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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107화 (108/171)
  • 제107화. 사랑의 정의 (5)

    순간 남자의 몸이 멈칫했다. 일순간의 움직임이었지만 그에게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던 차라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제라니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토해내지 못하는 분노를 바들거리는 주먹이 나타내고 있었다.

    “당신이군요. 셀리나를 죽인 사람이.”

    “…….”

    셀리나의 이름을 듣는 순간, 견고하던 남자의 집중력에 금이 갔다. 수면에 파장이 일어나듯 아주 가볍게 스쳐 지나간 찰나였지만, 순간적으로 검들이 살짝 주춤거렸다. 그 찰나의 동요를 리암은 놓치지 않았다.

    제 앞을 가로막는 단검을 쳐낸 리암이 앞으로 빠르게 도약했다. 왼손에 든 단도로 제게 달려드는 검을 쳐낸 그가 남자의 등을 내리찍으려 했다.

    남자는 부드럽게 몸을 돌려 리암의 검을 피했다. 옆으로 물러나는 남자를 노려보며 리암은 제라니아의 앞에 섰다. 제법 고전했는지 갑옷 여기저기에 생채기가 가득했다. 그가 험악한 표정으로 검을 내뻗으며 말했다.

    “망할 자식이!”

    “입이 험하시군요.”

    남자가 다시금 손짓하자, 놀아주는 건 여기까지라는 듯 허공에서 움직이던 검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제라니아는 깜짝 놀랐다. 이보다 더 빨라질 수 있다고?

    빨라지는 검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몸의 여기저기를 베인 기사들이 낮게 신음 소리를 냈다. 피가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져 고여갔다.

    리암은 단검을 다시 허리춤에 꽂은 뒤 양손으로 장검을 고쳐 잡았다. 남자, 라엔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푸른 눈동자가 집중한 듯 새파래졌다.

    그에게로 달려들자 라엔은 왼발을 뒤로 옮기며 몸을 틀어 그를 피했다. 산책을 나온 것처럼 가볍게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암살자를 떠올리게 했다. 아무리 그라도 지금 검의 속도를 유지하며 힘을 더 쓰는 건 어려웠는지 단검을 들어 리암의 검을 받아냈다.

    저를 노리는 검을 부드럽게 흘리며 뒤로 물러나는 그를 리암이 바짝 추격했다.

    순식간에 안으로 달려들자, 라엔이 비어 있는 손을 들었다. 집중력이 흐트러진 듯 기사들을 둘러싸던 검의 폭풍이 사그라지고, 리암의 몸이 아까 전 마차의 말들처럼 굳었다.

    하지만 라엔은 마저 검을 휘둘러 리암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지 못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제 가슴께에 꽂힌 단도를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기분 탓일까, 딱딱하게 굳은 리암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도 같았다.

    가슴께에서부터 퍼지는 통증에 그가 살며시 비틀거렸다. 깊이 꽂힌 것은 아닌지라 꾹 잡은 단검을 빼내는 순간, 검을 물리친 기사들이 제라니아를 감싸고 리암에게로 달려갔다. 피가 철철 흐르는 가슴께를 꾹 누른 채 라엔은 그들과 대치했다.

    쾅, 흐릿하게 번지는 소리가 모두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보자, 한참 떨어진 곳에서 폭발이 일었는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저 멀리서 포로들을 인솔하던 병사들의 무리가 보였다. 덩그러니 놓여 있는 마차를 본 걸까, 그들의 발걸음이 무척 빨라졌다.

    “…실패한 것, 같군요.”

    쿨럭, 피를 뱉어내는 라엔의 입술이 무언가를 잡아먹은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회복을 하려는지 마력을 운용하는 그에게로 기사들이 달려들려는 순간, 라엔은 남은 마력을 쥐어짜 그들의 움직임을 멈춘 뒤 곧바로 근처에 보이는 골목길로 뛰어 들어갔다.

    기사들이 쫓아 들어갔지만 이미 그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마법이 풀려 바닥으로 주저앉는 리암의 옆으로 제라니아가 바삐 다가갔다.

    “괜찮아?!”

    “저는 괜찮습니다. 다친 곳 없으십니까?”

    “나야 당연히.”

    “그럼 빨리 공작저로 갔으면 좋겠는데요. 이 이상 귀찮은 놈들이 설치는 건 영 별로라서요.”

    죽을 뻔한 위기를 겪은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작게 투덜거리는 그를 보며 제라니아는 나직이 웃음을 터트렸다.

    다가오는 기사들과 제라니아 일행의 등을 감싼 햇살이 골목 여기저기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동이 트고 있었다.

    * * *

    “그래서, 결과는?”

    “예, 모여 있던 인원 중 153명 사망, 414명 정도를 포로로 확보했습니다. 도망친 놈들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어 현재 추격대를 보낸 상황입니다.”

    “폭발이 있었다고 하던데.”

    “전황이 불리하다 싶었는지 놈들 중 일부가 자료실로 보이는 창고를 태워버리려 했습니다. 다행히 자료들은 무사히 확보했습니다만, 가장 안쪽에 있던 자료실은 이미 텅 비어 있었습니다.”

    “손을 쓴 모양이군. 자료들은 모두 가져왔나?”

    “물론입니다. 양이 어마어마한 탓에 일단 가장 최우선으로 확보해야 하는 자료들부터 우선 가져왔습니다. 여기.”

    “…익숙한 문장들이군. 특히 이 두 개 문장이 말이야.”

    “…….”

    “일단 핵심부터 잡아야겠군. 당장 보데로아 후작가와 디제 후작가로 병사들을 보내 그들을 체포해라.”

    “죄명은 어떻게 될까요.”

    “국법을 어기고 마법사들을 빼돌린 것만도 중죄일진대, 왕족 독살과 암살 시도를 자행했으며 그 밖에 수많은 불법들을 시행한 의혹이 있고, 왕세자비까지도 시해하려 했으니 그 죄를 어찌 측량할 수 있겠나.”

    “…….”

    “그래, 국가 반역죄 정도면 적당하겠군. 속히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명 받들겠습니다.”

    * * *

    꽤 이른 아침부터 들이닥친 병사들에 보데로아 후작저는 발칵 뒤집어졌다. 느긋하게 차를 음미하던 후작은 무도하게 구는 병사들에게 벌컥 역정을 냈다.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함부로 더러운 발을 내딛는 것이냐!”

    “보데로아 후작과 그 일가를 국가 반역죄로 체포하라는 왕명입니다. 순순히 협조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무력을 동원하겠다는 딱딱한 대답에 후작은 펄펄 뛰었으나, 속으로는 냉정하게 계산을 굴리고 있었다.

    조직의 존재가 탄로 난 것인가. 하지만 그렇더라도 문장을 제외한 증거는 없을 터. 며칠 전에 도장을 도둑맞았다 주장하면 억지스러울지언정 넘어갈 만했다. 괜히 재판장들에게 돈을 투자했던 것이 아니었다.

    “결정적인 증거는 없으니, 재판에서 빠져나가면 된다 생각하고 계신 모양이죠?”

    그런 후작의 등 뒤에서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느긋한 목소리에 불길함이 쭈뼛 손끝에서부터 타고 올라왔다. 뒤를 돌아보자 팔짱을 낀 티레인이 피식 웃으며 손가락 사이에 문서 한 장을 끼운 채 팔랑팔랑 흔들었다.

    그게 무엇인지 알아본 순간 후작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그가 치솟는 화를 견디지 못하고 삿대질을 했다.

    “네, 네놈! 어떻게 그것을!”

    본성에 있어야 할 물건이 어찌하여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일까.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을 티레인은 질문하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주절주절 풀어냈다.

    “제가 이래 봬도 명색이 아버지의 하나뿐인 아들 아니겠습니까. 저한테 성의 비밀을 그토록 많이 알려 주셨으면, 이 정도는 각오하셨어야죠. 아, 철저하신 성격답게 아무 데나 숨겨두진 않으셨더군요. 덕분에 찾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네요.”

    비꼬는 것이 다분한 말투에 후작은 노기등등한 얼굴로 고성을 내질렀다.

    “이런 빌어먹을, 가문의 배신자 새끼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에게 달려들려는 후작을 병사 둘이 붙잡아 단단히 결박했다.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친아버지를 바라보며 티레인이 경례하듯이 이마에 손을 올렸다. 더없이 가벼운 몸짓으로.

    “죄송합니다, 아버지.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절 이런 후레자식으로 키운 건 당신인 것을요.”

    자신의 앞에서 온갖 저주의 말을 쏟아내는 후작을 보면서도 티레인의 표정은 견고했다. 후련한 듯 씁쓸한 시선으로 아버지를 바라볼 뿐이었다. 저를 알아보고 작게 수군거리는 사용인들의 시선 역시 대수롭지 않게 흘려 넘겼다.

    후작이 질질 끌려 나간 뒤에야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택의 안팎으로 바삐 움직이는 병사들과 더불어 환한 초록색으로 빛나는 정원이 보였다.

    기억 속에서만큼이나 아름답고 푸르렀다. 7년 전 버렸던 것들은.

    이제 마지막 한 가지만 남아 있었다.

    “드디어 이 빌어먹을 성을 버릴 수 있겠군.”

    가만히 중얼거리며 티레인은 개운한 듯 웃었다. 후작 앞에서 이것까지 말했다가는 정말 다시없을 패륜아가 될 거라는 걸 알았기에 함구했다. 사실 세간은 이미 충분히 자신을 천하의 개새끼로 보고 있겠지만.

    아버지한테 애정이 없었던 게 아니다. 하지만 그는 그 이상으로 제 아버지를 용납하지 못했다.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해야 했던 누이도 그렇지만, 그가 쌓아왔고 제가 누렸던 부의 원천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이미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기에.

    영리했기 때문에 알아챘고, 기사로서 자라며 기사의 도리를 다하라 배웠기에 고민했다. 결론을 내린 건 7년 전이었다. 누릴 수 있었던 것들을 전부 버린 대가가 뼈아프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정의구현의 대가라…. 뭐, 부려먹히는 것밖에 더 하겠나.”

    아이렌이 평생 자신을 보려 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상관없었다. 지키고 싶은 것만 지켜진다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았으므로. 언제부터 그런 것에 연연했다고. 티레인은 픽 웃었다.

    지금보다 한참 젊었을 무렵, 양심과 신념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팡질팡하던 중 한 소년을 만났다. 그가 왕의 재목이라는 건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무심했지만 공정했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생각 역시 분명했다.

    그리고 제 가문과는 대립하는 관계였다.

    소년은 자신에게 그를 따르는 대신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겠노라 하였다. 그가 약속이라 내건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킨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소원이라. 티레인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건 오로지 한 가지뿐이었다.

    “준비를 좀 서둘러야 하려나…. 그래도 거의 다 됐으니까 괜찮겠지.”

    태평하게 중얼대는 그의 얼굴이 오랜 짐을 덜어낸 것처럼 개운해 보였다. 반응이 어떨지는 잘 모르겠다. 솔직히 기만자라 욕을 들어 처먹어도 별수 없다며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선물이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킬킬 웃으며 티레인은 그 자리에 털썩 누웠다. 푹신한 잔디가 그의 몸을 부드럽게 받쳐주었다. 어릴 때처럼 체통 없다는 잔소리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는 진정으로 자유로웠다.

    올려다보는 하늘이 무척 푸르렀다.

    왕국에서도 유서 깊은 두 후작가가 몰락하는 순간을, 그는 태평하게 관망했다.

    * * *

    보데로아 후작가와 디제 후작가가 국가 반역죄로 잡혀 들어갔다는 소식은 곧 왕궁을 타고 사교계 전체로 퍼졌다. 왕좌가 비어 있는 사이를 틈타 왕세자를 시해하고 권력을 쥐려 했다는 죄목을 듣고 사람들은 술렁거렸다.

    개국 공신이라 불리며 권세를 누리던 후작 일가 사람들이 줄줄이 묶여 들어오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라 할 만했다. 궁인들은 두려움과 호기심이 섞인 시선으로 그들의 몰락을 지켜보았다.

    두 후작은 문서에 찍힌 도장에 대해서는 시치미를 뗐으나, 그들의 성에서 발견된 똑같은 형태의 문서들을 내밀자 입을 꾹 다물었다. 침묵이 그들의 죄를 사해줄 거라 믿는 듯이.

    그런 그들의 모습을 권태로이 바라보고 있던 왕세자는 차분하게 선고했다.

    주모자인 후작들을 처형하고, 일족의 성씨와 작위를 박탈하며, 이 일에 관련된 이들 역시 참형을 면치 못하리라. 또한 사병을 포함한 재산을 전부 몰수해 국고로 환수한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한바탕 시끄러워졌다. 억울하다 눈물짓는 목소리들을 깔끔하게 무시한 그는 작은 단서를 덧붙였다.

    그리고, 아이렌 보데로아-리나엔과 이안 보데로아-리나엔의 경우 반역에 가담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나, 왕족인 것을 감안해 지금껏 누렸던 모든 권한을 박탈하고 유폐하는 것으로 그친다.

    후작이 그토록 붙잡으려 했던 마지막 동아줄마저, 그의 눈앞에서 싹둑 잘라내는 왕세자의 입가에 미소가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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