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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105화 (106/171)
  • 제105화. 사랑의 정의 (3)

    “아무튼, 내가 최소한 위독하다는 사실을 놈들도 이미 알았을 겁니다. 오래 숨길 수는 없을 테니, 최대한 빠르게 덫을 쳐야….”

    “당신 말이 맞아요, 프란츠.”

    프란츠의 말을 끊고, 제라니아가 불쑥 입을 열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위기는 기회일 수도 있다는 거요.”

    눈가가 초승달처럼 곱게 휘어졌다. 싱긋 웃는 얼굴이 불길함을 자아냈다.

    “무슨 생각 합니까.”

    “당신이랑 비슷한 생각이요.”

    부드럽게 말려 올라간 입가와 달리 눈빛이 꽤 고집스러웠다. 프란츠는 단호하게 말했다.

    “불허합니다.”

    “이렌스한테 지금 통용할 수 있는 군사력이 얼마인지 물어볼 필요가 있겠어요.”

    “제라니아.”

    “핑계는 아버지 관련으로 급한 전갈을 받고 공작저에 다녀온다는 정도면 적당하겠죠? 시녀한테 편지를 들려서 밖으로 내보낼게요. 늦어도 내일 밤까지는 공작저에서 진짜로 소식을 보내도록.”

    뭐든 확실히 해야 한다며 제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끼를 자처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프란츠가 말했다.

    “나랑 이야기할 때는, 분명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전하는 죽지만 않는다면 어느 정도 다치는 건 감수하실 것 같았으니까요. 아니에요?”

    “…….”

    말이 없어진 프란츠와 달리 제라니아는 계속 조잘거렸다.

    “리암한테도 활약할 기회를 줘야죠. 그래 보여도 걔 정말 강해요. 제 호위로만 남아 있기는 진짜 아까운걸요.”

    만사태평해 보이는 모습과 달리 리암은 검에 관한 집착이 대단한 편이었다. 그는 영지에서 지낼 때도. 호위로 지내는 와중에도 매일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가끔 기사로서 다른 이들과 대련을 하기도 했는데, 날카로운 눈빛으로 상대를 가차 없이 후려 팼다. 유독 봐주지 않길래 이유를 물었더니 ‘늘 맞기만 하다가 내가 더 강하니까 기분이 새롭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래도, 아버지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 같은데.

    공작님도 정말 여러모로 정도가 없으셨구나. 제라니아는 언제나처럼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철저히 대비하고 나갈 거니까 문제없을 거예요. 아마 절 인질로 삼으려고 할 것 같은데, 저번처럼 시내에서 매복하고 기다린다면 사람을 동원하는 것도 한계가 있을 거고.”

    속으로 무슨 계획을 짜는 건지 말없이 상념에 잠기는 제라니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프란츠가 툭 말을 꺼냈다.

    “…뭐가 그렇게 즐겁습니까?”

    “네?”

    “위험을 좋아하는 건 아니면서, 즐거워 보입니다.”

    “아, 그렇게 보이나요.”

    멋쩍은 듯 뺨을 긁적이던 제라니아가 조용히 털어놓았다.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감각이 좋아요.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들거든요.”

    무력하게 멈춰 서 있는 것보다는 무엇이든 길이 있는 게 좋았다. 나아갈 수 있으니까. 막막한 벽을 마주하고 있다가도 그것을 어떻게 뛰어넘을지 고민하는 행위는 기꺼웠다.

    “프란츠.”

    가만히 이름을 부르는 음성이 부드러웠다.

    “당신이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진심으로 기뻐요.”

    녹색 시선에 따스함이 담겼다. 손을 뻗지 않았음에도 제 얼굴을 쓰다듬는 것같이 다정한 눈빛이었다.

    “지켜야만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힘을 낼 수 있어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는 얼굴에서 햇살의 향기가 났다. 인간은 차가운 바람보다 따뜻한 햇빛에 약해진다 했던가. 프란츠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슴이 아려오는 감각에 그는 멀쩡한 손을 꽉 쥐었다. 아픈 것도 같았고, 슬픈 것도 같았다. 괴로운 것도 같았고, 목이 메는 것도 같았다.

    잔잔하기만 하던 수면에 풍랑이 일 듯이 남자는 그렇게 흔들렸다. 깜빡, 깜빡. 눈꺼풀이 움직이는 속도에 맞추어 생각이 느릿하게 굴러갔다.

    움직이지 말라 했는데, 눈앞의 상대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무엇이든 하고 싶은데, 정작 구체적으로는 뭘 하고 싶은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자꾸만 밀려드는 충동이 당황스러웠다. 그것은 다소 파괴적이고 거칠었으며 들쭉날쭉했다. 늘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던 만큼 그는 그런 자신이 무척 낯설었다.

    눈동자 위에 겹쳐져 있던 껍질이 떨어져 나가듯, 오로지 당신만이 선명했다.

    그는 그제야 제 감정의 상태를 정리했다. 제라니아를 붙잡고 싶었다.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당신까지 날 떠날 거냐고 묻고 싶었다. 소리를 지르고 싶기도 했다. 미친 건가 싶을 정도였다.

    감각이란 어째서 이토록 선명한가. 어째서 모르고자 하는 걸 깨닫게 하는가.

    헛웃음을 겨우 삼켰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수 없었다.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당신이 나를 약해지게 만들 사람이라는 걸. 이미, 유일한 무언가가 되었다는 것을.

    * * *

    “하여, 그렇게 되었습니다.”

    한쪽 무릎을 꿇은 뒤 상황을 최대한 명료하게 설명하는 이의 호흡이 거칠었다.

    로브를 벗고 얼굴을 드러낸 남자의 꼴은 꽤나 처참했다. 군데군데 찢겨 너덜너덜해진 로브와 뱃가죽에 난 자상,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 지혈하긴 했지만 워낙 치명상이다 보니 여전히 벌겋게 드러난 상처가 찢어진 로브의 틈 사이로 엿보였다.

    고개를 숙여 바닥에 시선을 둔 남자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면목이 없습니다. 왕세자가 거기서 대신 달려들 줄은.”

    “아니, 아주 잘했다.”

    “…예?”

    만족스러운 듯한 웃음소리에 남자는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앉아 있는 이를 쳐다보았다. 의자에 앉아 있는 이는 생각에 잠긴 것인지 말이 없었다.

    남자가 돌아오기 전, 대략적인 상황은 전해 들었다. 왕세자가 최소 중태에 빠졌다는 소식에 후작은 몹시 흡족한 눈치였다. 구시렁거리던 그간의 태도를 생각하면 여러모로 우스웠다.

    얻고자 하는 이득이 비슷해 손을 잡은 지 10년이 넘어갔지만, 후작은 이따금 이쪽에 불만을 표시하곤 했다.

    남자의 탐욕은 끝이 없었다. 딸을 왕비로 들여보내 권력을 잡더니 이제는 제 손자를 왕으로 올리고 싶어 했다. 그 목적을 위해 조직을 마음껏 이용한 주제에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짜증 내는 건 여러모로 귀족다웠다.

    왕세자가 거슬린다는 건 그 역시도 동의하는 바였으나, 쉽게 없앨 수 있었다면 아직까지 질기게도 살아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왕세자는 아무도 믿지 않았고, 주변에 사람을 쉬이 두지도 않았으며 방심하지도 않았다. 현혹 마법을 시도하지 않은 건 아니나, 그럴 정도로 상대에게 관심을 두는 법이 없었다.

    회유를 하고자 해도 거절 외의 선택지는 없는 것처럼 굴었고, 위협을 보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게 아주 성가셨다. 그리고 사사건건 제 일에 훼방을 놓았다.

    아렌타에서부터 그는 이미 꽤 많은 손해를 봤다. 본거지 중 하나를 잃은 것만으로 끝났다면 좋았을 것이다. 잠시 잠잠한가 싶더니, 놈들은 몇 달 만에 다른 작업장을 찾아내고는 거기서부터 추적을 시작했다.

    손을 쓰기도 전, 수많은 양식장들이 그들의 손에 넘어갔다. 물론 결정적인 단서를 얻지 못하게 중간에서 저지하기는 했으나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이제는 아들로도 모자라 국왕까지 성가시게 굴고 있었다. 혜택을 지우겠다 엄포를 놓는 것에 한숨이 나왔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거늘, 도를 넘는 핍박을 가하면 이쪽에서도 어쩔 수 없이 대응해야 하는 법이다.

    음습함을 버리고 움직이니 국왕 자체는 꽤 쉬웠다. 더불어 민심의 흐름 역시 잡을 수 있었던 만큼 일석이조였다.

    문제는 왕세자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아무렇지 않게 왕궁을 지휘하는 그 집념에는 박수를 보낼 만했다. 걸리적거리니 치우기는 해야겠는데 틈이 없었다.

    국왕이 죽자마자 그는 바로 신관을 대동했고, 건물 밖으로 거의 나오는 일이 없었다. 감이 기가 막히게 좋은 개새끼를 늘 옆에 달고 다니는 만큼 암살자를 보내기도 녹록지 않았다.

    이제껏 왕세자가 유일하게 틈을 보인 건 셀리나 왕자비가 죽은 사건뿐이었다. 문서를 전해 받고, 어떻게 전개된 건지 대략적인 상황을 전해 들은 그는 이 사건의 변수가 왕세자비라는 결론을 내렸다.

    왕자비가 남편과 신전의 유착이 적힌 서류를 왜 굳이 빼돌렸겠는가? 시킨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상대가 왕세자일 것은 뻔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함구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여인이 도움을 청하러 왔었다고 말하고 데릭 왕자와의 불화를 까발리면 되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증언해줄 수 있는 증인이 태반이었다.

    문서가 사라진 이상, 손해 하나 없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마치 둘의 불화가 알려지길 바라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왕세자가 그걸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다른 이의 의지가 개입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열렬한 구애 끝에 결혼을 했다는 건 겉으로 내보이기 위한 소문일 뿐이라 생각했으나, 생각을 조금 달리해야 할 것 같았다. 원래 살을 맞대고 살다 보면 정이라는 게 든다고 하지 않던가.

    감정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 의심스러운 상대였으나, 그도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

    사냥감을 잡으려면 그만한 덫을 놓아야 하는 법이다. 물론 아주 확신할 수는 없었으므로 간단히 시험을 해보기로 했다. 그가 내린 명령은 간단했다.

    ‘왕세자비를 죽여라. 단, 반드시 왕세자가 앞에 있을 때.’

    왕세자는 아직 죽지 않았을 것이다. 맹독을 쓰기는 했으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쉽게 죽을 이였다면 이미 죽어 세상에 없겠지. 몸이 아픈 것을 핑계로 대관식까지 버티려고 할 수도 있었다. 재상이 복귀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왕실의 대관식에는 신전의 최고 결계사들이 모두 참석한다. 그들을 뚫고 암살을 성공하는 건 불가능했다. 벼룩을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전까지 어떻게든 그를 잡아야 했다. 찾고자 한다면 틈이 보일 것이다. 쓸 만한 약점도 찾았겠다, 기다리면 되었다.

    힐끔 남자를 내려다보던 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신음 소리를 죽인 채 물러나라는 명을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너그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상처가 아파 보이는구나.”

    “괜찮습니다. 버틸 만합….”

    “도와주마.”

    대답을 하기도 전, 커다란 손이 남자의 머리를 붙잡았다. 곧 남자의 몸이 점점 마르기 시작하더니 뼈와 가죽만 남은 상태로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곧 그의 몸이 모래처럼 바스러졌고, 찢어진 천만이 풀썩 가라앉았다.

    손을 거두는 이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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