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110화 (111/171)
  • 제110화. 과거로부터의 장례식 (2)

    끝내 비는 오지 않을 작정인 것 같았다.

    하늘도 참 무심하시군. 감흥 없이 중얼거린 프란츠의 손가락이 왕좌의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비가 왔다면 제 어머니 때처럼 텅 비어 있는 장례식장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긴, 비가 온다면 그것대로 신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거라 해석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건 곤란했다. 온 나라가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지금의 분위기만 생각하더라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제라니아는 괜찮을까. 원래는 제 일이었을 문제를 떠넘긴 것 같아 미안했다. 하지만 도무지 참석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국왕의 장례식을 상상해본 적이 없는 건 아니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으니까. 그러나 상상 속에서도 그 자리에 자신은 없었다. 국왕이라고 제가 참석하리란 기대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제게 왕세자 자리를 준 게 가장 우스웠다.

    계승권이 제일 높은 게 자신이라지만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다. 국왕이 여색에 약하고 미인을 좋아하는 만큼, 총애하는 이의 치맛바람에 넘어가 후계자를 정할지 모른다는 가능성은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다고 무언가 달라지는 것은 아닌데. 물론 순순히 넘기지 않았다면 피를 더 보았겠지만.

    원래는 왕위를 계승하자마자 후환이 될 만한 놈들은 다 없애리라 생각했었다. 그러지 않은 것은 자신 역시 변했기 때문일까. 그 이유가 무엇일지는 바로 알았다.

    제라니아는 신기한 이였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안녕하세요, 제라니아 바이첸입니다.’

    첫인상은 평범하다, 였다.

    척 보기에도 존재감이 강한 여자는 아니었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티엘라 바이첸보다는 아버지인 공작을 더 닮은 생김새였다.

    단정한 얼굴이었지만 사교계에 이보다 뛰어난 미인은 얼마든지 있었다. 자매들에 비해 눈에 띄지 못한 이유는 그래서일 것이다.

    외견적인 감상은 그랬지만, 그것만이었다면 눈앞의 상대가 흥미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을 파악하는 것에 익숙한 만큼 바로 알 수 있었다. 얼굴은 평범했지만 눈은 아니었다.

    온화한 녹색 눈. 풍부한 감정을 담아 반짝거리는 눈동자는 무척이나 깊어, 제 모든 거짓을 간파하는 것 같았다. 초식동물과 같이 무방비해 보이는데, 그만큼이나 사람을 무장 해제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대화를 할 때도 비슷했다. 필요 이상의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상대를 배려하는 태도가 몸짓이나 화술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유형은 대개 세 갈래였다. 적대하거나, 호의를 내비치거나, 그도 아니면 무관심하게 일관하거나. 여인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다정한 태도였지만 시선은 담백했고, 거리낌 없이 대하는 듯하다가도 눈치가 빨랐다.

    사람을 대할 때는 늘 웃어왔다. 하물며 상대는 바이첸 공작가의 직계다. 잘 보이지는 않을지언정 흠을 잡혀서는 안 되는데, 굳이 피곤하게 웃지 않더라도 눈앞의 상대는 자신을 책망하지 않을 것 같았다.

    충동이란 말과 거리가 멀다 생각했건만, 이상하게도 웃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사람을 대할 때마다 느끼던, 까끌한 모래로 심장을 벅벅 문대는 것 같은 감각이 사라지고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편했고, 그래서, 대답하기 곤란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물었다.

    ‘내가 어렵지 않습니까?’

    ‘네?’

    어리둥절한 얼굴로 마시려던 찻잔을 내려놓는 여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너무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나. 잠깐 고민하는 사이 제라니아는 입을 열었다.

    ‘어렵지 않냐의 정의를 어떻게 하냐에 달렸겠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서는 어렵지는 않은 것 같아요.’

    의외로운 답이었다. 겉치레라 생각하기에는 눈빛이 진지했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은 뒤 말했다.

    ‘어째서입니까.’

    ‘그거야, 전하께서는 제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시니까요?’

    ‘…….’

    ‘말수가 많지 않으시지만 대답은 확실하게 해주시고, 제가 말이 느려져도 재촉하시는 느낌도 없고, 그렇다고 절 무시하시는 것도 아니고요.’

    내가 그랬던가?

    ‘저를 존중하려는 상대를 어려워할 리 없지요.’

    사람들은 무뚝뚝한 이를 대개 좋아하지 않았다. 과묵함은 정치에 하등 이로울 게 없었다. 적절하게 치고 빠지는 화술과 제 속을 읽히지 않는 표정 관리는 필수였다.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굴어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저런 평가를 내릴 수 있는가.

    기분이 이상했다. 늘 부정하고 있던 무언가를 인정받은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사실, 외람되지만 전하께서 보내신 편지를 받았을 때는 무도한 오해를 했답니다.’

    무슨 오해인지 짐작이 갔다. 프란츠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보통 이런 상황이 맞선에 가깝기는 합니다.’

    ‘예. 말씀하시는 걸 보니까, 정말 제 오해였구나 싶지만요.’

    다행이라는 듯 안도한 얼굴을 보니 맞선을 퇴짜 놓고 있다는 이야기는 사실인 듯했다. 스물넷이면 결혼 적령기가 꽤 지났을 텐데도.

    하긴 딱 보기에도 여인은 결혼에 뜻이 없어 보였다. 장녀인 칼리아 바이첸도 그렇고, 공작이 손수건을 물어뜯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런데 왜 받아들였습니까?’

    ‘그거야…. 제 선입견일 뿐이잖아요. 직접 만나 뵙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은 못하니까요. 만나자고 하셨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자신을 기억해낸 줄 알았다고,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는 제라니아의 생각은 알지 못한 채 프란츠는 잠시 침묵했다.

    ‘그냥, 궁금했습니다.’

    바이첸 공작은 온화해 보이는 외견을 가졌지만 그 속내는 더없이 실리적인 자였다. 아무리 팔불출이라 불린다 한들 그 본질이 교활한 뱀이요, 사나운 매와 같다는 것을 누가 모를까. 그는 천재적인 정치가이자 뛰어난 달변가였다.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남자를 쩔쩔매게 만드는 상대라니, 흥미가 일었다. 염문이 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편지를 보내 만남을 요청한 건 그래서였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성격이라기에 자기주장만 내세울까 싶었지만, 여인은 인내심이 많고 사려 깊은 성정이었다. 무척 총명하고 자기애가 깊은 데다, 주관이 확실하고 그럼에도 모나지 않았다.

    보통 저 정도로 단호하면 말투가 뾰족하다거나 자기주장이 세다는 식으로 눈에 띌 법한데, 그에게는 무엇을 묻든 좋은 말을 해줄 것만 같은 온화한 분위기가 있었다. 조화롭다는 말이 잘 어울렸다.

    혹자는 만만하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본디 가지만 울창한 이보다는 뿌리가 단단한 이일수록 상대하기 어려운 법이다. 바이첸 공작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아닌가.

    정말로 아버지를 많이 닮았군.

    결례인 줄 알면서도 물끄러미 상대를 응시했다. 바이첸 공작은 상대하기 귀찮다는 느낌이 강했는데, 왜 이 사람은 그렇지 않은 걸까.

    ‘그래서, 궁금하신 바가 모두 풀리셨나요.’

    싱긋 웃으며 되묻는 것에 프란츠는 말문이 막혔지만,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그러나 머릿속은 생각할수록 꼬여만 갔다.

    ‘글쎄요.’

    생각을 포기하고, 그는 망연히 중얼거렸다. 애초에 제라니아를 만나기로 한 동기부터가 호기심에서 시작된 탓인지, 쉽사리 결과를 정의할 수가 없었다.

    답답하게 들릴 수 있는 대답에도 제라니아는 사람 좋게 웃었다.

    ‘제 이야기만 들으시느라, 혹여 지루하셨을까 걱정되네요.’

    ‘아니요, 재미있었습니다.’

    프란츠는 냉큼 대답했다. 그래도, 무료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으니 대충 맞을 것이다. 그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하루하루 해야 하는 일들을 수행하는 나날들이었다. 시간이 빨리 간다는 말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소리기도 했다.

    그래서 하인이 알려오는 시간을 듣고 조금 놀랐다. 10분쯤 이야기를 나눈 줄 알았는데, 벌써 한 시간이 지나 있다니.

    질문을 건넨 건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이후에, 다시 편지를 보내도 괜찮겠습니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시 당신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면서도 거절당할 거라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당신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테이블을 짚는 순간, 묘한 감촉에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살짝 땀이 배어나 있는 손바닥을 천천히 그러쥐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참 뻔하군.”

    회상을 마치며 프란츠는 피식 웃었다. 텅 빈 어전을 향하는 그의 눈동자가 상념을 따라 아득히 멀어졌다. 그의 손이 팔걸이를 꽈악 움켜쥐었다.

    처음부터 사랑인 걸 알았다면, 두 번 다시 제라니아를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은 국왕이 아니다. 이런 곳에 사랑하는 사람을 끌어들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청혼했다면 제라니아 역시 받아들였을 리 없다. 권력에 관심이 없고, 복잡한 상황 역시 달가워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당신은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에게 기약 없는 괴로움을 감당하라 할 만큼 잔인한 성격이 아니다. 살다 보면 감정이 생기리라 믿을 만큼 순진하지도 않았다.

    지금의 관계로 만났기에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왜 욕심이 생길까.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복잡한 머릿속을 털어내듯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바늘로 머리를 찌르는 것처럼 지독한 두통이 몰려왔다. 악몽을 꾸었을 때와 같았다.

    아니, 지금 이 순간이 악몽인가.

    어머니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버린 이후로, 줄곧 꿈속을 걷는 것만 같았다. 제법 반짝거렸던 세상의 빛은 점차 퇴색되었고, 둔해지기 시작한 감정들은 점차 흐릿해지며 이윽고 미미한 주장만을 하게 되었다.

    꿈을 꾸고 있으면 아프지 않다. 무섭지도 않다. 홀로 걷고 있어도, 주위에 아무것도 없더라도.

    물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감정은 희박했고, 세상은 무감각했다.

    제라니아와 함께 있으면, 이따금 잠에서 깬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깊이 잠수해 있다가 수면 위로 솟구쳐 숨을 몰아쉬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부정하고 싶었고, 어떻게든 피하려 했다. 그런 주제에 정작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 답답해졌다.

    제라니아는 과오를 인정하는 게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나는, 감정을 인정하는 게 어려웠다. 이미 오래전에 버린 물건을 주워 담는 것처럼 이질적인 감각을 느꼈다.

    계속 갈팡질팡하던 마음은 이번 사건을 거치고서야 확신을 얻었다. 깨끗이 버리기엔 이미 늦었다는 것을.

    프란츠가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였다.

    어전의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분명 제롬한테 아무도 들어오게 하지 말라고 했거늘, 누가 들어오는 것인가.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문을 연 사람이 누군지, 그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어째서 하필 지금, 당신이.

    천천히 시선을 옮기자 불청객의 모습이 드러났다. 작은 체구와 갈색 머리카락, 선명히 빛나는 녹색 눈동자를 본 순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

    “제라니아.”

    광대가 된 기분이었다. 이상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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