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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97화 (98/171)

제97화. 폭풍의 눈 (5)

일이 대충 마무리되자마자 핀은 곧장 이렌스를 찾아갔다. 그는 무서웠지만 여차할 때는 무척 든든한 존재였다.

소파에 앉아 있는 핀의 앞으로 따뜻한 차가 담긴 머그컵이 놓였다. 그가 우린 차는 무척 맛있었다. 슬금슬금 찾아가 눈치를 보고 있으면 남자는 귀찮다는 듯 한숨을 쉬면서도 차를 타 주었다.

그게 신기했다. 제가 본 어른들은 원장님을 제외하면 대체로 아이를 귀찮아했다. 보통이었다면 왜 그렇게 쳐다보고 있냐며 발길질이 날아왔을 것이다. 세상 모든 어른들은 다 그런 줄 알았는데.

귀족에 직위도 높다 들었는데, 제 신분이 비천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남자에게서는 경멸하는 기색이 없었다. 저렇게 만사를 귀찮아하면서 시중드는 사람을 두지 않는 게 남자의 신기한 점 중 하나라고 생각하며 핀은 차를 홀짝거렸다.

상황을 전부 들은 이렌스가 단언했다.

“마법이군요.”

“네?”

콜록, 마시던 차를 저도 모르게 뱉을 뻔했다. 지금 내가 뭘 잘못 들은 걸까. 이렌스는 아주 친절하게 다시금 강조했다.

“마법이라고요. 들어보니 당신 특기는 결계인 모양이군요.”

“결…계요?”

처음 듣는 말에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었다. 물론 그가 혼란스럽든 말든 이렌스가 알 바 아니었다.

“뭐,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은 건 잘했습니다. 덕분에 당신에게도 선택권이 생겼으니.”

“선택… 권이요?”

“신전으로 가 사제가 될지, 여기에서 계속 시종으로 남을지.”

결정하세요.

이렌스는 심드렁히 말했다. 마치 오늘 간식으로 스콘을 먹을지 케이크를 먹을지 고르라는 듯 무료한 어투였다. 인생의 기로를 정하는 중요한 선택도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니 별것 아닌 것처럼 보였다.

잠시 휘말릴 뻔했던 핀은 곧 마음을 다잡았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자 이렌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낙인이 있다는 걸 들키지만 않을 수 있다면, 신전으로 가 사제가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다른 건 몰라도 마법사에 대한 대우 하나만은 확실하게 하는 집단이니까요.”

“저는…. 문제가 끝날 때까지 놓아주실 수 없는 게 아니었나요.”

왜 갑자기 자신을 신분까지 속여가며 시종으로 데려온 건지, 그 답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핀은 둔하지 않았다. 제가 어쨌거나 이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최선을 다해 이용될 자신도 있었다.

“낙인도 그렇거니와 제가 이 사건에 관련된 누군가를 기억하고 있을지 몰라서, 절 데려오신 거라고 생각했는데.”

“뭐, 그건 그렇지만.”

이렌스는 구태여 부정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필요한 걸 다 얻기도 했거니와, 신고되지 않은 마법사를 데리고 있는 건 어쨌거나 불법입니다. 당신이 신전에 들어가더라도, 필요할 때 불러내는 식으로 바꿔도 상관은 없으니까.”

필요하다면 불법 합법을 따지지 않는 남자가 뻔뻔하게 말했다. 핀은 어이가 없었다. 자신의 신분을 조작한 건 불법이 아니었단 말인가?

“아무튼 선택권을 주겠다는 겁니다.”

흔한 기회가 아니니 제대로 생각하라고 덧붙이는 그를 핀은 멀뚱히 쳐다보았다.

“…제가 여기 남고 싶다면 그것도 가능하단 건가요?”

“힘을 제어하는 법을 따로 배우긴 해야겠지만.”

소년은 즉각 대답했다.

“여기 남고 싶어요. 무슨 일이든 할 테니, 여기 남을 수 있게 해주세요.”

“이유는?”

“제가 지금의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건 비전하 때문이니까요.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보은이야 신전에 들어가더라도 충분히 할 수 있을 텐데요.”

“…지금이 좋아요.”

핀은 지금의 생활이 무척 좋았다. 굶주리지 않고, 맞지도 않고,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열심히 제 할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나날이.

갑자기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니, 시작도 전에 벌써 겁이 났다. 이제 겨우 친해진 사람들이 생겼는데, 아일라 전하께서도 전보다는 자신을 꺼려하지 않는 것 같았고.

지금 쌓아둔 것들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좋습니다. 그러면, 일단 마법을 가르쳐줄 사람부터 구해야겠군요. 당신은 이제 막 능력을 개화했을 뿐이니 평소에는 제어구를 차고 있는 게 좋겠습니다.”

주로 은색 팔찌의 형태이긴 했으나 제어구 역시 종류가 다양했다. 팔찌의 형태로 만들면 눈치 못 채겠지. 가만히 궁리하는 이렌스의 앞에서 핀은 느릿하게 남은 차를 마시며 발을 동동거렸다.

핀을 보낸 다음 이렌스는 터벅터벅 걸어 행정부로 향했다. 복도 끝에 마련된 문을 열어젖히자, 커다란 테이블 하나를 가운데 두고 잿빛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토론 중이었는지 왁자지껄하던 분위기가 일순 정지하고, 여러 쌍의 시선이 열린 문으로 향했다. 그 중심에 서서 서류를 살펴보고 있던 제라니아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와요, 이렌스. 오늘은 좀 늦었네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이렌스는 제라니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곧장 필요한 서류를 동료에게 넘겨받은 그가 그것을 읽어내렸다. 한참 남은 자료들을 살펴보던 그가 나직이 말했다.

“동부 지역 자료는 이게 다입니까? 너무 적은데.”

“그쪽 귀족들이 아무래도 좀 음습하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투덜거리는 이에게 이렌스는 조금 더 끈질기게 알아보라 말하고 제라니아를 돌아보았다. 평소의 차분함을 생각하면 놀랄 정도로 생기발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하께서 이걸 보셔야 하는데.

속으로만 중얼거리며 이렌스는 다시금 논의에 집중했다.

프란츠와 화해하고 세자궁으로 돌아온 뒤, 제라니아는 곧바로 집무실에 프란츠를 비롯한 가신들을 불러 모았다.

‘새로운 법을 만들 거예요.’

세자궁을 나가 있던 동안 마냥 시간을 보낸 게 아닌지 체계는 어느 정도 완성되어 있었다. 빠르게 종이를 훑어 내린 프란츠가 이렌스를 흘겨보았다. 너도 거들었냐며 눈치를 주는 시선을 이렌스는 슥 외면했다.

‘귀족에 집중해서 고민을 하니까 해결책이 안 떠오른 거죠. 사실 영지를 이루는 건 엄밀히 따지면 농노들인데.’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하긴 했었다. 외부에서 후려치는 것보다는 내부에서 무너지게 하는 게 정답일지도 모르겠다고.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는 옷깃을 여미지만, 쨍쨍한 햇빛에는 옷을 벗는 나그네처럼.

‘무엇을 할 생각입니까?’

‘장원을 무너뜨리려고요. 언젠가는 무너질 게 분명하지만, 그 시기를 조금 앞당길 거예요.’

전반적인 개혁을 하기 위해서는 귀족들만 잡아서는 안 되었다. 그들과 유착하고 있을 신전 역시 잡아야만 했다. 사실 두 번째가 더 어렵기는 했다.

계획은 우선, 모든 노동에 ‘무조건’ 일정 비율의 세금을 걷는 새로운 법을 제정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당연히 귀족들이 반발할 것이고, 협상을 위해 토지세를 다소 줄이고 노동력의 주체에 붙는 세금은 제외하기로 했다.

즉, 영주의 소유물로 취급되어 농노에게 붙던 세금이 노동 자체에 부과되는 식이었다.

단기적으로는 귀족에게 유리해 보였지만, 영주들이 그간 잉여 노동에 보수 없이 농노들을 차출하던 걸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이 법에서 중요한 점은 세금을 걷자면 농노들에게 그만한 봉급을 주어야 한다는 거였다.

고로 장기적으로 가면 귀족들의 지출이 토지세의 줄어드는 부분을 한층 상회할 것이다. 그 비율 선정을 하려면 다른 영지에서 보낸 보고서들을 총합해 값을 추산해야 했다. 만만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이 부분은 이렌스의 힘을 빌렸다.

그냥 끓는 물에 개구리를 넣으면 깜짝 놀라 뛰쳐나오겠지만, 천천히 예열하기 시작하면 위험한 줄 모르고 그대로 죽게 된다지 않던가.

감시만 잘된다면, 아마 못해도 3년 안으로 어지간한 귀족들은 적자에 허덕이게 될 것이다. 농노에게 급여를 주려면 다른 쪽에서 예산을 줄여야 했는데, 사치에 익숙한 귀족들이 자기들이 쓸 돈을 줄일 리가 없었다.

그럼 그 돈을 어디서 줄이겠는가. 뻔했다. 농노 다음으로 만만한 게 바로 사병인 만큼 사병에게 주는 봉급을 줄일 것이다. 불만이 속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지의 재정이 무너질수록 귀족들은 농노를 버겁게 느낄 것이고, 농노들 역시 영주의 태도에 불안해할 것이다. 도망치는 이들 역시 늘어나겠지. 그럼 그들은 어디로 도망갈 것인가.

아마 도시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들에 국세 비율을 늘리는 대가로 상비군 주둔을 정식으로 허락하는 특허장을 발부하기로 했다. 이는 도시의 치안을 한층 더 튼튼하게 해주는 것과 동시에 그들의 세를 키워줄 교두보가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신전에서는 연락이 없나요?”

“아직 찾지 못한 모양입니다.”

마법사 하나를 잡지 못하고 헤매는 신전이 무능한 걸까, 그걸 다 떨칠 만큼 그 마법사가 유능한 걸까.

그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그들이 범인을 찾아오지 못하면 일은 더 수월해지겠지만…. 비전하께서는 내키지 않으시겠지요.”

범인을 찾지 못하면 신전은 그간 가졌던 면세 혜택을 내놓아야 했다. 퍼즐 조각이 들어맞는 것처럼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세금 면제가 사라지면 수익을 보고해야 하니 합법적으로 감사를 붙일 수 있었다.

신전에서 항의하긴 했지만, 그만큼 큰 사건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수긍하는 눈치였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적절하게 써먹은 셈이다.

적어도 국왕의 머리에서 나온 책략은 아니겠지. 그의 옆에 붙어 있는 아버지, 아이작을 떠올리고 제라니아는 멋쩍게 웃었다.

다들 웃어넘기는 가운데, 주근깨 가득한 볏짚 머리칼의 청년이 소심하게 말했다.

“잘될 수 있을까요.”

“되게 해야지요. 약한 소리 할 시간이 아깝습니다.”

이렌스가 따끔하게 말했지만, 남자는 주눅 들기는커녕 그를 붙잡고 무엇이 걱정되는지를 줄줄이 늘어놓았다. 그걸 일일이 다 받아치고 있는 이렌스도 만만치는 않았다.

귀족들의 재정을 파탄 내어 국고를 채우는 것은 중간 목적일 뿐이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 몇 년 뒤에 노예제 폐지를 공언할 예정이었다. 물론 그 역시 점진적으로 진행할 예정이나 아직은 논의할 단계가 아니었다.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신 뒤 발표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나무는 숲에 숨기라고 하지 않나요. 여기서 더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죠. 지금은 국왕 폐하의 그늘에 숨을 때라고 봐요.’

제라니아는 이렌스에게 계획의 발표를 맡겼고 이렌스는 곧장 그의 상관을 찾아갔다. 재정장관 벨루인 폴리에트는 받아 든 계획서를 다 읽고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미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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