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부조리 (4)
그냥, 갑자기 떠오른 말이었다. 생각을 거치지 않고 불쑥 내뱉어버린 말에 당황한 제라니아와 달리 프란츠는 차분했다. 투명한 녹색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집착하는 게 없다니. 세상에 그런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의외로운 말에 제라니아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도 그럴 게 그의 안에서 프란츠는 언제나 초연한 이미지였다. 자기를 죽이러 온 암살자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호위로 두고, 어떤 발언을 듣더라도 침착하게 대응하며 사치에도 관심이 없다.
그런 그가 집착하는 거라면,
“왕위…를, 말하시는 건가요?”
조심스러운 음성에 프란츠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뇌가 가득하던 눈에 호기심이 스며드는 것을 만족스러운 듯 바라보던 그가 말했다.
“왕위는 그 과정에 필요한 것일 뿐입니다.”
왕국에서 가장 지고한 자리를 도구로 취급하는 그의 발언을 불경하다 해야 할까. 질문을 던지기보단,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진지하게 시선을 마주했다. 남자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설핏 올라갔다. 쓰디쓴 미소였다.
“아마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집착할 겁니다. 내가 생각해도 독할 정도지요.”
“그게 무엇이기에….”
“말할 수 없습니다. 분명 내게 실망할 테니까요.”
세상에는 모르는 것이 더 나은 사실이 있다. 그에게는 내면 깊숙한 곳에 은밀하게 숨겨두었던 욕망을 전시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삶을 영위한 가장 큰 이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루고자 하는 소원.
차마 제 입으로 꺼내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하찮고 개인적인 감정의 발로를 제라니아가 수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지 않았다.
그런 기대를 갖기에 제라니아는 너무도 선한 이였다. 결혼에 회의적이면서도, 소위 대의를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내걸 줄 알았다. 고작 이런 감정 따위에 정복당해 일생을 바친 자신과는 달랐다.
그저 살아남기만을 바랐다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숙부를 따라 하이센으로 떠나 나름의 평온한 삶을 영위해도 괜찮았다. 그럴 수 없었던 건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허울뿐인 계승 서열을 지키고, 왕이 되기 위해 무엇이든 했다. 가진 것이 없었기에 필요하지 않은 건 전부 버려야 했다. 약하다는 죄로, 나는 나를 지킬 수 없었다.
“당신에겐 소중한 것이 많지만 나한테 그런 건 극히 일부일 뿐이라, 집착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고독하다. 그 생각을 떠올리고도 놀라워 프란츠는 픽 웃었다. 혼자 걸어가는 삶이 익숙하다고 생각했건만 어째서일까.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이 프란츠의 머리를 후려쳤다.
아, 그렇구나. 당신을 만났기 때문에. 당신의 빈자리가 허전하다 느끼게 되었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듯 그를 바라보는 제라니아와 달리 프란츠는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한 눈빛을 했다. 그는 마음 가는 대로 느릿하게 뱉었다.
“이상하지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무언가가 생기면 생길수록 더 외로워진다니.”
제 목표를 말하는 걸까, 눈앞의 상대를 칭하는 걸까. 오락가락하는 감정의 물결이 프란츠를 덮쳤다.
뭐라 더 말하려는 순간, 하얀 손이 프란츠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달래듯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무척 다정했다. 어떻게 보면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었지만 그는 제라니아를 제지하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의, 빛바랜 기억이 떠올랐다. 마냥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따스하고, 지금보다는 색채가 분명했던 기억들이 오래된 명화처럼 그의 뇌리에 펼쳐졌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유모까지 죽은 후로는 누구도 제 머리를 쓰다듬어 준 적이 없었다. 그럴 이유도 없었고, 필요도 없다 여겼다. 달짝지근한 것 따위는 사람을 약하게 만들 뿐이라 생각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으면….”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듭니다. 뒷말을 덧붙이려다 말았다.
죽어 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는 것처럼, 쓰지 않던 근육을 움직이는 것으로 비명을 지르듯이, 당신의 곁에 있으면 전혀 느끼지 않았던 고통들이 가슴에 스미듯이 밀려들었다.
무채색으로 물든 세상에 익숙해진 탓일까, 색이 입혀진 세상은 지나치게 눈이 부셔 고통스러웠다. 아득하기까지 한 감각에 정신이 아찔해진다.
아플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아픈 걸까. 그래서는 안 되는데.
그런 감각은 이미 오래전에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잘 다듬었던 가면에 균열이 가는 소리가 들렸으나, 프란츠는 그것을 무시했다. 눈앞의 여인이 자신을 해칠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문득 거부감이 들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뭐라고 말하려던 건가요, 라고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을 거죠.”
“…….”
“가끔 당신을 잘 모르겠어요. 무엇을 해줘야 좋아할지, 무엇을 하면 싫어하는지.”
왜 가끔씩, 그렇게 홀로 남은 어린아이와 같은 얼굴을 하는지.
“전에도 말했지만 계약을 떠나서, 인간적으로 당신을 꽤 좋아해요.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변하길 바랐지만, 한편으로는 그게 당신에게 내 마음을 강요하는 건 아닌가 싶은 걱정이 드네요.”
종잡을 수 없는 남자였다. 단단한 반석과 같으면서도, 깨지기 쉬운 유리공예를 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다가오지 말라는 듯 첩첩이 벽을 둘러싸고 있는 그에게, 내가 이 이상 다가가도 괜찮은 걸까.
셀리나에 이어서 핀의 일을 겪었기 때문인지, 제라니아는 다소 의기소침한 눈을 했다.
프란츠는 덤덤히 대꾸했다.
“강요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꼬마도 마찬가지겠죠. 당신이 그날 구하지 않았다면 꼬마는 길거리를 헤매다 죽거나, 쫓아온 살수들에게 죽었을 겁니다. 아니면 나한테 철저히 이용당하다 버려졌든지.”
섬뜩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 그에게서 차가운 바람 냄새가 났다.
“내가 그 꼬마를 그렇게 살려둔 건 당신 때문입니다. 이미 그 순간 많은 게 달라졌고, 앞으로도 달라질 겁니다.”
무언가를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자는 귀했다. 제라니아는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해냈다. 그의 머리로는 생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분명 당신은 아주 많은 것을 바꾸게 되리라. 나를 포함해서.
“하지만, 바뀌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늘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그렇더라도, 괜찮습니다. 그럴 수 있는 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신뿐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을 했을 뿐인데, 제라니아의 표정이 이상했다. 울컥 치미는 무언가를 참는 것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깜빡, 깜빡. 눈꺼풀의 움직임을 따라 선명한 초록빛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왜…. 제게, 그렇게 말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전하께서는 합리적인 분이시잖아요. 저와 충돌하는 게 귀찮지 않으세요? 전, 앞으로도 분명 이럴 텐데.”
의문이 생긴다면 물고 늘어지고, 불합리하다 생각하면 항의하고, 쉬이 다른 이를 연민할 것이다. 당신의 방식을 납득하지 못하고 갈등하거나 싸우는 일도 빈번히 벌어지겠지.
그렇더라도 괜찮냐고 묻는 제라니아에게 프란츠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나와 비슷한 인간이었다면, 절대 청혼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는 이상적인 왕비를 원했다. 현명하되 자기 앞가림을 할 줄 알고 백성들을 생각할 줄 아는, 지금과는 다른 나라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을 바랐다. 그가 결코 채울 수 없는 것을 채워줄 수 있는 상대.
그는 신을 믿지 않았고, 사람의 선의를 믿지 않았다. 그러기엔 불합리한 것들을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 우스운 말이지만, 이렇게 고군분투하면서도 세상이 바뀔 거라는 기대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그럼에도 생각한다.
당신이라면 무언가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앞으로도 날 설득해주면 됩니다. 나는, 당신이 하는 말이라면 언제든 귀담아들을 테니까. 그런 약속이었잖습니까.”
그 말과 함께 프란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바래다주겠다고 하며 내밀어지는 손을 붙잡으며 제라니아는 확고하게 말했다.
“물론이에요.”
짤막한 한 마디였지만 충분한 대답이 되었는지, 프란츠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문을 열고 나가자, 밖에 대기하고 있던 리암과 세인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프란츠가 세자궁으로 같이 갈 것이라며 앞장서자 제롬 역시도 병사들을 이끌고 뒤를 따랐다. 신관들이 손을 휘둘러 그들의 주변에 결계를 쳤다.
밖으로 나오자 따뜻한 봄 햇살이 풀밭을 반짝반짝 비췄다. 산책하기 좋은 날씨였으나 주변에 보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둘을 보자마자 예를 갖춘 뒤 후다닥 흩어지는 궁인들이 마치 사자를 피해 도망가는 토끼처럼 보였다.
오랜만에 한가로이 정원을 둘러 걸어가는 두 사람의 주변을 병사들이 철저히 둘러쌌다. 그 안쪽에서 걸어가며 둘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운을 차렸는지 의연한 태도로 사건에 대해 말하는 제라니아에게 프란츠가 질문했다.
“그 꼬마, 죽은 지 얼마 안 됐다고 했었습니까.”
“네, 왜 그러세요?”
“어의를 보내서 상처를 좀 살펴보게 해야겠습니다. 출혈량에 비해 오래 버티지 못한 거라면, 칼에 독이 묻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떤 독이 묻어 있었는지를 알아내야 만에 하나의 사태를 대비할 수 있었다. 치유 마법은 재생력을 키워줄 뿐 독을 해독할 수는 없었다.
걷다 보니 어느새 세자궁에 다다랐다. 문간 앞에 선 채 제라니아는 프란츠와 마주 보고 섰다.
“그럼, 들어갈게요. 전하께서도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 건 그인데, 도리어 그가 자신을 배웅하는 모양새에 제라니아는 웃고 말았다. 알겠다고 말하고 돌아서는 제라니아의 옆에 보이는 풀숲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그걸 제일 먼저 발견한 건 제롬이었다.
“피하십시오!”
그 목소리를 듣고 제라니아가 멈칫하는 순간 바닥에서 빛이 나기 시작하더니 핑,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화살이 그의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곧바로 시야가 새까맣게 변했다.
화살촉이 푹 꽂히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앞으로 달려오던 제롬도, 뒤에서 손을 내뻗던 리암도, 제라니아도 동작을 멈췄다. 저를 꽉 안아 감싸고 있는 누군가의 이름을 제라니아는 조심히 불렀다.
“…프란츠?”
그가 살며시 비틀거렸다. 제게 기대어 쓰러지는 프란츠를 따라 넘어지려는 제라니아를 리암이 받아 지탱했다. 언성을 높이는 일이 없다시피 했던 남자의 입이 고함을 쏟아냈다.
“잡아라!”
제롬과 병사들이 칼을 빼 들고 화살이 날아온 수풀 쪽으로 달려나갔다. 풀숲에서 로브를 둘러 입은 수상쩍은 인물이 튀어나와 도망치기 시작했다. 날아갈 듯이 발이 빨랐다.
화살을 맞은 프란츠와 제라니아의 주변으로 남은 병사들이 모여들었다. 그를 끌어안은 채로 제라니아는 소리쳤다.
“당장 어의를 불러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