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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100화 (101/171)

제100화. 부조리 (2)

멀지 않은 곳에서 멈춰 선 핀이 손을 뻗어 허공을 매만졌다. 그의 손가락이 닿은 곳에서부터 호수에 돌을 던진 것처럼 동그란 파장이 퍼져나갔다.

“이건….”

결계잖아?

겉으로만 보면 별다를 게 없어 보이는 건물이 그의 앞에 있었다. 주변을 지나다니는 시종이나 시녀들은 아예 이 공간을 인지하지 못한 것처럼 제 옆을 스쳐 지나갔다. 존재감을 없애는 결계인 걸까.

왕궁에서 허가 없이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런데 결계라니. 음모의 냄새가 나는 것에 핀은 망설였으나, 결국 조심스럽게 결계에 손을 댔다.

상대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어린아이 하나가 겨우 지나갈 만한 틈을 만든 핀이 그 안으로 들어섰다. 열심히 마법을 익힌 보람이 이런 곳에서 빛을 발했다.

소리 없이 걸음을 내디딘 핀이 건물의 벽에 바짝 붙었다. 건물은 기이할 정도로 인기척이 없었다. 방음 결계였던 건지 결계 안쪽에서 마력의 흐름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살금살금 걸어가자 작은 창문 하나가 눈에 띄었다.

창틀을 잡고 살짝 창문 안을 들여다보던 핀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안에는 두 사람이 있었는데 누가 봐도 화려한 옷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다른 쪽의 멱살을 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가!”

격노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국왕이 벌써 죽을 리가 없는데. 설마, 너희가 벌인 짓은 아니겠지?!”

그랬으면 가만두지 않을 것처럼 그가 씨근덕댔다. 그에게 멱살이 붙들려 있던 제법 평범한 인상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시종의 복장을 한 남자의 목소리는 순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지극히 낮고 침착했다.

“저희 쪽에서도 모르는 일입니다. 원인을 찾고자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여간 천한 것들이!”

로브의 음성을 들은 순간, 단전에서부터 소름이 돋았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어디서 들었지? 핀은 기억을 급히 뒤졌다.

아무리 외진 곳이라 하나 여기는 왕궁인데 도대체 무슨 배짱일까. 신관복을 입은 게 아니니 외부에서 온 마법사일 것이다. 어떻게 왕궁 안으로 들어온 거지.

다시금 고함 소리가 들렸다. 잡았던 멱살을 내팽개치자 그가 마구잡이로 잡힌 탓에 늘어난 소매를 바지런히 정돈했다. 나이 든 남자가 역정을 냈다.

“네놈을 불러낸 이유는 알고 있겠지. 무슨 수를 써서든, 대관식 전에 왕세자를 죽여라! 그간의 노력을 모두 수포로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면!”

“걱정 마십시오. 필요한 건 전부 준비해 두었습니다.”

차분하면서도 음산하게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핀의 귓가에 울렸다.

‘이번 달은 물건의 반입이 다소 늦는군.’

아.

핀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칠 뻔했다. 원장과 이야기를 나누던 검은 로브의 남자, 바로 그자가 핀의 눈앞에 있었다.

악당은 딱 보기에도 악당처럼 생겼을 거라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도, 남자는 그냥 보기엔 더없이 선해 보였다. 신관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제게 마법을 가르쳐준 신관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윙윙 울렸다.

‘감당할 수 없이 강해 보인다면, 도망치세요.’

이성대로라면 당장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야 옳겠지만, 핀은 다시 한번 눈만 내밀어 중년 남자의 옷차림을 응시했다.

왕궁에 오는 사람 중에도 저 정도로 화려한 옷을 입는 귀족은 흔하지 않았다. 그런 귀족들은 단추 하나에도 자기 가문의 상징을 새기고는 했다.

결계 내에서는 어지간한 건 결계사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핀은 학습의 결과를 아주 조금 시험해 보기로 했다.

엄청나게 얇은 결계를 만든 핀이 아주 조금씩 그것을 창문 너머로 밀어냈다. 대화가 한창인 데다 결계를 쳐둔 탓인지 둘은 바깥에는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다행히도 서서 언성을 높이는 정도인지라 둘의 위치는 거의 그대로였다. 둘 사이의 거리가 상당한 것이 다행이었다. 핀은 결계를 아주 살짝 더 밀어냈다. 결계가 중년의 남자를 감싼 찰나, 핀은 목적한 것이 제 손바닥에 들어왔음을 느꼈다.

“거기.”

그 순간 들리는 목소리에 핀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곧장 날아오는 바람을 핀은 결계를 펼쳐 간신히 막아냈다. 온전히 막지는 못했는지 팔이 찢겨 피가 흘렀다.

누구냐고 고함치는 중년 남자와 마법사에게서 등을 돌린 채 핀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있는 힘을 다해 달음박질치던 핀의 앞에 무언가가 나타났다.

“으악!”

제 앞에 나타난 남자를 본 핀은 비명을 지르며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날카로운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핀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나풀나풀 떨어졌다.

“결계 안에서는 어지간한 건 결계사 마음대로지요.”

원한다면 순간이동도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방향을 바꿔 도망가는 소년을 마법사는 느긋이 관망했다. 그래봐야 독 안에 든 쥐라는 듯이.

있는 힘껏 뛰어가며 핀은 아주 간절히 소망했다.

살고 싶어, 살고 싶어, 살고 싶어!!

뒤에서 남자가 마구잡이로 바람을 날려 보냈다. 칼춤을 추듯 매섭게 날아오는 바람을 튕겨내기 위해 핀은 정신없이 결계를 쳤다. 몰아치는 바람은 무척이나 묵직해서 순식간에 소년을 찢어발길 것 같았다.

주변의 나무와 수풀에 칼로 베인 것만 같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그걸 막아 내면서도 핀은 어떻게든 결계 밖으로 나가고자 몸을 움직였다. 팔다리에 난 상처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며 지면을 적셨다.

소년은 있는 힘껏 결계에 공격을 가했다. 제법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한 사람 정도가 나갈 수 있는 구멍이 생겨났다. 앳된 얼굴에 환희가 깃들었다.

조금만 더 움직이면….

그러던 중, 핀의 몸이 우뚝 정지했다. 입술을 꾹 다물었던 소년이 곧 울컥 피를 토해냈다. 천천히 눈을 굴려 배를 뚫고 튀어나온 칼끝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미련하군요.”

어느새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칼을 쥔 손을 뒤로 잡아당겼다. 살을 파고들었던 단도가 빠져나오며 날에 진득하게 달라붙은 피가 비린내를 풍겼다. 핀의 몸이 천천히 바닥으로 꺼지면서 풀썩, 먼지바람이 일었다.

바닥에 쓰러져 바르작거리는 소년의 주변으로 피가 번졌다. 어떻게든 기어가려는 듯 움찔거리는 소년을 갈색 눈동자가 벌레를 보듯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마무리를 하려는 순간, 깨진 결계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에 그는 작게 혀를 찼다. 곧 사람이 올 것이다. 이 이상 일을 키울 수는 없었는지라 남자는 소년을 내버려두고 발걸음을 돌려 모습을 감췄다.

남자의 발소리가 사라지자마자 소년은 다시금 몸을 꿈틀거렸다. 배를 불로 지지는 고통과 흐려지는 시야를 끌어안고 그는 기어가기 시작했다. 흙바닥을 손으로 긁어가며 움직이다, 순간 눈앞이 핑 돌았다.

“허억, 헉….”

핀은 직감했다. 자신은 곧 죽을 것이라는 걸.

그걸 깨닫자 흐리던 시야가 더 뿌옇게 변했다. 눈물이 소년의 커다란 눈에서부터 떨어져 바닥을 검게 물들였다. 흐느끼는 소리가 짓씹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누가, 좀….”

도와줘.

꺼질 듯한 목소리로 불러도 오는 이라고는 없었다. 그러니까 그가 자신을 내버려두고 갔겠지. 손바닥을 살짝 편 핀이 꽉 쥐고 있던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언제 그 남자가 돌아올지 모른다. 이걸 뺏겨선 안 되는데.

죽기 직전이라 그런지 판단력이 다소 흐렸다. 당장의 생각 이상으로 상황을 고려할 기력이 없었다. 핀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내 결계를 펼쳤다.

흐려지는 머리로 생각했다. 그렇게 모든 게 당신 마음대로만 되지는 않을 거라고.

남자가 말한 대로 하찮은 생이었을지 몰라도, 제게는 충분하고 넘쳤다. 차오르는 미련에 눈물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소년의 눈이 힘없이 감겼다.

소년의 시체는 결계가 거둬진 뒤, 그 근처를 지나가던 시녀에 의해 발견되었다. 근처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에 의아해하던 시녀는 건물로 다가오다 피투성이로 쓰러진 소년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그 소식은 곧 제라니아의 귀에 들어갔다. 놀란 얼굴로 일어난 제라니아는 허둥지둥 저를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핀이 발견된 장소로 갔다.

소년은 눈을 감고 고요히 누워 있었다. 얼굴을 제외하고는 천이 덮어져 있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더러우니 가까이 가면 안 된다는 만류를 뿌리치고, 제라니아는 떨리는 손으로 천을 들추었다.

생기라고는 없는 얼굴과 배에 난 시뻘건 상처가 눈을 확 사로잡았다. 발버둥을 친 건지 머리와 옷에는 흙이 가득 묻어났다. 사후경직이 진행된 것인지 팔다리는 살짝 뻣뻣했고 손가락은 기이하게 구부러져 있었다.

제라니아는 무릎을 꿇고 손을 뻗어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은 몸에 억장이 무너졌다. 가만히 감정을 죽이는 제라니아의 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비전하.”

뒤를 돌아보니 이렌스가 서 있었다. 그를 따라온 듯 뒤에 서 있는 작은 실루엣을 보고 제라니아는 눈을 크게 떴다.

“아일라 전하.”

[그거, 핀이야? 왜 그러고 있어?]

아일라는 수어를 했지만 제라니아는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소녀의 수어를 읽은 이렌스가 그것을 통역했으나, 할 수 있는 말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

아직 어린아이에게 보이기는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닌가. 혹여나 상처를 볼까 핀을 끌어안은 채로 움직이지 못하는 제라니아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아일라가 입을 열었다.

“난, 괜찮아.”

“네?”

“핀도 가버린 거지? 다른 사람들처럼.”

억양 없는 뻣뻣한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하는 아일라에게 제라니아는 무엇도 말할 수 없었다. 어려 보여도 아이가 왕궁 출신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죽음도 그렇지만, 이별 역시 굉장히 많이 겪었으리라.

“…네, 그런 것 같아요.”

차분하게 대답하는 제라니아를 물끄러미 보던 아일라가 한 발을 내디뎠다. 이렌스가 손을 들어 막자, 아일라는 뾰로통하게 그 팔을 치우고 제라니아에게로 걸어갔다. 핀을 꼭 끌어안은 제라니아의 소매가 상처 부위를 가렸다.

핀의 얼굴을 조목조목 뜯어보던 아일라가 손가락으로 핀의 볼을 쿡 찔렀다. 차가운 감촉에 화들짝 놀란 아이가 뒤로 물러섰다. 아일라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제라니아는 모르는 척했다.

이쯤에서 말려야 하나 싶은 순간 소녀가 손을 뻗어 핀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의아한 얼굴로 그것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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