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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103화 (104/171)
  • 제103화. 사랑의 정의 (1)

    쿠르릉, 천둥이 치는 밤이었다.

    침대에 앉은 채로, 비가 억세게 몰아치는 바깥을 바라보며 남자는 꿀꺽 와인을 들이켰다. 얼큰하게 취해 있어 얼굴이 꼭 사과처럼 발갰다.

    제법 넓은 침실에는 남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아내는 오래전 세상을 떠났고, 하나뿐인 아들놈은 반항기가 온 건지 사사건건 대드는 통에 앞에 두면 있던 술맛도 떨어졌다. 두 딸은 말할 것도 없었다.

    꼭 무슨 일이 벌어질 것처럼 빗줄기가 요란스레 창문을 두들겼다. 비가 오는 날에는 유독 잠이 오지 않았다. 슬슬 나이가 들어가나. 마흔이 넘어가기 시작하니 확 다가오는 세월이 느껴졌다.

    그때, 나무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등불이 몸을 흔들었다.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자 탁자 옆에 자리한 인영이 보였다. 그는 새까만 로브로 몸을 둘둘 말고 있었는데, 분명 비바람을 뚫고 왔을 텐데도 조금도 젖어 있지 않았다.

    “누구냐!”

    자신을 꾸짖는 고함 소리에 침입자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후작 각하.”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그는 남자가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드리고 싶은 제안이 있습니다.”

    * * *

    국왕의 갑작스러운 서거에 이어, 왕세자가 왕궁 한복판에서 화살을 맞았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쫙 퍼져 왕궁을 점령했다.

    워낙에 철통같이 정보를 통제하고 있어 알려진 것은 많지 않았다. 갑작스레 불려 간 어의나 신관, 명을 받은 것처럼 절도 있게 움직이는 병사들의 모습으로 상황의 심각성을 유추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쓰러졌다는 소식이 퍼진 지 며칠이 지났음에도 세자궁은 잠잠했고, 왕세자는 두문불출했다. 사람들의 불안감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난 음울함이 입술을 타고 흘러나와 왕성을 흠뻑 적셨다.

    “미쳤나 봐, 국왕께서 숨을 거두신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전하까지….”

    “화살에 독이 묻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정말일까? 그럼 진짜 위험한 거 아냐?”

    “근데…. 전하께서 쓰러지셨으면 국정 운영은 어떻게 되는 거야? 누가 대리를 맡거나, 재상께서 돌아오시나?”

    “안 그래도 바이첸 공작가로 급전을 보냈다는 얘기가 있어.”

    호기심이 가득한 말들이 오고 갔고, 일부는 조심스럽게 이후의 상황을 짐작해 보기도 했다.

    “소식이 너무 없는데, 혹시 이미 잘못되신 거 아니야?”

    “그럼 왕위는 어떻게 되는 거지…. 두 분 사이에 이렇다 할 후사 소식이 없으니, 역시 이안 전하인가?”

    “그분은 아직 성인이 되지도 않으셨잖나. 그렇게 된다면 왕비께서 국왕 대리를 맡으실 가능성이 높으니…. 한바탕 난장판이 되겠군.”

    물론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었다.

    “어째 조용하다 했지. 언젠가는 벌어질 일 아니었겠어?”

    “전에 왕자비 전하께서 시신으로 발견되신 것도 그렇고…. 터질 게 터지고 있다는 느낌이네.”

    “성문에 병사들이 쫙 깔린 거 봤어? 세자궁만 봐도 쥐새끼 한 마리도 못 나다니게 막고 있던데.”

    “범인이 도주했다잖아. 언제 또 나타날지 모르니까 그럴 만도 하지.”

    “왕세자를 죽이려고 왕궁 한복판에 나타났다니, 보통은 경비를 통과하지도 못할 텐데. 역시 뒷배가 있는 거 아니야? 예를 들어….”

    “쉿, 목소리가 커.”

    다들 입을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라나는 추측의 싹을 쉽사리 베어내지 못했다. 소문의 크기는 점차 다른 방향으로도 뻗어나갔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던 병사의 동료한테서 들은 건데, 비전하를 감싸려다 그렇게 되셨다는 이야기가 있더라.”

    “우와, 진짜? 하긴 청혼하셨을 때부터 난리도 아니었지.”

    “그래봤자 정략결혼 한 사이잖아. 그렇게까지 열렬하다고 하기엔, 평소에 두 분이 얼굴 마주하는 시간도 별로 없었다던데.”

    “난 다르게 들었는데? 오히려 비전하가 전하를 별로 안 좋아하신단 얘기가 있더라고. 작년에 왕자비 전하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곧바로 공작저로 내려가셨던 것도 그렇고. 장례식도 따로 참석했다잖아.”

    수군수군, 숙덕숙덕. 그런 표현들이 깨작깨작 궁인들의 마음을 갉아먹고, 왕궁의 성벽을 넘어 외부로까지 퍼져나가던 어느 날의 이른 아침이었다.

    성문이 열리고, 마차 한 대가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어떠한 문양도 없는 검은 휘장을 단 고급스러운 마차의 창문은 커튼으로 가려져 있어 누가 탄 건지 알 수 없었다. 소속을 알 수 없는 옷차림을 한 호위들이 말을 타고 마차를 빙 둘러쌌다.

    다그닥다그닥, 성문을 나서 어딘가로 향하는 단출한 행렬의 뒤로 하나의 무리가 은밀하게 따라붙었다.

    시간이 이르다 보니, 길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쭉 뻗은 대로를 지나 골목으로 접어들던 순간이었다.

    “히히힝!”

    쌩하며 날아온 화살이 마차를 끌고 가던 말의 다리에 박혔다. 다른 말 역시 몸통에 화살을 맞고 격렬하게 울부짖으며 몸을 뒤틀었다. 바닥에 쓰러지는 말들을 따라 마차 역시 멈췄고, 따라오던 이들 역시 말의 고삐를 움켜잡았다.

    건물들 사이로 하나둘씩 새까만 옷을 입은 살수들이 등장했다. 눈만 나오게 꽁꽁 싸맨 그들의 손에는 각기 다른 모양의 무기들이 들려 있었다. 수가 족히 오십은 될 것으로 보였다.

    호위들은 동시에 검을 뽑았다.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그들은 당황한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머리 위로 궁수들의 화살 세례가 쏟아졌다. 호위들이 방패를 꺼내 그것을 막아냈다. 마차의 지붕과 측면에 꽂힌 화살들이 부르르 떨었다.

    “이야아아!”

    화살이 다 떨어졌는지 그들은 아래로 내려왔다. 괴한들의 앞으로 나온 이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순순히 그 마차에 타고 있는 자를 내놓고 가라.”

    괴한들의 우두머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점잖은 투였다. 앞장서 있던 호위들 중 하나가 가당찮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 픽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거절한다.”

    “유감이군.”

    그 말과 함께 괴한의 우두머리가 가만히 손짓했다. 그러나 호위 쪽이 더 빨랐다.

    다른 이들이 그 신호를 본 순간, 그에게 대답했던 청년이 가볍게 지면을 딛고 뛰어 우두머리에게로 달려들었다. 바람같이 빠른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달려든 청년의 검이 우아하게 바람을 갈랐다.

    우두머리는 들고 있던 날이 두꺼운 칼로 일격을 막아냈다. 끼기긱 소리를 내며 검이 맞부딪힌 순간, 그는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했다. 곧 부하들의 칼이 놈의 몸을 꼬치로 만들 테지.

    그 생각을 읽어낸 양 청년이 씨익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리고 곧장, 다른 쪽 손에 들고 있던 작은 검을 그의 어깨에 있는 힘껏 찔러 넣었다. 피가 투두둑 튀었다.

    “크읏!”

    참을성이 대단한지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신음을 흘리며 제 쪽으로 쓰러지려 하는 우두머리를 그가 발로 툭 밀어냈다. 얼이 빠졌는지 주춤거리는 이들을 향해 리암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뭐 해? 한꺼번에 덤벼!”

    정신을 차리고 맨 처음으로 달려드는 이의 공격을 피하며 휘익 검을 휘두른 리암이 그의 가슴을 베어냈다. 그 일련의 동작이 마치 춤을 추는 듯 정갈했다. 몇 명이 손을 휘둘러 불꽃을 쏘아 보냈지만 칼을 들어 전부 쳐냈다.

    일행 중 마법사들을 뒤로 물린 채 검을 든 이들이 리암은 물론, 마차를 지키고 있는 호위들에게로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난전이 벌어졌다.

    몇 합을 주고받았을 때, 마차의 뒤에서 한 무리의 병사들이 달려왔다. 어림잡아도 그들의 배는 족히 넘을 수의 병사들을 보고 살수들은 당황했는지 진열이 흐트러졌다.

    그들은 있는 힘껏 저항했으나 신관까지 섞여 있는 정예 군단을 이기기는 역부족이었다. 절반이 넘게 죽었으나 우두머리를 포함해 나머지 절반을 한 명도 남기지 않고 포획하는 것에 성공했다. 마법사로 보이는 이들은 한층 더 각별히 취급했다.

    그제야 마차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밖으로 나왔다. 연갈색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고 새까만 드레스와 남색 숄을 두른 여인이 무릎을 꿇고 있는 살수들을 내려다보았다.

    자결하지 못하도록 입이 틀어막힌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우두머리의 앞에서 제라니아는 싱긋 웃었다.

    “함정에 걸려든 걸 환영해요, 여러분.”

    * * *

    세자궁의 경비는 살벌했다. 신관 하나에 병사 둘이 섞여 밤낮 가리지 않고 보초를 섰다. 내부의 궁인들 역시 출입할 수 있는 장소가 제한되었고, 침실에 드나드는 건 극소수의 시종과 시녀들뿐이었다.

    소식 하나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덕분에 외부에서는 온갖 추측만이 무성할 뿐이었다.

    마담 세자르에게서 간단히 외부의 소식을 전해 듣던 제라니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침대에 앉아 있는 프란츠를 보았다. 한쪽 팔에 붕대를 돌돌 감고 있는 남자의 안색은 창백했지만, 간밤보다는 훨씬 나아 보였다. 옆에 앉아 있던 어의가 재차 입을 열었다.

    “정말, 절대! 당분간 운신하셔서는 안 됩니다. 이제 막 안정되기 시작하신 상태니까요.”

    화살에 묻어 있던 독 때문에 그는 하루 내리 정신을 잃은 채 앓았다. 급히 소식을 받고 달려온 어의와 신관은 프란츠의 상태를 보고 기함을 금치 못했다.

    다행히도 기지를 발휘한 그가 화살을 오른쪽 손등으로 받아낸 덕에 상처 부위는 적었으나, 화살촉에 묻어 있던 게 맹독이었는지 손등은 보랏빛으로 부풀어 올랐고, 간밤 내내 열이 끓었다.

    빨리 처치한 덕분에 어떻게든 팔이 괴사되는 것은 막았으나, 당분간은 무리해서는 안 되었다. 그가 독에 내성이 없었다면 아마 유명을 달리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등 같은 부위에 맞았다면 자신이 오기도 전에 죽었을지 모른다며, 운이 좋았다고 어의는 강조했다.

    프란츠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말해봐야 통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직감했는지 어의는 제라니아에게도 같은 소리를 했다. 지그시 쳐다보는 시선에 프란츠는 대꾸 없이 고개만 돌렸다.

    어의가 방을 나서자, 침실에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정신을 차린 게 방금 전인지라 제대로 대면하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제라니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어의가 앉아 있던 의자에 앉았다. 그가 앓는 동안 밤을 새운 건지 제라니아의 눈가에도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습관처럼 제 얼굴을 만지려는 프란츠의 왼손을 제라니아가 꽉 붙들었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요.”

    엄격한 어조로 말하는 것에 프란츠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제라니아가 양손을 뻗어 프란츠의 볼을 꾸욱 잡아 늘렸다. 살이 워낙 없어 그런지 피부가 쉬이 길게 늘어졌다.

    제 딴에 불만을 표시하는 제라니아의 손길을 프란츠는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격식에 어긋난다는 것은 알았으나 주변에 사람이 없는 만큼 그걸 지적할 필요가 없었다.

    “구해줘서 고마워요.”

    한참 동안 볼을 잡아당긴 뒤, 이제 좀 속이 풀렸는지 제라니아는 그의 볼을 놓아주었다. 얼얼한 통증에도 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대답을 건넸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제라니아의 눈썹이 휙 올라갔다가, 스멀스멀 다시 내려왔다.

    “당신이 저 대신 다치는 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요?”

    “조건을 따졌을 때, 당신보다는 내가 낫습니다. 다쳐본 적도 훨씬 많으니, 이 정도 고통쯤은 견딜 만하니까요.”

    “고통을 견디다 못해, 죽을 뻔했는데도요?”

    “허나, 당신이 맞았다면 확실히 죽었겠지요.”

    무미건조한 어투에 제라니아는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일인데도 마치 남의 일처럼 서술하는 그의 태도에는 충분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제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전하께서는 왜 늘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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