짓눌리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눈.

마지막 말을 내뱉는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그러나 그 위력은 강력했다. 파삭, 가면이 완전히 부서지는 소리가 프란츠의 귀에 메아리쳤다.

프란츠는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이마에서부터 천천히 쓸어내리는 손가락 사이로 웃음기가 가신 무표정이 드러났다.

차갑다고 느껴질 만큼 새파란 눈동자를 마주하고도, 겁먹은 기색 하나 없는 제라니아를 보며 프란츠는 허탈하게 웃었다.

“역시 당신은 속일 수가 없군요.”

끝까지 모르길 바랐는데.

적어도 당신에게만은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계속 숨길 수도 없었다. 어쨌거나 제라니아는 자신에게 휘말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책임을 져야만 했다.

그는 한 번도, 남에게 털어놓은 적 없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게는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마치 동화를 구연하듯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어머니는 국왕을 무척 사랑했습니다. 비록 정략으로 만난 것일지라도, 어쨌거나 왕국 사람이라면 대체로 강한 자에게 끌리기 마련이니까요.”

서쪽 국경선을 지키는 리베라 후작가의 자식으로 태어난 만큼, 여인은 아름다우면서도 강인하고 다정했다. 호색한인 국왕조차 끌리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그는 분명 여자를 밝혔지만, 나름대로 정치적인 관계성을 고려해 상대를 골랐다. 여인은 분명 올곧고 선량했으나 왕비가 되기에는 여러모로 배경이 불안했다. 그걸 알면서도 결혼을 강행한 것은 순전히 국왕의 의지였다.

왕비가 된 여인은 곧 다음 대 국왕이 될 튼튼한 남자아이를 출산했고, 그게 바로 프란츠 자신이었다.

“물론, 행복한 시간은 그리 오래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터졌으니까.

카르멘 왕국과의 전쟁은 무려 4년이라는 시간을 소모했다. 국왕의 총애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뒷배가 없는 왕비가 말라 죽기까지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 와중에 어린 자식까지 지켜야 했으니 오죽할까.

왕비가 기어코 독에 중독되어 세상을 떠났을 때, 곁을 지킨 이는 어린 왕자와 유모 단둘뿐이었다. 아이는 죽은 어머니의 곁에서 계속, 계속 아버지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국왕은 장례식에조차 오지 않았습니다. 전쟁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요. 두 달 뒤에야 승전하며 위풍당당하게 들어와서는, 그제야 내 어머니의 무덤에 가더군요.”

프란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사람들은 그를 칭송했습니다. 전쟁에 승리해, 영토를 넓히고 국가의 명예를 드높였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아내를 방치해서 죽게 만들었다 한들, 무덤 앞에서 슬퍼하는 시늉만 좀 하면 오히려 동정을 받습니다.”

“…….”

“세상은, 그렇게도 불합리합니다.”

강렬하게 빛나는 새파란 눈동자에 온갖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늘 무심하고 정적이라 생각했던 그에게서 이토록 선명한 날것의 감정을 엿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 눈에 담긴 건 원한이었다. 그 끝이 어디일지 모르는 아주 깊은 감정의 구덩이가 그의 얼굴에 뻥 뚫려 있었다.

“그때 맹세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인간에게서 모든 걸 빼앗아 주겠다고.”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홀의 공기를 휘저었다.

“그가 자랑스럽게 여기던 모든 것들을 역사의 구석으로 치워 버리겠다고. 결투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야만적이고,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책을 읽는 것을 더 위대하다 여기며, 모든 역사책이 후대의 그를 폭군이었다 평할 만한 나라를 만들 것이고.”

점점 높아지는 언성에 그는 잠시 멈춰 호흡을 정돈했다. 또박또박 내뱉는 단어들이 정갈하게 나열되었다.

“그 모든 광경을 살아서 똑똑히 지켜보며 괴로워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말이죠.”

한 인간의 존재 의의를 말살하겠다 선언하는 그의 처절한 증오에 제라니아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무미건조해 보이는 당신의 어디에, 저토록 커다란 감정이 숨어 있던 걸까.

“국왕이 그러더군요. 자기를 내 손으로 끝장내고 싶어 할 테니 다른 사람 손에 내가 죽게 내버려둘 리 없다고.”

피식 웃음을 흘리는 그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맞는 말입니다. 내가 자길 죽이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는 게 우습기는 했지만.”

여전히 말이 없는 제라니아를 보며 그는 거침없이 지껄였다.

“쿠데타를 선택했다면 왕위를 얻는 건 한층 쉬웠을 겁니다.”

“…….”

“그러나 내가 바라는 게 그자의 온전한 절망인 만큼, 그렇게 쉽게 죽여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건 너무 값싸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그게, 그자가 사용하던 방식과 다를 게 무엇이겠습니까.”

“…….”

“나는 그자에게서, 그 무엇 하나 물려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왕위를 제외하고는.”

이 나라를 바꾸겠다고, 그렇게 말하던 남자의 말이 전부 이해되었다. 핀을 구하고자 했을 때 왜 그가 제게 설득되었는지, 왜 제가 하는 말에 대체로 수긍하던 건지도.

프란츠가 말하는 나라는 제가 원하는 이상과 합치했다. 그가 자신을 선택한 건 아마도 그래서.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이런 식의 끝을 생각한 적이 없어서 그런 건지도.”

국왕은 그렇게 가서는 안 됐다.

번개 같은 깨달음이 제라니아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제야 제라니아는 국왕의 죽음이 돌이킬 수 없는 분기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국왕은 죽어서는 안 되었다. 프란츠는 그 순간, 모든 걸 잃어버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평생을 걸고 복수하고자 했던 대상이 허무하게 사라져버린 거니까.

자신은 지금, 프란츠의 가장 밑바닥에 남겨둔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어떤 무엇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은 공허를. 직면하는 것만으로도 막막해지는 어둠을.

“제라니아. 나는 사랑을 믿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연약하게 만드니까. 내 어머니를 죽인 것처럼 말입니다.”

제가 아는 사랑은 아프고 괴로운 것밖에 없었다. 아버지란 인간을 원망하지도 못하는 어머니를 보며 계속 그런 생각을 했다. 저런 게 사랑이라면 하고 싶지 않다고.

사실 그래서,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랬다면 제가 먹어야만 하는 독을 대신 먹어 가면서까지 나를 보호하려 들지는 않았을 테니.

아플 때마다 자신의 이마를 쓸어주는 따뜻한 손을, 다정하게 자신을 안아주는 품을, 부드럽게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전부 포기해야 한다고 할지라도.

“날 감싸지 않았다면 조금 더 오래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어머니는 나를 보호하고자 최선을 다했죠. 어머니는 내게 살아남으라는 유지를 남겼고, 나는 그것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니 남의 손에 죽어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자신은 어머니의 몫을 대신 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말이란 쉬이 내뱉어서는 안 되며,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배웠다. 그러니 지켜야만 했다.

“…약한 것은 너무 빨리 죽습니다. 나는 오래 살아야 했고, 그런 내게 감정은 불필요했습니다.”

가신들은 조금 더 몸을 아끼라고 했지만 자신은 생각이 조금 달랐다. 어쨌거나, 죽지만 않으면 되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살아남으라고 했지 제 몸을 아끼라 한 적은 없었다.

아무리 계승권이 제일 높다 한들, 제 가문은 정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계속 살아남으면서 맨바닥에서부터 세력을 쌓아 올려야 하는 만큼 몸을 사릴 여유를 가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마음을 비우는 법을 가장 먼저 익혔다. 더러운 소리를 귀에 담고도 웃을 수 있어야 했으니까. 대가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나’를 버렸다.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서.

“그러니 내 인생은 앞으로도 계속 이럴 거라고,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새파랗던 눈동자가 살며시 옅어지고, 조금이나마 온기가 깃들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제라니아는 프란츠의 말에 깜짝 놀랐다.

“당신이 나타났습니다.”

“저요?”

프란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더없이 파격적인 소리를 입에 담았다.

“당신이라면 분명, 나보다 좋은 왕이 되겠지요.”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제라니아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프란츠를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적어도, 내 아버지라는 인간과는 다른 왕이 될 거라는 걸 압니다.”

“…여인은 왕이 될 수 없잖아요.”

설령 제1계승권자가 여성이라 할지라도 그의 남편이 왕이 되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심지어 자신은 그의 아내였지 왕족의 피가 흐르지는 않았다. 불가능한 이야기를 왜 꺼내는 걸까.

“선례가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당신이 내 아이를 가지게 되고, 내가 유언을 남기면 혼란스럽더라도 어떻게든 되겠죠. 계승권은 내 아이에게 우선될 테니.”

그걸 위해, 반발할 만한 놈들은 미리 다 죽여버릴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현명한 당신이라면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쥘 테니까요. 아마 몇 년 안에 그렇게 될 겁니다.”

자신 있게 말하면서 프란츠는 제라니아의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그러고는 허리춤에서 검을 풀어 건넸다. 묵직한 검을 저도 모르게 받아든 제라니아가 눈을 깜빡였다.

“왜 이런 걸 제게….”

“나는 결함이 있는 인간입니다. 아무리 노력하려 한들,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과 느끼지 못하는 감정은 존재합니다. 당신이 보고 느끼는 것들에 공감해주고 싶어도 그러지 못합니다.”

그 말을 하는 프란츠는 무표정했지만, 어쩐지 우울해 보였다. 그게 놀라웠다. 늘 무미건조하던 목소리에 감정이 선명하게 깃들어 있었다.

“그러니, 오히려 역사에는 내가 폭군으로 남을 수도 있겠죠. 솔직히 상관없습니다. 그런 것에 연연한 적은 없으니까.”

어깨를 으쓱이는 프란츠를 제라니아는 홀린 듯이 응시했다. 그가 정말로 인간적으로 보여서. 늘 잔잔한 수면 같던 그에게서 감정의 진폭을 이토록 강하게 느꼈던 적이 있었던가.

“그렇지만 당신은 그걸 원하지 않겠죠. 그러니, 당신이 보기에 내가 이 자리에 마땅하지 않다 느낀다면….”

하지만 프란츠가 말을 이은 순간, 제라니아의 표정은 싸하게 굳었다.

“날 죽이고, 왕이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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