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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109화 (110/171)

제109화. 과거로부터의 장례식 (1)

전대 권력자였던 만큼, 켄드릭 리나엔의 장례식은 꽤나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곧 비가 올 것처럼 먹구름이 가득 낀 하늘에도 참석자의 수는 상당했다.

왕궁을 나서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서 있었다. 전쟁 영웅이자 위대한 왕이었던 이의 죽음을 추모하고자 나온 이들이었다.

새까만 옷을 입고, 장례식 행렬을 조용히 따라가며 제라니아는 저 앞에 시선을 고정했다. 시아버지의 장례식인데도 슬프기보다는 기분이 묘했다.

그간 워낙 많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흘 전 대관식을 무사히 마치고 국왕에 즉위하자마자, 프란츠는 곧바로 첫 번째 명령을 내렸다. 대상자는 바로 왕족들이었다.

‘2주의 기간을 줄 터이니, 왕궁을 나갈 준비를 해라. 어느 정도의 지원은 보장해 주겠다.’

왕족들은 곧바로 반발했다. 어전으로 몰려와 우리를 이렇게 대접할 수는 없다는 말을 늘어놓는 이들도 있었다.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들어 가장 앞장서 소리치던 이의 복부를 베었다.

촤악-, 살이 갈라지고 피가 튀는 소리가 유독 선명하게 들렸다. 핏방울이 프란츠의 하얀 뺨에 튀었다. 수려한 얼굴에 꽃잎처럼 찍힌 붉은 피가 도드라졌다.

바닥으로 쓰러지는 이에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생각보다 조금 깊게 베긴 했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을 텐데, 엄살이 대단했다. 기세가 다소 주춤거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프란츠는 나직이 선언했다.

‘제 발로 나갈 기회를 주는데, 뭐가 그리 불만인지 모르겠군. 기회라도 주어지는 것에 감사해야 할 텐데.’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는 사람의 목을 발로 가만가만 건드리며 프란츠는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나무라도 베어낸 것처럼 심드렁한 말투와 무표정한 얼굴, 어둡다 싶을 정도로 새파란 눈동자는 상대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왕족들은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자신들이 알던, 늘 웃는 얼굴로 사람을 대하던 왕세자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말투 역시도 전과는 달랐다. 마치 더 이상은 본성을 숨길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어전의 문은 어느새 닫혀 있었고, 창을 든 병사들이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지금은 잠잠하지만 프란츠의 명령 하나면 곧바로 돌변할 것이다.

강경하게 나가봐야 피만 볼 뿐이었다. 재빨리 노선을 바꿔, 이러는 이유가 뭐냐고 호소하는 이들에게 그는 말했다.

‘오히려 늦은 편이지.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들이 이렇게 많은데 말이야.’

신랄한 평에 몇몇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모욕적인 언사에 바들바들 떨면서도 한 마디도 쉬이 꺼내지 못하는 이들을 조용히 쳐다보던 프란츠가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절도 있게 명령을 받든 병사들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를 포함해 왕족들을 질질 끌고 나갔다. 무엄하다고 소리치는 것도 소용없었다.

검을 다시 검집에 꽂아 넣는 프란츠의 신발이 대리석 바닥 위로 선명하게 남은 핏자국을 가만히 짓이겼다.

“괜찮으십니까.”

제라니아의 뒤에서 걷고 있던 리암이 나직이 속삭였다. 생각에 잠긴 탓에 걸음이 다소 느려졌던 모양이었다. 제라니아는 괜찮다고 말하고 비어 있는 옆을 힐끔 쳐다보았다.

왕비는 이전의 사건으로 인해 거처에 억류되어 있었고, 프란츠는 불참했다. 고로 이 장례식을 이끄는 건 제라니아 혼자였다.

독에 당했던 만큼 아직 거동하기 힘들다는 대외적 핑계를 대고 있지만, 제라니아를 비롯해 그의 가신들은 그 말이 거짓이라는 걸 잘 알았다.

당장 프란츠는 국장 자체를 내키지 않아 했다. 규모를 최대한 축소하고 싶어 했지만, 전하의 권위에 해가 된다는 이렌스의 진언에 결국 타협했다.

단, 참석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말하는 주군의 강경함에 이렌스는 골머리를 앓았지만 제라니아는 그를 설득했다. 자신이 어떻게든 하면 되니 염려하지 말라고.

실제로 프란츠의 건강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건 사실이었고, 이 정도는 자신이 소화할 수 있었다. 프란츠가 고집을 부리는 일은 잘 없는 만큼 들어줄 수 있다면 들어주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의아했다. 프란츠가 국왕에게 살갑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나름대로 잘 지내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유가 뭔지 물어보자 그는 끈질기게 말을 돌렸다.

원래도 표정이 다채로운 편은 아니었지만 그때의 프란츠는 기묘했다. 무사히 대관을 거쳐 왕이 되었음에도 어째서 조금도 기쁜 기색이 없는 걸까. 오히려, 눈빛만 보면 평생 추구했던 무언가를 잃어버려 허망해진 사람처럼 보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서자 모여 있던 귀족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하나하나 인사를 건네며 예식을 지켜보았다.

예식의 끝에, 꽃을 들고 맨 처음으로 관에 누워 있는 국왕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국왕은 평온히 눈을 감고 있었다. 목 아래로는 천을 덮고 있어 얼굴만이 드러났는데, 예법도 그렇지만 동상에 깔려 숨진 터라 형체를 알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짓이겨진 등 아래를 감추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 동상은 여전히 복구 중이었다. 신의 분노라느니 떠드는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과정이었다. 동상이 무너진 것은 마법사의 술수였다고 공표했으나 한 번 불붙은 여론은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다.

종교의 영향력을 다시금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관이 닫힌 뒤 무덤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그 후에는 접대의 연속이었다. 제게 말을 거는 사람은 끝이 없었고, 대체로 소홀히 대할 수 없는 이들뿐이었다. 제 어깨에 얹어진 왕비라는 직책의 무게를 새삼 실감하며 제라니아는 최선을 다했다.

겨우 한숨 돌리고 있을 때, 제 앞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본 제라니아의 얼굴에 살짝 화색이 돌았다.

“오셨나요.”

제라니아의 어머니인 티엘라 바이첸이 그를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장식도 없이 밋밋하고 새까만 드레스를 입었을 뿐인데도 여인은 무척 우아했다. 과연 젊었을 적,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미인이라 불렸던 이다웠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이쯤이야 괜찮아요.”

손사래를 치는 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티엘라가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이 끼었지만 다행히도 아직은 비가 오지 않았다. 그랬으면 행사가 지연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행히도 오늘은 비가 오지 않네요.”

제가 하고 있던 생각이 티엘라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에 제라니아는 조금 놀랐다. 그 미묘한 뉘앙스에도.

“오늘은, 이라뇨?”

“왕비 마마의 장례식에는 비가 왔었거든요.”

“비가…. 왔었다고요?”

“예, 그래서 사람이 별로 없었답니다. 전쟁 중이기도 했고…. 덕분에 왕자, 아니 국왕 폐하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지요. 그 어린 몸으로 비에 쫄딱 맞고 계시는 게 어찌나 안쓰럽던지.”

프란츠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제라니아는 티엘라의 팔을 붙잡았다. 의아한 듯 고개를 돌린 티엘라는 살짝 커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딸의 얼굴을 직시했다.

애써 침착하려 애썼지만, 제라니아도 알았다. 지금 자신이 더없이 동요하고 있음을.

장례식에 오기 싫어하던 모습과 제게 내보이던 묘한 얼굴, 그간 느껴왔던 위화감들이 한데 엉켜 서서히 알아볼 수 있는 형체로 둔갑해갔다.

‘…집착하는 게 없다니. 세상에 그런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게 무엇이기에….’

‘말할 수 없습니다. 분명 내게 실망할 테니까요.’

계속 생각했다. 그는 왜 왕이 되려 하는 걸까.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이런 가시밭길을 걸어온 걸까.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소리가 너무 커서 어머니의 귀에 들릴까 우려될 정도로.

“그 이야기 좀,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비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전대 왕비 마마가 살아 계실 때는 궁의 상황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요.’ 타닥타닥, 복도를 경보하는 발소리가 울렸다. 늘 차분하던 평소의 걸음걸이와 달리 다급하게 움직이며 제라니아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시비 하나 데리고 있지 않은 채로 활보하는 그를 궁인들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그분께서는 유독 왕비 마마를 따르셨답니다. 낯도 많이 가리셨고요. 처음에는 저랑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으셨다니까요.’

급하게 그의 처소로 돌아갔을 때, 프란츠는 자리에 없었다. 이른 아침 외출했다는 시종의 보고를 듣고 제라니아는 바삐 궁 안을 돌아다녔다. 집무실에도 가봤지만 보이지 않아, 어릴 적 프란츠와 처음 만났던 숲에도 들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허탈하게 웃었다. 당신을 나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놓고, 이럴 때 어디에 있을지 짐작하지도 못하다니.

‘그분의 장례식이 거행될 때는, 거의 끝까지 남아 계셨답니다. 비가 오는데도 무덤 앞에서 움직이지 않으시려고 하셔서, 리베라 후작 각하께서 겨우 달래 데리고 들어가셨었죠.’

기나긴 설명을 전부 들었을 때, 제라니아는 입을 열었다.

‘어머니.’

‘비전하. 사적인 자리가 아닌 이상 경칭을 생략하시는 건 예의에 어긋….’

‘죄송한데 여기 좀 맡아주세요. 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

‘예? 잠깐,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빠르게 걷느라 들고 있던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우뚝 멈춰 선 채로 바닥을 노려보았다. 아니야, 생각해내.

지금 그는 어디에 있을까? 그가 가장 있을 만한 곳….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제라니아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붉은 가죽으로 뒤덮인 커다란 문을 보자마자 그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갈색 머리칼의 기사, 제롬이 문 앞에 서 있다가 가까이 다가오는 제라니아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비전하, 여긴 어떻게….”

“용건이 있습니다. 비켜주세요.”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이 있으셨습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집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제라니아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제롬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무언의 수긍을 힐끗 쳐다본 뒤 있는 힘껏 문을 밀었다.

천천히 문이 열리고, 넓은 공간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카펫이 깔려 있는 커다란 홀, 그 카펫의 끝에는 높이 솟아 있는 계단이 자리했다. 그 위에는 왕좌가 있었다.

모두가 선망하는 그 자리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던 청년의 시선이 문이 있는 쪽으로 힐끗 움직였다. 권태로운 얼굴을 하고 있던 프란츠의 눈동자에 서서히 빛이 돌아오는 것을 바라보며 제라니아는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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