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사랑의 정의 (6)
봄이 이제 막 지나고 여름에 들어선 어느 날, 마차 한 대가 꽃길을 달려 도시 외곽에 위치한 작은 저택 앞에 멈춰 섰다.
붉은색 지붕을 얹은 저택의 외관은 무척 깔끔했다. 새하얗게 칠해진 벽과 네모나고 커다란 창문들, 화창한 햇살이 그 안으로 들이쳐 가지런히 정리된 가구들을 얼핏 드러냈다.
안쪽에는 예쁜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푸른 잔디와 알록달록한 꽃이 피어난 화단, 조경수들이 그 뒤로 나란히 붙어 서 있었다. 담 바깥으로 삐죽 튀어나온 나뭇가지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며 나뭇잎을 떨어뜨렸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새까만 머리카락의 소년이 훌쩍 내려섰다. 앳된 얼굴에 비해 키가 무척 컸고, 단정하게 차려입어 잘생긴 외양이 한층 돋보였다.
소년이 마차를 향해 손을 뻗었다. 창백한 피부를 가진 미인이 소년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 내려섰다. 모자의 넓은 챙이 얼굴을 감싸고 있어 무표정한 얼굴이 더 어두워 보였다.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은 탓이었다.
지아비인 국왕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반역죄로 아버지가 잡혀 들어갔다는 사실을 전해 듣자마자 왕비는 그대로 혼절했다. 이안은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그들을 보았다.
‘그럼, 저희는 이제 어떻게 되나요?’
“자, 어머니. 어서 가요.”
이제부터 지내게 될 예쁜 감옥을 말없이 쳐다보던 이안이 아이렌의 손을 꼭 붙들었다.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나이 든 집사와 더불어 몇 명의 시녀들이 그들을 맞았다.
아무런 말이 없는 어머니 대신 의젓하게 대응하는 이안에게 집사는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침실에 앞서, 먼저 보여드려야 할 곳이 있습니다.”
“보여줄 곳이라니, 무슨…?”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안은 어머니를 돌아보았고, 아이렌 역시 의아한 눈빛을 했다. 둘은 집사를 따라 1층 복도를 걸어, 마련되어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
“…와.”
이안은 나직이 감탄사를 흘렸다. 흡사 작업장을 연상케 하는 공간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
옆으로는 옷이나 모자를 걸어놓을 때 쓰는 듯한 나무걸이들이 세워져 있었고, 넓은 책상 위에는 종이와 더불어 온갖 도구들이 가득했다. 커다란 장롱을 열어보자 색색의 천들이 종류별로 걸려 있었다.
‘아이렌, 또 그런 걸 만들고 있어? 언제 봐도 손재주가 좋다니까.’
‘아버지한테는 비밀로 해줘. 마음에 안 들어 하실 게 분명하니까.’
‘그건 걱정할 거 없고. 그것보다, 저번에 만든 것도 비비한테 줬지? 기껏 만든 걸 왜 쓰지는 않는 거야? 잘 어울릴 텐데.’
‘그 애한테 잘 어울리잖아. 그러면 됐지.’
‘누이는 너무 욕심이 없어. 비비는 그 나이부터 벌써 실리를 그렇게 챙겨대는데.’
‘아까부터 말이 많네. 너도 하나 만들어줘?’
‘…나는 모자가 좋아. 대가는 제대로 지불할 테니, 만들어줘.’
대체 이게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안과 달리 아이렌의 안색은 한층 더 창백해졌다. 하얗게 질린 안색을 본 이안이 놀라 물었다.
“어머니?”
“이….”
뭐라 작게 중얼거리던 아이렌이 방 안으로 홀연히 걸어 들어갔다. 커튼이 걷혀 있는 창문 너머에서 햇빛이 쏟아져 여인을 적셨다. 여인의 발꿈치 뒤로 길게 그림자가 늘어졌다.
이안은 뭐라고 더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할 뿐인데, 평소보다 더욱 쓸쓸해 보이는 등을 보니 차마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부드러워 보이지만 강한 사람. 어머니를 바라보는 이안의 시선은 늘 그러했다. 분명 그랬는데, 지금의 그는 건드리면 그 순간 깨져버릴 유리처럼 연약해 보였다.
작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이안은 뒤를 돌아보았다.
“도련님께서는 이쪽입니다.”
따라오시라는 듯 소리 없이 방을 나가는 그를 따라 이안은 살금살금 발걸음을 내디뎠다. 복도를 돌아 나가 조금 더 걸은 뒤, 집사는 어느 방의 문을 열어주었다. 이안은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깜짝 놀랐다.
“와, 이건….”
온갖 것들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구석에 정리되어 있는 커다란 캔버스들과 책상에 올려진 유화 물감들, 다양한 크기의 붓들이 커다란 통에 꽂혀 있었고 책장에는 양장으로 된 책들이 가득했다.
손을 뻗어 책상에 올려져 있는 밀봉된 물감들을 살며시 건드렸다. 라피스라줄리를 갈아 만든 울트라마린 물감을 떨리는 손으로 어루만지던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집사는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음껏 사용하시라고 하셨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다면 얼마든지 더 말씀하십시오.”
나중에 불러주시라 말하며 집사는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밖으로 나갔다. 방을 몇 번이고 둘러보던 이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형님께서 이걸…. 어떻게 아신 거지.”
예전부터 몰래 그림을 그리기는 했으나, 그는 그 사실을 남한테 말한 적이 없었다. 제가 훌륭한 왕족이 되기를 바라는 할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말해봐야 그들을 실망시킬 뿐이었다.
그래서 일단 겉으로나마 최선을 다했으나, 하면 할수록 자신은 이 옷과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강해질 뿐이었다. 정치는 배울수록 어려웠고, 남들과 다투는 것 역시 피곤하기만 했다.
프란츠를 볼 때마다 아무런 호승심이 들지 않았던 건 그 때문이었다. 이복형제인 제 눈으로 봐도 그는 완벽했다. 자신은 왕족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잠까지 줄여가며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못 되었다.
밤새워 무언가를 하고 싶다 생각한 건 예전부터 오로지 한 가지뿐이었다.
일곱 살 무렵, 신전의 벽을 가득 채운 웅장한 벽화를 본 순간 시선을 빼앗겼다. 그다음에는 섬세하고 화려한 삽화에 눈이 갔고, 나중에는 몰래 재료를 구해다 조금씩 그림을 그렸다.
들켜서는 안 되었기에 큰 캔버스를 사 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휴식 시간이 생기거나 어머니가 외출했을 때, 작은 종이에 조그맣게 낙서하는 것이 전부였으나 즐거웠다.
단언컨대 제 인생에서 가장 큰 비밀이었고, 누구보다 믿고 자란 유모한테도 말할 수 없었다. 기겁할 것이 뻔했으니까. 그리고 진지하게 들어줄 것 같지도 않았다.
‘특별히 좋아하시는 게 있으십니까, 전하.’
‘그런 걸 왜 질문하시나요?’
‘오랜만에 뵈었더니, 이것저것 궁금해져서 말이지요. 안심하셔도 됩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좀 입이 무겁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그 도자기 인형을 깨버리신 것도 아직 비밀로….’
‘으악! 그런 걸 왜 기억하고 계시는 건가요!’
‘제가 원래 기억력이 좀 좋습니다.’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않을 거죠?’
‘물론입니다. 설령 그게 제 주군이라 할지라도 비밀로 하겠습니다. 요아보로의 섬을 걸고 맹세합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전하. 부디 절 용서하지 마십시오.’
여기로 오기 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어머니는 그를 외면했으나 자신은 그럴 수 없었다. 사실, 배신감이 들었다기보다 올 것이 왔다는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는 여전했으나 평소와는 달랐다. 어떤 변명조차 하지 않고 그저 그렇게만 말했다. 제 손을 꽉 붙잡고 잔잔하게 웃던 숙부의 얼굴을 떠올리고서야 이안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구나.
형님에 대해서 잘은 모르나 후환을 남길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안다. 할아버지가 반역죄로 잡혀가고 가문이 풍비박산이 난 와중에도 왜 자신과 어머니만은 그저 유배에 그친 건지, 그 이유를 지금 알았다.
모르긴 몰라도 숙부가 손을 썼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상황이 설명되지 않았다.
용서하지 말라는 건 그래서였을까. 이번 일로 어머니는 제 나이만큼이나 쌓아온 세월을 모두 잃었고, 그건 어떠한 것으로도 돌이킬 수 없었다. 기만이라면 기만이었고, 불쾌하게 여긴다면 충분히 불쾌해할 만했다.
이안은 작은 나무 의자를 끌어다 새하얀 캔버스 앞에 앉았다. 노란색 빛을 머금은 물감을 열어 판에 조금 뿌린 뒤, 붓을 하나 꺼내 들었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가 아득하게 그의 시야를 메웠다.
이안은 생각했다. 평생 감시당해야 한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꿈이라면 적어도 지금은 깨지 않기를.
붓이 힘차게 캔버스 위를 가로질렀다.
* * *
“이상하군요.”
이렌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마지막으로 읽은 문서를 손에서 내려놓았다. 옆에서 같이 서류를 정리하던 티레인이 말을 받았다.
“뭐가 말이지?”
“자료가 일부 소실된 건 확신합니다만, 그렇다고 추측이 불가능한 것도 아닌데. 아무리 생각해도 숫자가 맞지 않습니다.”
그는 며칠 내리 병사들이 찾아온 자료들을 읽는 것에 몰두했고, 이제 막 그 여정이 끝난 참이었다. 옆에서 같이 문서를 살피던 사람들 역시도 기이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렌스가 부연했다.
“있던 자료는 전부 확인했으니 확신합니다만, 들어온 사람과 나간 사람의 수가 맞지 않는단 말이죠. 행적이 묘연한 자가 절반 가까이나 됩니다.”
맨 안쪽에 있던 방, 거기에서 사라진 자료들. 소실된 자료들에 단서가 있을까. 이렌스의 미간에 살며시 금이 갔다.
“이 사람들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하늘로 솟았나, 땅으로 꺼졌나. 신의 품으로 갔다 한들 흔적이 남아야 마땅한데.
처형되기 전, 보데로아 후작이 남겼던 말 역시 마음에 걸렸다. 감옥에서 고초를 겪었는지 얼굴은 해쓱했지만, 눈은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아마 그 근간에는 혼자 가라앉을 수 없다는 발악이 내재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는 약 17년 전, 로브를 입은 남자가 자신을 찾아와 계약을 제의했노라고 했다. 처음에는 수상하다 여겼으나 조건을 들어보니 구미가 당겼다고.
‘조직을 확대하기 위해 보증된 귀족의 권력이 필요하다 했소. 내가 가진 인맥 역시도. 그것만 보장해 준다면 필요한 건 얼마든지 지원하겠다 했지.’
계약하고 난 뒤 처음으로 그 덕을 본 것은 바로 왕비 간택 때였다. 단순히 아름답기만 해서는 왕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없었다. 후작은 경쟁자들을 견제하는 것에 그들의 힘을 빌렸고, 왕비가 된 딸을 매개로 세력을 확장해가기 시작했다.
‘그자의 얼굴? 내가 가장 알고 싶소. 늘 전령을 통해 대화했고, 단 한 번도 자신에 관해 추론할 만한 단서를 남긴 적이 없으니까. 전령으로 오던 이들이 마법을 사용하던 자인 것을 보아 신전 쪽 사람일 거라 추측한 정도요.’
상대는 철저했다. 17년을 넘게 교류했던 보데로아 후작조차 제게 이런 제안을 한 상대의 신변을 전혀 알지 못했을 정도였다. 상대와는 언제나 중간 관리인을 통해 연락했으며, 정보를 캐내기 위해 사람을 붙인 적도 있으나 전부 실패로 돌아갔다.
이렌스는 이번에 얻어낸 정보들까지 포함해, 이 조직이 다시 회생하지 못하도록 제대로 털어낼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어째 찜찜했다. 중요한 배후를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함이 가시지 않았다.
“가장 최근의 흔적부터 짚어 봐야겠습니다. 대관식을 마친 다음, 곧바로 움직일 수 있게.”
이렌스의 손가락이 문서 위의 글자들을 쓸어내렸다.
* * *
“후아암, 오늘 날 한번 좋네.”
벤자민은 입을 크게 쩍 벌리며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했다. 제자인 다니엘이 봤다면 제발 체통이나 위신을 생각하라며 잔소리를 했을 테지만, 지금은 혼자니 괜찮았다.
그는 히죽 웃으며 통로를 걸어갔다. 다들 예배를 드리고 있을 시간이라 그런지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간만에 찾아온 한산함을 만끽하며 모퉁이를 도는 순간, 벤자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저 멀리서 신관복을 입은 두 사람이 어딘가로 들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익숙한 얼굴을 벤자민은 금방 알아보았다.
‘아비스 와이엇?’
저기는 지하 감옥 쪽 아닌가? 한참 예배를 드릴 시간일 텐데, 왜 지금 여기에?
고민은 길지 않았다. 묘하게 꽂히는 촉에 벤자민은 발걸음을 재촉해 그들을 따라갔다. 계단을 한참 내려가 마침내 지하 감옥으로 들어선 그는 눈을 깜빡였다.
“어라?”
그를 비웃듯이, 어둡고 시커먼 감옥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력을 차단하는 특별한 금속으로 만든 창살 너머로 무기력하게 앉아 있는 범죄자들의 모습들이 보였다.
감옥을 끝까지 돌아보았지만 새하얀 옷자락의 끄트머리조차 찾지 못했다. 특별한 마법적 장치가 있나 싶어 마력을 흘려보기도 했지만 잠잠했다.
잘못 봤나?
뺨을 긁적거리며 돌아서는 벤자민의 등 뒤로 을씨년스러운 감옥의 풍경만이 남았다.
* * *
제라니아는 창문 너머로 물끄러미 밖을 쳐다보았다. 이른 아침이긴 하나 이상하게 어둑했다. 봄이 한창인 만큼 이런 날은 최근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기이했다.
회색 구름들이 하늘을 가득 뒤덮은 모습을 보던 제라니아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비가 오려나….”
잠옷 차림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던 제라니아가 침대가 있는 쪽으로 돌아섰다. 커튼이 창문을 감싸며 그 내부의 모습을 온전히 감추었다.
오늘은, 선대 국왕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