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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106화 (107/171)
  • 제106화. 사랑의 정의 (4)

    저를 노려보는 남자의 시선에도 제라니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푸르스름한 새벽을 등진 채, 제라니아는 제 앞에 꿇어앉은 이들을 빙 둘러보았다.

    “왕족을 죽이려고 했으니,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만 여러분은 전부 극형에 처해질 겁니다.”

    나긋한 음성과는 달리 그 내용은 사뭇 냉정했다. 조용히 시선을 교환하는 이들에게 여인은 싱긋 웃으며 단서를 달았다.

    “하지만, 꼭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더없이 정확한 발음으로.

    “가장 먼저 본거지를 말하는 이를 무조건 사면하겠습니다. 어떠한 잘못도 묻지 않고, 포상금 역시 지불할 것을 약속하죠.”

    포로들이 술렁거렸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는 상황 속에서 제라니아는 가만히 때를 기다렸다. 제라니아의 주변에 포진된 기사들이 들고 있는 창칼이 이제 막 깨어나 고개를 드는 햇빛을 받아 날카롭게 빛났다.

    뒤쪽에서 작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제라니아가 손짓하자 병사 둘이 그를 끌어다 제라니아의 앞에 앉혔다. 얼굴은 가려져 있었으나 목소리가 꽤 앳되었다. 입에 물려둔 천을 풀어주자 그가 입을 열었다.

    “마, 말할 수 없다면요?”

    언뜻 듣기에는 엉뚱하게 들렸으나 제라니아는 그 의미를 바로 알아들었다.

    “말할 수 없다면…. 혹시 말하는 데 제한이 걸려 있나요?”

    그가 고개를 붕붕 끄덕였다. 제라니아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면서 뜸을 들였다. 답이야 뻔했다.

    “낙인인가요?”

    그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낙인은 무서운 마법이었다. 한 번 찍히면 지울 수도 없었을 뿐더러, 시전자는 피시전자를 강하게 예속할 수 있었고 필요하다면 죽이는 것도 가능했다.

    그들이라고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죽을 운명이라면 발악이라도 해보겠다 생각하는 이가 하나쯤은 있을 법했다.

    우두머리가 격하게 신음 소리를 냈다. 배신자라고 외치고 있는 걸까. 혹시 몰라 우두머리로 보이는 이의 목깃을 잡아당기자, 아무것도 찍혀 있지 않은 등이 드러났다.

    병사들이 그의 손목에 제어구를 채운 다음에야 제라니아는 눈앞에 꿇어앉은 어린 암살자를 돌아보았다.

    “글을 쓸 수 있나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는 그를 보던 제라니아가 대답했다.

    “행동에 제약이 있는 건 아닌 것으로 압니다. 지금 당장, 거기가 어딘지 안내해 줘야겠습니다.”

    그들이 대비하기 전에 허를 찔러야 했다. 소식을 흘린 게 어젯밤이고, 지금은 그때로부터 열두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이만한 숫자의 살수를 고작 그 시간 안에 동원했다면, 아마 근처에 본거지가 있다는 뜻이리라.

    동의의 고갯짓을 본 제라니아는 즉시 제 옆으로 다가온 기사에게 지시했다.

    “이자들을 끌고 갈 최소한의 병력만 남기고, 나머지를 끌고 가세요. 신관들 역시 셋만 남기고 전부 데리고 가십시오.”

    “송구하옵니다만 비전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고작 서른 남짓의 병사들만을 남기라니, 비전하의 안위에 해가 되는 일이 생길까 우려스럽습니다.”

    “10분만 더 가면 공작가에 도착합니다. 나보다야, 직접 무도한 이들을 상대해야 하는 그대들이 더 걱정이지 않겠습니까.”

    “비전하를 데려다드릴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제라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게다가, 공작가에 감시의 눈이 붙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요.”

    어서 가라는 듯 눈짓하는 것에도 기사는 머뭇거리다가, 다시 한번 말했다.

    “하오나.”

    “명령입니다.”

    “…알겠습니다. 꼭 무사히 도착하셔야 합니다.”

    정중하게 예를 갖춘 기사가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진형이 빠르게 정리되고, 소년을 태운 병사의 말이 앞장서 나아갔다. 두두두두, 말들이 지면을 박차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제라니아는 남은 포로들과 병사들, 그리고 리암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도 가자.”

    빠르게 달려간 병사들은 곧 평범하게 생긴 저택 앞에 다다랐다. 고요한 저택에서는 어떠한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포로로 잡은 청년을 내려다보자 그가 내려달라는 듯 묶인 손을 흔들었다.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청년이 조용히 하라는 듯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두려움에 덜덜 떨면서도 그는 기사에게 붙잡힌 채로 천천히 걸어갔다.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저택을 포위했다.

    그들 중 일부가 일제히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간 뒤, 닫혀 있던 대문을 활짝 열었다. 청년을 따라 저택 안쪽으로 가자 나무로 된 오두막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내부는 평범했다. 안으로 들어간 청년이 발로 낡은 카펫을 걷어내자, 닫혀 있는 커다란 나무문이 나타났다. 그가 발로 나무 위를 살짝 두드리자 탕탕거리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겉으로만 보면 나무로 된 것 같지만, 안쪽은 철문이에요.”

    “어떻게 해야 열리지?”

    “…잠깐, 칼을 좀 빌릴 수 있을까요.”

    “그건 안 돼.”

    “그럼, 제 손바닥을 살짝 그어주세요. 피가 날 정도로요.”

    그의 부탁대로 손바닥을 긋자 피가 방울방울 새어 나왔다. 청년이 피를 문에 뿌리자 피가 그 위로 스며들더니, 곧 스르륵 열렸다. 제법 넓은 공간과 그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본 기사가 작게 혀를 찼다.

    “이런 야만적인 방식을 사용하는 건가.”

    “대, 대장이라면 손바닥만 대도 열렸겠지만요.”

    말을 더듬는 목소리가 두려운지 덜덜 떨렸다. 청년의 목덜미를 꽉 붙잡은 기사가 계단을 앞장서 내려갔고 나머지가 그 뒤를 따랐다.

    아래로 한참 내려가자 거대한 공간이 드러났다. 지하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넓은 홀은, 여러 갈래로 통해 있었다. 통로마다 서 있던 병사들이 침입자들을 보고 검을 빼어 들었다. 검집과 검이 마찰하는 소리가 들렸다.

    검을 쥔 채 맨 앞에 서 있던 기사가 소리쳤다.

    “모두 쓸어버려라!”

    * * *

    푸른 장막이 거둬지고 해가 저 멀리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봄의 새벽, 마차 한 대가 호위들을 두르고 텅 비어 있는 시내를 미끄러지듯 질주했다. 거기서부터 한참 뒤, 말 탄 병사들을 따라 터벅터벅 걸어가는 무리들도 보였다.

    모퉁이를 돌자, 저 멀리 커다란 저택이 보였다. 마부가 다시 한번 구령을 넣으려던 순간이었다.

    시내 한복판, 달려가는 마차 앞에 새하얀 로브를 입은 자가 홀연히 등장했다. 잔상처럼 등장한 이는 그를 본 마부가 반응하기도 전, 양손을 뻗었다.

    그리고, 곧바로 움켜쥐었다.

    그 순간, 시간이 멈춘 것처럼 말들이 뻣뻣하게 굳었다. 조각상처럼 굳어버린 말들을 따라 마차 역시도 급하게 멈췄다.

    앞서가던 리암과 다른 기사 역시 고삐를 홱 붙잡았다. 푸르릉, 소리를 내며 앞발을 높게 들었던 말이 천천히 발굽을 땅에 대었다.

    먼지바람이 풀썩 일어났다 가라앉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제라니아는 마차에서 나오지 않은 채 바깥의 상황에 귀를 기울였다.

    “설마 싶었는데, 역시나군요.”

    나긋나긋한 저음이 그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마치 벌꿀처럼 부드러운 음성은 듣는 이로 하여금 상대의 말을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다는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유혹을 털어내려는 듯 고개를 흔드는 다른 기사들과 달리, 이미 이와 비슷한 경우를 겪어보았던 리암은 이맛살을 잔뜩 구겼다. 말에서 내린 그가 검을 빼어 들고 그를 향해 뻗었다.

    “웬 놈이냐! 소속을 밝혀라.”

    “글쎄. 그걸 알 필요가 있을까요?”

    어차피 모두 죽을 텐데.

    그렇게 덧붙이는 수상한 자를 보고, 다른 기사들 역시 검을 빼 들고 응전할 준비를 했다. 천천히 자신을 포위해 오는 검끝에도 남자는 여유로웠다.

    그는 제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공중으로 던졌다. 암기인 줄 알고 긴장했던 기사들은 허공에 떠 있는 단도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로브는 단검 몇 자루를 더 꺼내 허공으로 던졌고, 그 순간 리암은 소리쳤다.

    “어서 잡아!”

    그가 앞장서 뛰어가려는 순간, 허공을 부유하던 단도가 그대로 리암에게로 날아들었다. 화살을 쏜 것처럼 빠른 단도를 리암은 재빨리 쳐냈지만, 그 순간 허공에 뜬 나머지 단검들이 마저 움직였다.

    한꺼번에 달려드는 검들을 피해 그는 뒤로 물러섰고, 물러선 직후 날아온 단도들이 서로 부딪혀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물러서는 게 조금만 늦었더라면 꼬챙이가 되었을 것이다.

    제 반사신경에 감사하며 리암은 품에서 단검 하나를 더 꺼냈다. 물론 허공을 빙글빙글 춤추는 단검들은 반격할 틈을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검들이 로브의 손짓을 따라 리암과 기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챙, 채앵, 챙,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신관들 중 하나가 결계를 시전하려 했으나 어느새 뛰어나온 로브가 검을 뽑아 무방비한 신관의 목을 베었다. 팟, 새빨간 피가 지면에 일자로 선을 그었다.

    곧바로 돌아서서 제게 불꽃을 쏘아 보내려는 다른 신관의 가슴에 칼을 던져 명중시키는 로브의 눈동자에 광기가 넘실거렸다.

    신관 둘을 순식간에 처리하고, 아직도 검들과 씨름하는 기사들을 로브는 유유히 지나쳤다. 마차로 다가가는 그를 보자마자 기사들의 반항이 거세졌다. 기를 쓰고 빠져나오려 하는 이들을 본 로브는 허리춤에 찬 단검 몇 개를 더 던졌다.

    마치 생명이 깃든 것처럼 움직이는 단검들이 마치 검의 폭풍과도 같았다. 아무리 염력을 다룬다고 하지만 저 많은 검들을 자유자재로 다루다니, 엄청난 정신력이었다.

    마차 앞으로 다가간 그가 창문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차분히 앉아 자신을 노려보는 제라니아를 확인하자마자 그는 싱긋 웃었다. 입꼬리만 올려 웃는, 다분히 인위적인 미소였다.

    “순순히 내리실까요, 왕세자비 전하. 가급적 해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만.”

    예의 바른 어투로 사실상 협박을 하는 남자를 경계하는 눈초리로 쳐다보던 제라니아는 드레스 자락을 정돈하고, 아주 천천히 마차 문을 열고 내렸다. 그리고 남자를 마주 보았다.

    그는 자신보다 한 뼘 정도 컸다. 목소리를 봐서는 남성인 게 확실했으나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어 얼굴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제라니아가 입을 열었다.

    “도대체, 어떻게? 마법사는 보통 한 가지 특성에 특화된다고 알고 있는데요.”

    염력도 그렇지만 정신계 마법에도 통달한 것 같았다. 남자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꾸만 풀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묻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세상에 예외란 존재하는 법이죠.”

    후드 너머로 얼핏 투명한 녹색 눈동자가 엿보였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입술 위에 점 하나가 찍혀 있었다. 순간 번뜩이는 생각이 제라니아를 스쳐 지나갔다.

    ‘머리는 좀 곱슬곱슬한 갈색이었고, 눈은 녹색이었어. 턱이 넓적한 편이고 코는 꽤 높아. 까무잡잡한 피부인 걸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평범한 인상인데…. 아, 왼쪽 입술 위에 점이 있더라고.’

    마지막으로 셀리나를 만났을 때, 그가 남겼던 말이었다. 후발대가 언제쯤 도착할까. 시간을 끌어야 했으므로 제라니아는 가급적 침착하게 떠오른 이름을 입에 담았다.

    “라엔 모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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