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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96화 (97/171)

제96화. 폭풍의 눈 (4)

“나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 당신이 거기까지 생각해야 하는 겁니까.”

범인은 따로 있고, 인과관계를 따져봐도 이 문제에 제라니아의 잘못은 없었다. 제라니아가 그를 탓했다면 차라리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그가 사건에서 제라니아를 배제하려 한 건 맞았고, 그에 논리적인 이유를 댈 수 없기도 했으니까.

셀리나 왕자비는 성인이었고, 제대로 교육을 받은 귀족 여성이다. 그 정도 판단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상대였다. 그러니 밤중에 결국 다시 제라니아를 찾아온 게 아니겠는가. 제라니아가 자신에게 가장 쓸 만한 패라는 걸 알아서.

제라니아는 이 일에서 충분히 할 만큼 했다고, 적어도 프란츠는 그렇게 생각했다.

“당신이 남들보다 똑똑하기 때문입니까? 영민한 사람이라면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라고 덧붙이는 프란츠의 눈은 고요했다.

“정치적인 이유였고, 손해를 보지 이득을 보는 것도 아닌 일이었습니다. 가족끼리라도 언제나 모든 부탁을 들어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가 셀리나에게 냉정했던 건 그 사실을 충분히 알 텐데도 굳이 제라니아를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가문 내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을 어째서 그에게 요구하는가.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이유라면 마땅한 대가를 제시해야 맞는다. 그래서 대가를 가져오라 했을 뿐이었고, 그에 지탄을 받아야 한다면 자신이 감당해야 옳았다. 제라니아가 아니라.

“당신이 자신을 위해 산다 한들, 누구도 당신을 탓할 수 없습니다.”

제라니아가 이토록 약해지는 건, 셀리나 왕자비가 그의 기준에서 약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도와줘야만 하는 상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당신은 왜 그렇게도 다정한가. 타인에게 어째서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는 걸까. 조금 더 이기적으로 살아도 될 텐데, 많은 길들 중에 하필 어렵고 험한 길만을 고르는 걸까.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내게 아주 책임이 없다 생각하지 않아요.”

프란츠가 굳건한 반석이라면 제라니아는 버드나무와 같았다. 그에게는 휘어질지언정 결코 꺾이지는 않는 유연함이 있었다.

“내가 왜 이렇게 셀리나에게 연연하는지 의아하겠죠.”

충격은 없었다. 당신이 이해하지 못할 것을 알았으니까. 그런데도 마음이 차가워지고 마는 건 실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정말 다른 사람이라는 걸.

“반대로 질문하고 싶어요. 그 애에게 도대체 무슨 잘못이 있나요?”

왜 네가 죽어야만 했을까. 너는 상냥하고 다정하며, 언제나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자 노력하는 이였다. 3년간의 왕궁 생활을 견뎠던 네가 흔들린 건, 아마도 남편인 데릭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거겠지.

나약한 것이 죄인가.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 바스러질 연약함이 죄였던가.

“약한 건 죄가 아니잖아요.”

“…….”

“세상에 강한 사람만 존재하는 건 아니에요. 그 애는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거예요. 그 행동이 비겁했을지 몰라도 단죄는 제 몫이 아니고요.”

약하기 때문에 죽은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상대가 더 악독했을 뿐이다. 약하게 태어난 것이 잘못이라면, 그 말을 부숴서라도 부정할 것이다.

“강하게 태어난다면 물론 좋겠죠. 하지만 세상엔 약한 것이 태반이에요. 다수를 부정하고 소수를 긍정한들 무엇이 달라지겠어요. 더 최악으로 갈 뿐이지.”

강한 자를 동경하고 무를 숭상하는 왕국의 풍토를 생각하면 가히 파격적인 발언이었으나 프란츠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가끔 생각한다. 세상이 강자를 중심으로 설계되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를.

“내가 직접적인 잘못을 하지 않았다 했죠. 맞아요. 하지만 그럼에도, 구하지 못한 것에 자책하게 돼요. 제 소중한 친구였으니까.”

셀리나를 잊을 생각은 없었다. 그저 가슴속에 조용히 묻어둘 뿐. 슬프고 괴롭지만, 슬퍼하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감정이란 제 마음대로만 되는 게 아니라, 이러고 있는 거겠지만.

유리알처럼 푸른 눈동자 속에 갖가지 감정이 일렁였다. 저를 바라보는 시선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한 걸까, 제라니아는 쓰게 웃었다.

“물론 전하의 눈에, 이런 일에 일일이 연연하는 제가 어리석고 미련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조금 더 편하게 살아도 좋을 텐데, 나조차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하니까.

“그래도, 저는 이런 자신을 바꾸고 싶지 않아요.”

조금 귀찮게 사는 것이 남을 상처 입히는 것보다 조금 더 마음이 편해서. 자신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이타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게 내 마음이 편하니까, 그래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말하자 프란츠는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고개를 내저으며 남자는 기가 막힌다는 듯 대꾸했다.

당신이 이기적인 사람이라니, 그럴 리가.

“어쩔 수 없었다. 내 탓이 아니다.”

“…….”

“정녕 이기적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봐왔던 모든 인간은 그랬습니다. 남이나 상황을 탓하는 게 편하고 합리적이니까. 실제로 마음을 추스르기에 썩 나쁘지 않은 방법인 것도 맞으니까요.”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프란츠를 제라니아는 오묘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누군가의 탓을 하는 프란츠라니,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고고하게 모든 상황을 받아들일 것만 같았다.

당신도 남을 탓해본 적이 있을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프란츠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제라니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심히 그의 손을 잡으려고 했는데, 어느새 그에게 손을 붙잡혔다. 소중한 것을 쥐듯 조심스러운 손길이 피부를 간지럽혔다.

물끄러미 손등을 내려다보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 위에 입을 맞추었다. 느릿하게 움직여 닿은 따뜻한 온기가 작은 여운을 남겼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당신은 지금 그대로여도.”

신을 마주하고 선 사제처럼, 그는 더없이 경건하게 오롯한 진심을 토해냈다.

“다른 건 다 내가 하면 되니까, 당신은 그냥 이대로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늘진 곳에 발을 걸치고, 손에 피를 묻히는 건 자신으로 족했다. 당신만은 언제나 따뜻한 양지에 서 있었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전부 이루어 갔으면.

지금 이 모습에서 언제까지고 변하지 않기를.

“앞으로도 이런 일이 닥쳐올 겁니다. 내가 돕겠다 해도 거절하리라는 걸 압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는 사람에게 관심이 없었다. 필요하기 때문에 살필 뿐이지, 그 이상의 의미를 둔 적이 전무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에 관해 이 정도로 생각한 것은.

“당신은 당신의 길을 가면 됩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제 눈에까지 아름다우니, 다른 이들 눈에는 오죽 아름다울까. 당신의 편이 되어줄 이들이 많을 것에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가슴에 불을 지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건 어째서일까.

…착각일 것이다, 아플 리가 없어.

말없이 듣고 있던 제라니아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당신은요?”

왜 당신은 그 길에 없을 것처럼.

“혹시 싶어 하는 말입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니까요.”

제라니아는 프란츠의 손을 꼭 쥐고 깍지를 낀 뒤 뒤집었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단단하게 옭아매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전에도 얘기하지 않았던가요, 프란츠. 자기 마음을 소중히 여겨달라고.”

그를 올려다보며 싱긋 웃는 얼굴이 근심 한 점 없이 맑게 개었다. 평상시에 보이던 차분하고 단정한 모습 그대로.

“날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나는 당신 생각보다 강하니까. 있는 힘껏,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거고, 절대 포기하지 않아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프란츠는 다른 사람한테도 이렇게 말했을까. 내가 당신의 아내이기 때문에, 결혼으로 묶였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다정하게 구는 걸까.

당신의 이런 면모를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너무 나 좋을 대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대가 없이 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대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다 해줄 겁니다. 사랑은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당신 말고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생각은 없습니다.’

결혼할 때 그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곁에 있을게요. 당신을 혼자 두지 않을 거예요.”

다른 손 하나도 내어 프란츠의 손등 위로 포갰다. 표정은 차가운데 손은 따뜻하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그거, 괜찮군요.”

비가 내린 뒤 떠오른 무지개처럼 엷은 미소가 프란츠의 입가에 머물렀다.

* * *

새벽의 푸르스름한 장막이 거둬지며 잿빛 구름이 하늘을 가득 뒤덮었다. 잠시 뒤, 하늘에서 새하얀 점들이 나풀나풀 떨어지기 시작했다. 춤을 추듯 내려온 눈송이들이 길과 지붕, 창문가에 가득 쌓였다.

창문을 열자 쌓여 있던 눈들이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졌다. 함박눈을 머금은 차가운 바람이 방 안으로 훅 들이쳤다. 창문가에 선 제라니아가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 닿은 눈꽃들이 사르르 녹아 동그란 물방울이 되었다.

말없이 그걸 쳐다보던 제라니아가 중얼거렸다.

“…눈이네.”

첫눈이었다.

“눈이구나.”

문을 벌컥 열자마자 펼쳐지는 새하얀 별천지에 핀은 눈을 깜빡거렸다. 여기도 저기도 온통 눈이었다. 치우는 데 고생 좀 하겠네, 라고 생각하던 핀의 얼굴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앗!”

차가운 눈덩이가 눈과 코로 들어왔다. 같이 시종으로 일하는 제크가 건너편에서 동료들과 낄낄대며 웃고 있었다. 걸어오는 승부는 받아줘야 도리인 법. 핀은 곧장 무릎을 굽혀 눈덩이를 뭉치기 시작했다.

“복수다!”

깔끔하게 날아간 덩어리는 보란 듯이 제크의 얼굴에 명중했다. 으악! 비명을 지르는 그를 다른 이들이 비웃는 환경에서, 핀의 뒤에서 밖으로 나오던 시동들 역시 가세했다.

눈 오는 날 뛰어다니는 강아지처럼 그들은 그렇게 한참을 눈싸움에 몰두했다. 눈썹 사이사이로 파고든 눈을 손등으로 걷어내며 핀은 다시금 반격을 준비했다. 잔뜩 뭉친 눈을 들고 일어서려는 순간, 핀의 얼굴을 향해 눈덩이가 날아왔다.

맞는다!

“…어?”

맞는다고 생각한 순간, 눈이 무언가 장벽에 닿은 것처럼 그의 바로 눈앞에서 바닥으로 뚝 추락했다. 얼떨떨한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는 핀의 어깨를 옆에 서 있던 요센이 툭툭 두드렸다.

“어이, 핀! 왜 그래?”

“으, 응? 아무것도 아니야.”

정신을 차린 그가 다시금 눈을 상대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신나는 개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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