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화. 폭풍의 눈 (6)
당연히 돌아올 소리였기에 그는 태연했다. 그라면 보자마자 어떤 설계인지 알아챌 줄 알았다. 부하를 기가 찬 얼굴로 쳐다보는 벨루인의 얼굴에 근심이 들어찼다.
‘이걸 진심으로 기획할 생각인가, 자네는.’
‘민생 안정에 필요한 일입니다.’
‘그래. 잘된다면 분명 획기적인 일이 될 걸세. 그리고, 귀족의 세력이 약해지는 만큼 왕권이 강화되겠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이렌스는 잠자코 상관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참 말이 없던 그가 손가락으로 책상에 의미 없는 문양을 그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떤 누군가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쥐여주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고뇌하는 벨루인을 이렌스는 무심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상관은 자신을 특이하다고 하지만 이렌스가 보기엔 그 역시 만만치 않았다. 고위 귀족인데도, 자신이 보게 될 손해보다 그런 걸 먼저 걱정하다니.
‘때에 따라 다르겠지요. 지금은 기승을 부리는 자들을 쳐낼 때입니다.’
‘부작용을 염려하는 거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 저희가 존재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국가의 안녕을 보필하기 위해 관직에 오른 것이 아니었냐는, 더없이 원론적인 이야기가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어려운 일을 더없이 간단한 것인 양 말하는 이에게 벨루인은 허탈한 미소를 내보였다.
‘언제나 말하지만, 용케 목이 붙어 있군. 자네는.’
‘보존할 만하니 보존되는 거겠지요.’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드는 부하를 슬쩍 올려다보던 벨루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꽤나 젊은 나이였음에도 장관직을 맡은 이후 늘어가는 미간의 주름을 꾹꾹 문질렀다.
‘실수해선 안 돼.’
‘알고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완벽하나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는 일이야.’
‘그 정도 변수를 제어하지 못할 정도로 무능하진 않습니다. 장관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손이 더 필요하긴 하겠지만요.’
제라니아를 영입할 것을 제안하는 이렌스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한층 조심스러웠다. 반박을 각오하고 했던 말이건만 뜻밖에 벨루인은 선선히 등을 밀어줬다.
‘…자네 같은 괴짜가 한 명이 아니었다니.’
라는 말을 남기고.
벨루인이 어전에서 이 법을 발의했을 때, 의견은 반으로 갈렸다. 꽤 논쟁이 일었다고 했으나, 토지세의 감면을 내걸자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로 흘렀다.
바이첸 공작은 법을 보고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지도 않았지만, 묵직하게 회의의 중심을 잡았다. 벨루인의 말로는 ‘이미 모든 것을 다 눈치챘지만 조마조마해하는 이쪽을 즐기듯 구경하는 너구리의 시선’이었다고 했다.
법의 원만한 도입을 위해 새로운 기구를 창설하고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이렌스의 천거하에 재정부에서 열심히 일을 하던 노예, 아니 관리 몇이 이쪽으로 옮겼다.
이렌스는 이 법에 관한 서류를 보여줬을 때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던 이들 위주로 끌고 왔다 했다. 그들은 투덜거리면서도 내심 뿌듯해 보이는 얼굴로 순순히 자료를 받아 들었다.
국왕은 제라니아가 이 일에 관여하는 것을 퍽 관대하게 승인했다. 저번 사건 때 긍정적인 인상을 준 걸까. 다행이라 생각하며 제라니아는 기꺼이 편승하기로 했다.
일단 이 집단의 지도자는 이렌스로 되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가장 높은 상관 대접을 받는 건 제라니아였다. 모두들 그 사실을 별다른 이의 없이 받아들였다. 누군가 더 관여했으리라는 걸 모두가 서류를 본 순간부터 짐작했으므로.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제라니아의 말을 듣자마자 모두들 종이와 책을 내려놓고 쭉 기지개를 켰다. 하나둘씩 물건을 정리하고 자리를 떠나는 이들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서산 너머로 떨어지기 시작한 태양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웃고 있는 프란츠의 얼굴이 그가 들고 있는 와인잔에 아른거렸다.
파티를 즐기는 이들의 면면은 평소와 같았다. 제게 말을 거는 젊은 귀족에게 그는 제법 호의 있게 답했다. 매력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주변으로 사람이 몰려들었다. 귀찮을 법한데도 프란츠의 얼굴에 덧씌워진 미소는 견고했다.
핏줄을 크게 따지는 만큼이나 사교계의 무리는 세 갈래로 나뉘었다. 오래전부터 왕국에 뿌리를 내린 귀족들과 트라이탄이나 클라단 출신 귀족들, 전쟁 이후로 작위를 받았거나 돈을 주고 작위를 산 신생 귀족들이었다.
지금 프란츠가 대화를 나누는 이들은 두 번째 무리에 속했다. 재판 이후로 데릭과 휴스타인의 관계가 틀어진 건 사실인지, 진영이 혼란스러운 게 눈에 잘 보였다.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프란츠는 바로 그 틈을 파고들기로 했다. 덕분에 제라니아를 데리러 갔던 날을 제외한 몇 주는 무척 바쁘게 움직여가며 사람들을 포섭했다. 투자한 시간이 헛되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대충 이야기를 끝낸 다음 프란츠는 시선을 느끼고 옆을 돌아보았다. 짙붉은 색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가진 젊은 청년이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기사 가문 출신답게 꼿꼿이 등을 펴고 서 있는 이의 얼굴을 프란츠는 잘 알고 있었다.
유진 에스파. 그는 일곱 명의 후작들 중 가장 젊었고, 6년 전 고작 19세의 나이로 소후작이 되었다.
왕실이 내리는 작위를 받는 걸 거부했던 다른 클라단의 영주들과 달리 유일하게 작위를 받은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가 왕국과의 싸움에서 장렬히 싸우다 전사한 것을 생각하면 의외로운 행보였다.
제법 수완은 있는지 청년은 사교계에 진출한 이후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 증거로 그의 곁에는 여러 귀족들이 서 있었다. 제게 영문 모를 시선을 보내는 그를 보며 프란츠는 생각에 잠겼다.
그는 귀족들과 가급적 원만하게 지냈으나, 그러면서도 꽤 견제하는 인물들이 있었는데 유진 에스파는 그중 하나였다.
어쨌거나 클라단은 왕국 입장에서도 여러모로 말썽인 땅이었고, 케라온 공작도 공작이지만 유진의 행보는 특히 종잡기가 어려웠다. 충성스러운 신하였던 아버지와 달리 케라온 공작과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것도 그랬다.
평소라면 그냥 조용히 외면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립하는 것만이 길은 아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상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프란츠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유진의 앞에 섰다. 그보다 한참 작은 청년은 갑자기 다가온 프란츠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며 미소를 짓고 있을 따름이었다.
프란츠는 악수를 권하듯 손을 내밀었고, 그걸 보고서야 유진은 살짝 놀란 듯이 눈을 깜빡였다. 천천히 올라온 유진의 손이 프란츠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붉은 기가 도는 갈색 눈동자가 환하게 빛났다.
* * *
오랜만에 온 서점은 꽤나 시끌벅적했다. 여전히 책의 가격이 그렇게 싸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수도라 그런지 카암에는 곳곳에 규모가 큰 서점이 자리했다. 여기는 평민들도 주로 이용하는 장소로, 왕세자비가 되기 전엔 그 역시 자주 왔었다.
간만의 외출이었다. 코델리아가 신간을 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제라니아는 그걸 핑계 삼아 궁을 나섰다.
셀리나의 일은 여러 가지로 큰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제라니아는 자신의 위치를 다시 한번 실감했다. 왕세자비라고는 하지만 그가 가진 힘은 대체로 프란츠를 기반으로 했다. 그를 제외하면 제라니아는 가진 게 없었다.
결혼할 때 제법 넓은 영지를 지참금으로 상속받기는 했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게다가 결혼한 이상, 법적으로 제가 가진 영지의 우선권은 남편에게 있었다.
그러니, 독립적으로 제 세력을 키울 필요가 있었다. 가만히 앉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고민 끝에 제라니아는 제가 참석했던 모임처럼 특별한 ‘살롱’을 만들자는 발상을 떠올렸다. 단, 참석자를 전부 여성으로 제한하는 것으로. 남성들을 위한 살롱은 이미 충분히 많았다. 자신과 같은 여성들을 위한 장소가 필요했다.
공작저로 왔던 이유 중 하나는 자매들을 만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둘은 흔쾌히 돕겠다 말하면서도 제라니아의 얼굴을 보더니 걱정스레 말했다.
‘너 요새 잠은 제대로 잤니?’
‘언니,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아?’
무리하지 말라고 얘기하는 것에 괜찮다고 웃어 넘겼지만 괜히 뜨끔했다. 익숙하고 편한 장소에 돌아와서 그런지 표정이 풀어진 모양이었다.
프란츠 앞에서도 이러면 안 되는데,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만큼이나 그 역시 걱정이 태산일 텐데.
“저기 있네.”
오늘 제라니아는 장식이 거의 없는 베이지색 드레스를 입었는데, 이는 신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기사들 역시 평범한 옷차림을 하고 제라니아의 주변에 조용히 서서 대기했다.
일렬로 꽂혀 있던 책들 중 하나를 꺼내 들던 제라니아의 어깨에 누군가가 와 부딪혔다. 그 충격으로 책을 떨어뜨리자, 상대가 깜짝 놀랐는지 허둥지둥 허리를 굽혔다.
“아,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책을 주워 건네며 상대는 제라니아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왜 저렇게 보지 싶어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찰나 남자는 입을 열었다. 겨우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가 제라니아의 귓가에 스며들었다.
“혹시…. 페르타?”
그 한 마디에 제라니아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
모임 페르타. 그 이름을 어찌 잊겠나. 가면 뒤에 진짜 자신을 숨기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던 장소.
모르는 척을 해야 했는데, 바깥에서 그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지라 그만 시기를 놓쳤다.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당신도?”
고개를 끄덕이는 이를 보며 제라니아는 목소리를 낮췄다. 왁자지껄한 주변의 목소리들이 둘을 감싼 장막이 되어주었다.
“어떻게 알았죠?”
“목소리.”
남자가 하는 말을 제라니아는 바로 이해했다. 참석자 중에 여성이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 인상에 남을 법도 했다. 하지만 그 역시 당연히 모른 척할 줄 알았는데.
“유독 기억에 남아서, 저도 모르게.”
규칙을 깨서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다 약속하는 남자의 생김새는 제법 날카로웠다. 옷차림이 꽤 고급스럽고 깔끔한 것을 보아 제법 괜찮은 집안의 자제일 것 같았다.
다행히도 제 얼굴까지는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다. 하긴, 모임에 참석하는 이들은 대개 정치와 거리가 멀었다. 주류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이들이 가면을 쓰고 자신의 속내를 토로하는 곳, 모임 페르타는 그런 장소였으니까.
“여인이라서가 아니라, 당신이 가진 생각이 인상 깊었습니다. 아마 다른 참석자들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겠죠.”
제 생각을 꿰뚫어 봤다는 듯 대꾸하는 음성에 제라니아는 웃고 말았다. 고맙다고 말하는 제라니아를 보며 남자는 이제 모임에는 나오지 않는 거냐고 물었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이 생겨서요.”
“아쉽군요.”
바람 빠진 목소리에는 진한 아쉬움이 담겨 있었지만, 제라니아는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몇 마디를 가볍게 나눈 뒤 제라니아는 책을 가져가 계산을 했다. 아직 살 게 남았다며 작별 인사를 건네는 남자에게서 아주 작은 한탄이 흘러나왔다.
“나라가 바뀌긴 할까요.”
서점 밖으로 나서려던 제라니아가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봄바람을 연상시키는 부드러운 미소가 여인의 입가에 머물러 있었다.
“바뀔 거예요.”
비밀이라는 듯, 입술 위에 검지를 올려 웃은 뒤 제라니아는 서점을 나섰다. 밖으로 나서는 경쾌한 발걸음을 남자는 홀린 듯이 쳐다보았다.
그해 겨울은 무척 추웠다.
여러 정치적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몇 가지 사소한 일들과 커다란 일들이 한 계절을 따라 내리 이어졌다.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 살롱, 세레니티가 만들어지자 많은 귀족 여성들이 그에 관심을 보였다. 살롱의 중심인물들이 사교계에서 쟁쟁하게 이름을 휘날리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여인들이 살롱의 멤버가 되고 싶다는 의지를 내보였으나, 살롱이 받아들인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 멤버는 고위 귀족에서부터 한미한 남작가의 영애, 평민 출신의 여성까지 다양했다.
기준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살롱 측은 말을 삼갔다. ‘우리는 배우고자 하는 이들과 소통하고자 합니다.’ 그 말만을 남기고서.
그리고, 신전은 끝내 마법사를 잡지 못했다. 국왕은 단언했던 대로 신전에서 면세 혜택을 거두기로 하고, 그 감사를 아이작 바이첸에게 맡겼다. 그를 모시던 시종은 재상님이 그토록 신나 보이셨던 적이 없다며 후에 회상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찬연한 봄이 돌아왔을 때-.
“국왕 폐하!”
“꺄아아악!”
“사람, 사람을 불러라!”
켄드릭 리나엔이 급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