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사랑의 정의 (2)
피곤한 탓일까, 눈시울이 뜨뜻미지근했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도로 열었다.
“견딜 만하다는 게, 아프지 않다는 소리는 아니잖아요.”
프란츠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하지만, 아프지 않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
“뭐든, 더 오래 견디는 이가 승리하는 법입니다.”
제라니아는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정말로 사고하는 방식이 자신과는 완전히 달랐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에 화를 내는 것도, 그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받아들인다에 가까웠다.
당신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그가 무사히 정신을 차린다면 꼭 물어보겠다 생각했는데, 막상 깨어난 그를 보니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잃은 프란츠를 데려다 옷을 갈아입힐 때, 그걸 지켜보던 제라니아는 깜짝 놀랐다.
그의 몸에는 무수한 상처가 있었다. 복부에는 길게 그어진 흉터를 포함해 자잘한 흉들이 보였고, 팔과 다리 역시 상흔이 가득했다.
하나같이 오래되었고, 목숨이 위험했겠구나 싶은 흔적도 보였다. 용케 얼굴과 손이 저렇게 멀쩡하구나 싶을 정도로.
왜 그가 자신의 앞에서 단 한 번도 흐트러진 옷차림을 보이지 않았는지, 잠옷조차도 팔다리를 전부 감싸는 형태였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제라니아의 시선이 프란츠의 붕대 감은 팔을 힐끔 스쳤다가, 얼굴로 향했다.
“손등이랑 얼굴이 용케 멀쩡했네요.”
“인간은 완전한 것을 좋아합니다. 하자 있는 물건은 신뢰를 얻기 배는 어렵지요.”
그는 태연하게 답했다. 제 몸을 본 거냐고 묻지도 않는다. 그래서 어떻게든 보이는 곳만은 사수했다는 말을 저렇게 삭막하게 하는 것도 재주였다.
“그럼, 저 때문에 곤란해진 거 아닌가요. 흉이 질 가능성이 높다고 했는데요.”
“당신 목숨값에 비하면 싸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달래려 하는 말이라고 하기에는 살가운 기색이 전혀 없는 말투였다. 뭐라 더 항의하려던 제라니아의 말을 프란츠가 손짓으로 막았다. 일단 들어보라는 듯이.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게 뭔지 압니까.”
“…….”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을 무력하게 놓치고, 돌아오지 못하는 것에 집착하는 일입니다. 나는 두 번 다시, 그런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습니다.”
미련하기 짝이 없는 일을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 소중한 것 따위는 더 이상 만들지 않을 생각이었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당신이 위험에 처했다고 느낀 순간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어떠한 계산 없이.
몸이 아픈 건 정말 별일 아니었다. 심장이 찢겨지는 듯한 고통을 이미 알기 때문에.
“그럼 저는요?”
가만히 듣고 있던 제라니아가 입을 열었다.
“그런 기분을 제게 느끼게 하시겠다는 건가요.”
프란츠는 속으로 웃었다. 타인을 아끼는 당신의 천성은 나 같은 인간에게도 적용되는가.
“…그러게 말입니다. 나는 이기적인 인간이라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을 생각은 없었다고 변명할 수도 있었을 것이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말했다간 그럼 왜 그랬냐고 질문할 테고, 자신은 대답을 해야 했다. 아직 흐릿하고 불명확한 이 감정을 제 입으로 시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부터,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말을 끝으로 프란츠는 입을 다물었고, 썰렁한 침묵이 침실에 내려앉았다. 무겁게 퍼진 분위기를 환기하듯이 그가 무뚝뚝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나저나, 범인은 잡았습니까.”
이제 막 일어난 탓에 들어야 하는 보고가 밀려 있었다. 제라니아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놓쳤는데…. 그 부분은 제롬 경한테 설명을 들으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제라니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소의 문을 열고 조용히 지시했다. 잠시 후 제롬이 안으로 들어왔다. 자신을 보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대기하는 그에게 프란츠는 짤막하게 지시했다.
“보고.”
“예. 새까만 로브를 뒤집어쓴 놈이었습니다. 마법을 사용하더군요.”
프란츠가 쓰러진 걸 확인한 뒤, 신관들이 시전하는 마법들을 요리조리 피하며 마법사는 숲이 있는 쪽으로 바람같이 도주했다. 궁인들이 많이 지나가는 중심부 쪽보다는 장애물이 많은 숲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다른 병사들은 그런 마법사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허우적거렸지만 제롬만은 달랐다. 누구보다 빠르게 튀어 나간 제롬은 숲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마법사를 따라잡고 육탄전을 벌였다.
그의 검은 마법으로 처리를 해놓은 덕에 어지간한 마법에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칼처럼 날아드는 바람을 전부 베어내는 그의 모습이 전설 속에 나오는 마수와 같았다고 병사들은 입을 모아 증언했다.
휘둘러지는 검을 막으려 마법사는 결계를 쳤지만, 몇 번 두들기자 금이 가고 와장창 깨졌다. 괴물 같은 완력으로 결계를 깨자마자 그는 마법사의 앞으로 훅 파고들었다.
그가 다시 바람을 일으켰지만 제롬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아주 약간 몸을 틀었다. 어깻죽지가 찢겨 나갔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검을 휘둘렀다. 계산했다기보다는, 무지막지하게 달려들었다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렸다.
그런 과정을 거쳐 제롬이 상대의 배에 칼을 꽂은 순간, 병사들은 환호했다. 드디어 저 사악한 마법사를 잡았다! 환호성 속에서 마법사는 쿨럭, 피를 뱉어냈다.
제롬은 전투광이었으나 그런 그에게도 나름의 선은 있었다. 동생들이 있는 만큼, 어린아이를 건드는 건 용납하지 않는 게 그중 하나였다. 공격 패턴을 보자마자 핀을 죽인 게 그라는 것을 확신한 제롬은 이를 악물었다. 절대 놓칠 수 없었다.
칼이 등을 관통한지라 그대로 빼내면 죽겠지. 꿰어낸 채로 데려가야 하나, 그 잠깐을 고민하는 순간 마법사는 씨익 웃었다. 그가 손을 들어 제롬의 가슴에 바람을 날렸다.
공격은 겨우 피했지만 제롬은 칼을 놓쳤고 그 틈을 타 마법사는 숲으로 뛰어들었다. 무슨 마법을 썼는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에 제롬은 혀를 내둘렀다. 치명상을 입고도 어떻게든 움직이는 그 집념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후 병사들을 시켜 숲을 수색하게 했으나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어차피 그 몸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테니 시간문제겠지만.
“바람을 부리는 이인 것 같았습니다. 꼬마의 팔다리에 있던 상처를 생각하면 그자의 짓일 가능성이 높다 생각됩니다.”
어떻게 화살이 수호부를 무시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검증하고 있었다. 프란츠가 쓰러져 있는 동안, 신관들은 궁의 입구 바닥에 숨겨진 마법진을 찾아냈다.
화살에 그려진 식과 마법진이 연계해 수호부를 무력화시키는 형태가 아닐까, 신관들은 조심스럽게 추정했다. 더 자세히 알아보려면 신전과 연락을 해야 했으나 이렌스는 그들을 저지했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처분을 기다리는 제롬에게 프란츠는 오히려 잘되었다 말했다.
“당장 병사들을 거둬라.”
“하지만….”
“살려 보내는 게 더 이용하기 좋겠지. 조만간 지령을 보낼 테니 대기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간단히 예를 갖춘 뒤 제롬은 성큼 걸어 침실을 나섰다. 다시 두 사람만 남자 프란츠는 입을 열었다.
“제법 허를 찔렀군요.”
왕궁의 건물에는 결계를 쳐놨으니 제아무리 마법사라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다. 하지만 건물의 입구라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틈이 생기길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인사에 시간을 평소보다 오래 쏟은 게 실수였나 봅니다.”
왕궁 한복판에서 이런 짓을 벌일 줄이야. 정말 수단을 가릴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런데 왜 저를 노린 걸까요?”
제라니아 본인조차도 당연히 프란츠를 노릴 거라 생각했다. 직접적인 계승권자는 그였으니까.
“이유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겁니다. 가령 당신이 사라지면 나는 바이첸 공작가의 지지를 잃게 됩니다. 휴스타인 역시 더 이상 나나 왕실을 신뢰하지 못할 테지요. 내가 무사히 왕이 되더라도 정국이 이보다 더한 혼란에 빠질 수 있단 뜻입니다.”
“…그렇게까지요?”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제라니아를 보며 프란츠는 낮게 웃었다.
“왜 아니겠습니까? 셀리나 왕자비 때, 문제를 해결한 게 당신이라는 걸 공표하지 않았다 하나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휴스타인가의 이후 행보를 모르지 않을 텐데요.”
데릭과 어떻게 대화가 끝난 건지 몰라도, 현재 아론 휴스타인은 정치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는 상태였다.
그는 자신을 회유하려는 다른 귀족들을 단호하게 뿌리쳤다. 그러나 제라니아가 보내는 편지에만은 매번 성실히 답장을 보내고 있었다.
크리스토퍼 휴스타인은 여전히 유베르그 기사단에 있었으나 요즘 들어 출장이 잦았다. 지금도 외부로 나가 있어 현재 소식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쩌면 범인은 내가 왕이 되는 걸 저지하려고 하는 것보다도, 이간질에 목적을 둔 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럴 가능성이 높겠죠, 아무래도.”
고개를 끄덕이는 제라니아를 담고 있던 푸른색 눈동자에 망설이는 빛이 떠올랐다.
“…사실 조금 더 직관적으로 생각한다면 다른 답도 있을 겁니다.”
“어떤 답이요?”
프란츠는 답지 않게 조금 머뭇거렸다. 의아해할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
“당신을 노린다면 내가 움직이지 않을 수 없을 거라는, 그런 계산을 한 건지도 모르지요.”
왜 제라니아를 노렸을까. 사실 그를 노리겠다면 전에도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굳이 자신과 있을 때, 화살이 날아온 건 과연 우연일까. 심지어 그 자리는 평소에도 제라니아가 자신을 배웅하던 장소였다.
“그 말은….”
“당신을 내 약점이라고 생각한 건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만약 그렇다면 확신을 준 셈이겠군요.”
“…….”
녹빛 눈이 천천히 깜빡거렸다. 상념에 잠긴 듯 말이 없는 상대를 보며 프란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이 상황이 못내 내키지 않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