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부조리 (3)
“왜 그러세요?”
딱딱하게 굳어 있는 손을 유심히 쳐다보던 소녀가 제 손을 들어 이렌스에게로 향했다. 소녀는 아주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이거, 수어 같은데.]
바로 알아들은 이렌스가 제라니아의 곁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굽혀 앉은 뒤 귓가에 낮게 소곤거렸다.
핀이 아일라와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수어를 배우기 시작한 건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 이렌스와 아일라가 손짓하는 걸 본 소년이 그게 뭐냐고 흥미를 가진 게 시작이었다.
소년은 열심히 수화를 배웠다. 기억력이 좋은 만큼 핀의 실력은 나날이 일취월장했고, 지금은 수어로 어지간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였다.
왕궁에 수어를 할 줄 아는 자는 극히 드물었다. 신관 몇을 제외하면 수어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이들도 많았다. 이렌스 역시 왕녀를 돌보기 시작하면서 익히게 된 언어였다.
그 사실을 핀 역시 알았을 것이다. 그건, 비밀을 남기기에 이만한 수단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제라니아는 아일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뭐라고, 하나요?”
아일라가 제라니아의 손바닥에 글자를 적었다.
[나무 위.]
핀의 시신이 발견된 바로 옆에 자리한 나무를 올려다본 두 사람이 리암을 불렀다. 그는 훌쩍 나무를 타고 올라가더니 작은 무언가를 들고 내려와 제라니아에게 내밀었다.
“이런 게 있었습니다.”
“…이건!”
리암의 손바닥에 올려져 있는 건 작은 단추였다. 백금으로 만든 볼록한 단추 위로 섬세하게 세공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바로 알아본 제라니아는 리암과 시선을 교환했다.
보데로아.
핀이 마주친 건 보데로아의 사람일 것이다. 후작일 수도, 그 밑의 사람일 수도 있었다.
중요한 건 핀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이었다. 목숨을 잃는 데 배에 난 자상이 결정타였으리라는 것과 별개로 아이의 팔다리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피부가 찢긴 듯한 상처는 평범하게 칼에 베인 상처는 아닌 것 같았다. 이렇게 상처가 심한데 몸통 쪽은 멀쩡한 편이라는 것도 기이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제라니아가 뒤에 서 있던 세인에게 손짓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진지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세인이 훌쩍 다가와 낮게 속삭였다. 희미하지만 마력의 흐름이 느껴집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제라니아는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범인이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겁니다. 흔적을 찾아보도록 해요.”
명을 받들어 재빨리 움직이는 병사들을 뒤로한 채, 제라니아는 안고 있던 핀을 내려다보았다. 착잡한 얼굴로 소년의 머리칼을 정리해준 그가 리암에게 아이를 넘겼다. 리암 역시 별다른 말 없이 아이를 천으로 돌돌 감아 안아 들었다.
“가자.”
핀을 안았던 탓인지 깨끗하던 드레스가 흙먼지와 핏자국이 달라붙어 엉망이 되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리암이 조용히 질문했다.
“어디로 갑니까?”
“일단 핀을 데려가고…. 사건에 대해 알아봐야지. 전하께도 알려야 하고.”
대관식을 준비하느라 모든 법의 제정이 뒤로 미루어진 상태였다. 여전히 프란츠를 돕느라 바쁜 이렌스와 달리 제라니아는 지금 꽤 한가했다. 몸을 조심해야 하는 시기인 만큼 너무 위험한 일은 삼가야 했지만.
“왕궁에 신원을 알 수 없는 위험한 마법사가 나타난 거잖아. 버젓이 증거물을 남기고서.”
왜 핀의 시신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갔을까?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면 처리했어야 맞았다.
“핀이 뭔가를 했거나, 아니면….”
“처리하기 전에 사람이 와서 몸을 피한 거거나, 자기가 이랬다는 걸 과시하고자 흔적을 버젓이 남긴 걸지도 모릅니다.”
“사실 지금은 시기가 시기라, 시동 아이 하나의 죽음쯤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넘길 요량이 크지만요.”
가만히 덧붙이는 세인의 목소리가 녹색 눈동자에 작은 불꽃을 지폈다. 제라니아가 앞장서 걸음을 옮겼고, 나머지는 그 뒤를 따랐다.
세자궁에 들러 핀의 시신을 내려놓은 뒤, 제라니아는 곧장 프란츠가 근무하고 있는 집무실로 찾아갔다. 핏자국과 흙으로 더러워진 옷을 입은 제라니아를 본 순간 프란츠는 들고 있던 깃펜을 떨어뜨릴 뻔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프란츠에게 옆에 서 있던 이렌스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범인이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는 곳에 무방비하게 다녀왔단 말입니까.”
날아오는 잔소리에 제라니아는 어리둥절했다. 이게 아닌데.
“병사들이랑 같이 갔는데요?”
“…혹시 모르니까요.”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하지만, 핀의 소식을 들으니 직접 가보지 않을 수 없었어요.”
순순히 사과하는 제라니아를 지그시 바라보던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눈치껏 방을 나선 이렌스가 문을 닫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방 안에는 단둘만이 남았다.
“당신의 그런 면을 이용하려는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가장 위험한 건 나지만, 당신 역시 충분히 위험합니다.”
아직은 이상하게 잠잠하지만 둘 다 이것이 폭풍의 전조임을 모르지 않았다. 대관식을 온전히 치르고, 프란츠가 국왕이 되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었다.
“다음에는 좀 더 조심할게요.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잖아요.”
제라니아가 내미는 단추를 받아 든 그가 문양을 보자마자 나직이 말했다.
“보데로아군요.”
“후작일까요.”
“오늘 어전에 들었던 그는 청록색 비단으로 맞춘 정장을 입고 있었습니다. 단추 역시 화려한 은색이었고 말입니다.”
제라니아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역시 기억력은 상당한 편이었다. 주변에 일어나는 변화를 면밀히 알아내는 것은 친분을 쌓을 때도 그렇거니와 암살에 대비할 때도 요긴하게 쓰였다.
“핀이 왜 후작의 단추를 가지고 있었을까요?”
“죽여서 입을 막을 정도라면 뻔하지요. 후작이 날 죽이겠다든가, 뭐 그런 음모를 꾸미는 걸 엿들었거나 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어떻게 증거물은 남긴 걸 보면, 최선을 다한 모양입니다.”
곁에 마법사가 있었다면 이야기는 더욱 뻔해진다며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병사들은 물론, 신관들에게도 경계를 시켜야겠다 말하며 그가 종을 울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시종이 정중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마법과 관련해 수상한 움직임이 있었으니 신관들의 알리바이를 포착하고, 왕궁 밖으로 허가 없이는 쥐새끼 한 마리도 나가지 못하게 경계하라는 명을 내린 프란츠가 손짓으로 그를 물러나게 했다. 저번과는 달리 범인을 놓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였다.
“당분간만 왕궁 내의 결계를 강화할 겁니다. 만약 날 죽이려고 한다면 굳이 나갈 생각도 없겠지만 말입니다.”
마법사가 왕궁에 들어온 이유야 뻔했다. 제가 순순히 왕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이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그래, 차라리 틈을 줘서 날 습격하게 만드는 것도 괜찮을지 모릅니다.”
“안 돼요!”
제라니아의 목소리가 살짝 튀었다. 무슨 일이 생길지 알고 틈을 주겠다는 말일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프란츠라면 아슬아슬한 선까지 목숨을 걸 것 같아 불안했다.
“이렇게 고착화된 상태보다는 그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냥 암살자면 편했으련만, 마법은 이래서 성가십니다.”
국가 차원에서 통제하는 이유를 좀 알 것 같다고 중얼거리며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확실히 편한 점이 없잖아 있긴 했으나 그에 따라오는 불편함 역시 만만치 않았다.
암살의 경우 워낙 흔적을 남기지 않는 만큼 미제에 그치는 사건이 너무 많았다. 제어구와 같이 마법을 아예 차단하는 물건이나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완벽한 방어책은 아니었다.
“결계를 쓸 줄 알았던 만큼 꼬마는 나름대로 버텼을 겁니다. 녀석이 살아 돌아왔어야 문제가 좀 더 순조롭게 풀렸을 텐데.”
아쉽다고 말하려던 프란츠는 제라니아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왜 그러냐는 듯 눈짓하는 제라니아에게 프란츠가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하는 게 좋습니다.”
“그런 거 없어요.”
제라니아는 손사래를 치며 웃었으나 푸른 눈에 도사린 의혹은 가시지 않았다. 프란츠의 시선을 피해 엉망인 제 차림새를 내려다보던 여인이 멋쩍게 웃었다.
“아무래도 옷을 갈아입긴 해야겠네요. 저는 이만 돌아갈게요.”
“잠깐.”
프란츠는 가려는 제라니아를 붙잡아 소파에 앉혔다. 드레스가 더럽다고 만류하는 말은 못 들은 척하며 그는 기꺼이 제라니아의 앞에 쪼그리고 앉은 뒤, 무릎에 양팔을 겹쳐 올려 움직이지 못하게 막았다.
시선을 낮춰 자신을 올려다보는 프란츠를 제라니아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갑자기 왜 이래요?”
“그런 얼굴로 나가면, 또 혼자 고민하고 있을 거 아닙니까.”
“제가 무슨 고민을 한다고….”
어서 말하라는 듯 엄격한 표정에 제라니아의 말이 살며시 기어들어 갔다. 억울함이 가득 묻어나는 눈빛을 보내던 제라니아가 결국 입을 열었다.
“그냥 모르는 척해주지 그랬어요.”
“모르는 척하고 싶지 않습니다.”
“국왕 폐하가 되실 몸이라 고집도 더 강해지신 건가요?”
“그것보다는, 당신을 닮아서 그런 거겠죠.”
하여간 고집 세다는 말을 돌려 말하는 그의 언변에 제라니아는 짤막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당신 팔이 무겁다는 투정 대신 생각하고 있던 것을 내어놓았다.
“핀을 구했을 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거든요.”
‘나한테 뭘 바라는 거예요?’
‘내 알량한 만족감. 내가 세상 모두를 구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너 하나쯤은 어떻게든 할 수 있으리란 자만심.’
“그게, 정말…. 어렵구나, 새삼 그런 생각이 들어서.”
핀과 만난 지는 이제 1년이 되었을 뿐이다. 이제야 살이 좀 붙었고 혈색도 좋아졌다. 그리고 아직도 무척 어렸다. 행복하기만 해도 모자랄 나이인데.
마법을 개화했음에도 신전에 가지 않고 여기 남겠다고 한 아이의 의사를 제라니아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핀의 선택인 만큼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지 말았어야 했을까. 그때 보냈더라면 아이는 훨씬 더 오래 살았을까.
터무니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알았다. 신전에 갔다면 그것대로 또 어떤 고난을 겪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낙인을 들켜 위기에 처했을 수도 있다. 인생은 그토록 한 치 앞을 모르는 것이기에.
그런데 왜 이런 후회를 하게 되고 미련이 남는지.
“사람이 사람을 구하는 게, 정말 어렵다 싶어서요. 그래도 한 명쯤은 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나는 오만했던 걸까. 자만하지 않고자 노력했다 생각했는데, 결과가 이렇게 되어버린 건 그래서일까.
‘아무리 발버둥 쳐도, 막을 수 없는 일들이 다가올 걸세. 아가씨 역시도 분명 절망하게 되겠지.’
‘그래도 멈춰 서고 싶지 않아요. 절망 속에서도 나아가는 게 인간이잖아요.’
“그렇게 선언하고 왔으니, 망설이지 않아야 할 텐데. 그게 잘 안 돼요. 자꾸 고민이 늘어가고, 그 무게만큼 망설임이 생겨요. 나아갈 수는 있는데, 자꾸 머뭇거리게 돼요. 내 각오가 부족했던 걸까요?”
프란츠는 조용히 대답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자신을 완전히 비운 뒤 한 가지만을 좇는다면 가능할 겁니다.”
“…….”
“하지만, 당신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건 아니잖습니까.”
제 속을 꿰뚫어 본 듯 나직한 음성에 말문이 막힌 제라니아를 그는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이미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러니, 너무 연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까지도 당신 탓으로 돌리다간 쓰러지고 말 겁니다.”
‘벌어지는 모든 일을 해결하고자 하지 마시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고, 모든 건 순리대로 흘러가기 마련이니.’ 무뚝뚝한 위로에 언젠가 트라이탄에서 들었던 마녀의 말이 겹쳐 들렸다.
“그래서 전하께서는,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으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