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부조리 (1)
국왕의 사인은 모두가 생각했던 것처럼 병도, 독살도, 심지어 암살도 아니었다.
사고였다.
곧 돌아올 건국절을 앞두고 행사를 점검하기 위해 움직이던 국왕의 주변에서 작은 지진이 일어났다. 그 지진의 여파로 굳건히 세워져 있던 프란의 주신, 펠리시에의 동상이 국왕의 머리 위로 무너진 게 화근이었다. 국왕은 물론 그를 보좌하던 시종들 역시 즉사하거나 중상을 입었다.
갑작스러운 국왕의 죽음에 사람들은 난리가 났고, 온갖 낭설이 판을 쳤다.
왕궁 내부에서는 멀쩡하던 동상이 갑자기 무너진 것부터 수상하다는 의견이 종합적이었으나, 신전에서는 신께서 노하신 것이라며 이 모든 게 신의 사도들을 핍박해서라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내밀었다.
왕국에서 신전의 영향력이 크다는 걸 손수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신의 노여움이라는 말 아래 수많은 국민들이 두려움에 떨었고, 신전을 향한 핍박을 멈추어 달라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었다.
왕세자의 신분으로 국왕 대리를 맡은 프란츠는 신속하게 그 상황을 정리하고자 움직였다.
재빨리 사건의 양상을 정리해 대대적으로 공표한 그는 문제의 여지가 어떤지 신속히 알아보겠다는 다짐 역시 내비쳤다.
또한 백성들 사이에 섞여 의견을 선동하는 바람잡이를 잡아내기 위해 병사를 풀었다. 그럼에도 여파는 쉽사리 수그러들지 않았다.
바이첸 공작은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자리에 드러누웠다. 아무리 그라도 육십이 다 된 노인인 만큼 주군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타격을 크게 받은 모양이었다.
“동상이 세워져 있던 장소에 마력의 흔적이 있었다고는 합니다. 다만,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마법을 다소 사용했었는지라 신관들도 아주 확신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보고를 들은 프란츠가 짓씹듯이 내뱉었다.
“가지가지 하는군.”
국왕이 죽은 후로 그는 제대로 쉬지 못했다. 재상까지 쓰러져 두문불출하고 있는 탓에 그 모든 업무를 감당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맡고 있던 기구가 꽤 안정된 데다, 아직 세금을 걷는 기간도 아닌지라 비교적 한가한 이렌스가 그를 보좌하기 위해 차출되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그의 안색은 별로 좋지 못했다. 피곤한 건지 텅 비어 있는 새파란 눈동자가 기묘한 이질감을 자아냈다.
“바이첸 공작은.”
“아무래도 꾀병은 아닌 듯합니다.”
“…이 중요한 시기에 그럴 성격은 아니지.”
오늘 어전 회의에서는 대관식을 서둘러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왕비와 후작의 편인 이들이 극렬하게 반대 의견을 표했으나, 이 중요한 시기에 왕좌를 오래 비울 수 없다는 의견을 꺾지는 못했다.
바이첸 공작의 자리는 공석이었지만 공작 대리로 참석한 그의 아들 프레드릭이 찬성을 표했고, 사건을 듣고 오랜만에 수도로 올라온 그라시아 공작 역시 대관식에 손을 들어주었다. 휴스타인 공작은 침묵했고, 케라온은 불참했다.
“건국절 행사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연기하도록 해라. 이렇게 된 거 대관식과 함께 진행하는 게 손이 덜 가겠지. 준비에 얼마나 걸릴 것 같나?”
“국장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건 무조건 대관식 이후로 미루도록. 사흘이면 될 거다.”
“예, 알겠습니다. 대관식까지는 대략 보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보름이라….”
“죄송합니다. 장내가 혼란스러워 그 이상 시간을 당기기는 어려웠습니다.”
이렌스는 진심으로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수습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다 보니 그럴 법도 했는지라, 프란츠는 덤덤히 고갯짓을 했다.
그는 제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도장 형태의 국새와 동그란 보주에 힐끔 시선을 두었다. 왕국의 상징이 정교한 선으로 새겨져 있는 금빛 보주가 창문을 타고 넘어온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보름이라.
“아주 긴 시간이 되겠군.”
죽지 않고 살아남아야 권력을 쥘 수 있다. 데릭도 그렇지만 후작 쪽에서 자신에게 순순히 권력을 넘겨줄 리 없었다. 숱하게 많은 사선을 넘나들었지만 아마 이번 보름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험난한 시간이 되리라는 걸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제발 몸조심하십시오.”
제법 무뚝뚝했지만 진심이 담긴 진언이었다. 프란츠는 이렇다 할 대꾸 없이 손거울을 만지작거렸다. 티레인의 얼굴이 나타나자마자 지시를 내렸다.
“국왕을 죽인 범인을 찾아라. 가급적 신전의 눈을 피해서. 위험한 일이니 신관들을 데려가는 걸 허가한다. 명단은 이렌스에게서 받도록.”
- 예, 알겠습니다.
대답을 듣자마자 거울을 덮어버리는 프란츠의 손길이 꽤나 신경질적이었다. 그런 주군을 걱정스레 바라보면서도 이렌스는 조용히 되물었다.
“역시, 타살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누가 봐도 타살이지 않나. 아마 경고일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국왕조차 죽일 수 있다는 거겠지.”
“신전일까요. 감사법의 발안이 코앞이지 않습니까.”
“아니면, 그 마법사의 끄나풀일 수도 있고.”
“어느 쪽이건 참 성가시기 짝이 없겠군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하는 그를 말없이 바라보던 프란츠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비한테도 몸조심하라 이르도록.”
“여부가 있겠습니까.”
“지금은 뭘 하고 있던가.”
“지금은 아마, 감독관들이 보내신 보고서들을 읽고 계실 겁니다. 대놓고 말씀은 안 하시지만, 공작 각하께서 쓰러진 걸 신경 쓰고 계신 것도 같았습니다.”
“…가겠다면 보내주도록 해라. 차라리 바이첸 공작저가 더 안전할 수도 있으니.”
프란츠의 손가락이 나무 책상 위를 느릿한 속도로 두드렸다.
“왕위라…….”
어리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계속 쫓아왔던 왕좌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기뻐야 할 텐데. 마땅히 그래야만 하거늘 그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저, 마음이 이상하게 허했다.
“예, 한번 여쭤 보겠습니다.”
눈치 없는 이렌스의 목소리가 상념을 깨치고 들어왔다. 책상을 두드리던 것을 멈추고, 프란츠는 불쑥 질문했다.
“제라니아가 마음에 드나?”
이렌스는 아주 살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상사가 제 아내가 어떠냐고 묻는 건 이유가 뭘까. 그것도 이 분위기에서. 혹시 자랑을 하려는 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이?
미치도록 어색했다.
“비전하께서는 총명하고 성품이 느긋한 분이십니다. 명민하신 만큼 지시도 확실하시고, 윗사람으로 섬기기에 마땅한 분이죠.”
의아하게 생각하는 머리와 달리 입은 술술 움직였다. 딱히 거짓을 보탤 문제가 아니기도 했다. 몇 달간 같이 일해본 결과 제라니아는 정말로 그런 사람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제 주군보다 낫기도 했다.
“그래, 잘되었군.”
평소와 같이 무심한 어투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묘하게 싸한 느낌이 들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말을 이렌스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전하, 전하께서는 제가 따르기로 정한 주군이십니다.”
“그래.”
새삼스럽게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듯, 가늘어지는 푸른 눈동자를 보며 그가 냉큼 답했다.
“제가 아무리 막돼먹었단 소리를 심심찮게 듣고 있다 하나, 주군을 쉽게 갈아치우는 이는 아닙니다.”
프란츠를 섬기게 된 지 올해로 10년이 되었다. 열아홉의 나이에서부터 스물여덟이 된 지금까지 그를 지켜봐 왔다.
그 기간 동안 놀랍도록 무감정하던 열다섯의 소년은 이제 스물넷의 청년이 되었다.
키가 좀 컸고, 결혼을 했다는 걸 제외하면 소년은 제 기억 속의 모습과 그리 달라진 점이 없었다.
주군의 이런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더없이 합리적이고 냉정한 자라 생각했는데, 지금의 그는 차라리 감정적이라는 말이 잘 어울렸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퍼져나가는 불길함을 아주 짓누르지는 못했다.
그의 탁월한 직감은 지금 이 상황이 뭔가 잘못되었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알고 있다.”
“그런데 왜 그런 불길하기 짝이 없는 소리를 하십니까. 전하께서는 아직 살날이 창창하신 데다 두 분 사이에는 아직 이렇다 할 후사도 없지 않으십니까.”
꼭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간언을 프란츠는 냉정히 물리쳤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은 간다만, 그럴 일은 없다.”
단언하는 목소리에 안도해야 하건만 도리어 심란해지는 건 어째서일까. 그런 속내를 내색하지 않은 채로 이렌스는 인사를 마치고 방을 나섰다.
그림자처럼 저를 따라붙는 생각을 떨쳐내듯, 그의 발걸음이 바삐 움직였다.
갑작스럽게 국왕이 서거한 이후, 왕궁 내의 분위기는 가히 엉망이었다. 왕자비의 죽음 때보다도 훨씬 가라앉아 있었다. 떠도는 소문 역시 그 분위기에 한몫을 했다.
암울한 기운이 깔린 와중에도 모두가 각자 맡은 일을 하고자 기계 속의 부품처럼 움직였다.
핀도 그중 하나였다.
대개 시동들은 나이가 어린 만큼 왕궁 내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도맡곤 했다. 물건을 전하는 심부름을 마친 뒤 핀은 기분 좋게 햇볕이 내리쬐는 길을 걸어갔다. 제법 외진 곳이라 으스스할 법도 한데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변의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을수록 더 씩씩하게 움직이는 건 그의 습관 같은 거였다.
고아원에서부터 그랬다. 핀은 간만에 그곳을 회상했다.
좋은 가문에서 일하게 됐다고, 입양되었다고, 그렇게 하나둘씩 사라진 이들은 소식 하나 보내오지 않았다. 이상하다는 말을 꺼내자 동의하는 의견과 우릴 잘 키워준 원장님을 의심하는 거냐고 반발하는 의견으로 갈렸다.
하지만 의심하기 시작하니 이상한 점이 많았다.
이곳에 들어올 때 모두의 등에 동일하게 새기는 동그란 그림도 그렇거니와 허락 없이 고아원을 나가면 엄청나게 혼나는 것도 그렇고, 소식을 보내겠다 말한 이들에게서 단 한 번도 연락을 받은 적이 없었던 것 등.
원장님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무뚝뚝하긴 했지만 최소 꼬박꼬박 식사를 챙겨줬고, 아플 땐 곁에 앉아 간호해 주기도 했으며 가끔씩은 선물을 건네기도 했다. 때문에 고아원의 친구들은 원장님을 믿고 따랐다.
친구들을 또다시 보내기 전날, 설마 싶으면서도 확신을 얻고 싶어서 원장실 한구석에 조용히 숨어들었다. 원장실의 문이 열리고 로브를 입은 사람이 그를 따라 들어왔다.
처음에는 물건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줄 알았다. 곧, 그게 물건이 아니라 우리를 뜻하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소름이 전신에 내달려 입을 손으로 틀어막아야 했다.
날이 밝고 난 뒤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꺼냈으나 다들 믿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애한테 다른 친구가 여길 나가 어디로 가냐고 물었다. 아무도 그에 대답하지 못했다.
무작정 나갈 수는 없었다. 여길 나가더라도 갈 곳이 없었으니까. 우리는 고아였고, 원장님이 길거리에서 주워 온 비렁뱅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여길 나가면 다시 길거리 생활을 해야만 했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그에 반발했다. 그들은 확실하지도 않은 일로 기껏 찾아낸 보금자리를 잃을 수는 없다 여겼다. 핀은 친구들의 마음에 공감하면서도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꺾지는 못했다.
어느 날부터 건물 주변에 칼을 찬 남자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불안해하는 아이들에게 원장님은 나쁜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해 온 아저씨들이라 얼버무렸지만, 나를 포함한 몇몇 아이들은 그들이 우리를 감시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도망갈 시도를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붙잡혀 왔을 때는 죽기 직전까지 맞았다. 독방에 가둬져 이틀 동안 물조차 마시지 못했다. 원장이 나를 주의 깊게 살피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 날은 날씨가 좋았고, 놀러 나간 아이들과 달리 아픈 척 방에 남아 원장실의 옆방으로 몰래 들어가 안쪽의 대화를 정탐하고 있었다. 안에서 원장과 더불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고, 귀를 기울였다.
대화의 요지는 곧 목표들이 이 도시에 도착할 거라며 살수들을 보내라는 지시였다. 알겠다는 대답을 남기는 원장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뛰었다.
살수라면 아마 이 건물을 지키는 남자들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저 말대로라면 곧 그들이 이곳을 잠시 비우게 된다.
기회라고 생각했다. 다른 친구들에게 곧바로 가 알렸으나 대체로 부담스러워했다. 결국 몇몇의 친구들만이 나와 뜻을 함께해 도주를 시도했다. 뭉쳐 있으면 눈에 띄니 각자 흩어지기로 했다.
무작정 큰길로 향해 나아가며 믿지도 않는 신에게 빌었다. 제발 나를, 우리를 이 지옥에서 구해달라고.
“…어라?”
같이 도망친 친구들은 어떻게 됐을까, 그런 생각이나 하며 걷던 핀은 곧잘 흘러가던 공기의 흐름이 끊겨 있는 느낌을 받고 눈을 깜빡거렸다. 그는 아주 천천히, 홀린 듯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