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95화 (96/171)
  • 제95화. 폭풍의 눈 (3)

    곧장 튀어 나간 말에 제라니아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렇게 대답할 줄은 몰랐다는 것처럼.

    “무엇을 잘못하셨는데요?”

    냉정하다 싶을 정도로 침착한 음성에 프란츠는 곧바로 답했다.

    “그게 무엇이든.”

    “…아니야, 방금은 실언했어요. 이런 식으로 시험하듯 말하려고 한 건 아닌데.”

    미안하다고 말하며 멋쩍게 웃는 제라니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프란츠는 등 뒤로 손을 움직여 문을 닫았다. 끼익,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바깥과의 단절을 선언했다.

    여기에는 오로지 둘뿐이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돌아올 겁니까, 제라니아.”

    그제야 프란츠는 입을 열어 용건을 말했다.

    “앞서 말한 대로 모르겠으니, 직접 묻는 수밖에 도리가 없겠다 생각했습니다.”

    아직도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건지, 망설이는 제라니아를 향해 프란츠는 차분한 투로 지금 가장 필요한 말을 꺼냈다.

    “그대가 무엇을 말하든, 화내지 않겠습니다. 무례하다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고, 어떤 행동을 해도 용인할 것입니다. …설령 내 심장에 칼을 꽂으려고 한다고 하더라도.”

    제라니아는 깜짝 놀라 부연했다.

    “그럴 리 없잖아요.”

    “그러면, 왜 돌아오지 않는 겁니까. 내가 셀리나 왕자비를 외면했기 때문입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질문에도 제라니아는 고개를 절레 내저었다.

    “저는, 그러니까….”

    제라니아는 몇 번 입을 달싹거리다 닫았다. 제 생각을 입 밖으로 내는 걸 크게 어려워한 적이 없는데, 이번만큼은 유독 그게 어려웠다.

    자신이 이번 사건을 통해 느낀 감정들은 여러모로 복잡했다. 차라리 하나만 문제였다면 이렇게 고민하게 되지도 않았을 텐데.

    프란츠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불처럼 감정이 치솟은 것도 사실이다. 그의 뺨을 때릴 뻔한 찰나, 눈을 감는 프란츠의 얼굴을 보았다. 단죄를 기다리는 죄인처럼 오롯이 멈춰 있는 그를 보니 손에서 힘이 빠졌다.

    감정적으로 굴어서 될 문제가 아니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도 제가 바보는 아닌지라 이유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꼬인 실타래처럼 엉킨 감정의 실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마음 한편에 쌓아두었다. 제라니아는 호흡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왜, 저와 상의하지 않은 건가요.”

    “…….”

    “셀리나가 절 찾아왔던 거라면 마땅히 저를 깨우시는 게 옳았어요. 왜 이 문제에서 저를 배제하려 하셨나요.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는 거, 전하께서 누구보다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차갑게 떨어지는 목소리가 북풍처럼 몰아쳤다. 늘 봄볕과도 같았던 여인은 지금 이 순간 바깥의 날씨만큼이나 서늘하고 냉정해 보였다. 프란츠는 그 모든 걸 감내하며 제라니아의 말을 기다렸다.

    대답할 말은 없었다. 자신이 왜 그랬는지, 그 역시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

    “전하, 저는, 살면서 나름대로 많은 걸 포기해 왔습니다. 작게는 드레스가 아닌 다른 옷을 입지 못하는 것부터, 크게는 제가 마땅히 가져야 할 의문까지.”

    목 안쪽이 꽉 막혔다. 눈이 너무 아팠지만 제라니아는 꾹 참아냈다.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생각보다 아주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세상에 모든 걸 다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없고, 하지 말라고 정해진 건 대개 이유가 있지요. 저도 알아요. 하지만, 그런 의문을 가지는 게 이상한 건 아니잖아요. 모두가 너무나도 당연시하는 것들이라 그렇지.”

    고작 이런 일 하나에 왜 이다지도 서러워져야만 하는 걸까. 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내가, 너무 무력하기 때문에.

    외면하고자 했던 사실이 베일을 벗고 선연하게 떠올랐다. 덮쳐드는 절망을 견디고자 제라니아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이를 악물었다.

    나는 타고난 것이 많았다.

    이 나라 최고 권세가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며 어디 하나 성하지 못한 곳 없이 건강하게 자랐다. 자매들만큼 뛰어나게 아름답지는 않아도 보기 흉한 얼굴인 것도 아니었고, 주변에 좋은 사람들 역시 넘쳤다.

    안온한 공기에 둘러싸여, 평온하게 자라났다. 무슨 일이 있다면 그저 한 마디를 하면 되었다. 괴롭힘을 당한다 한들 그들은 모두 아버지의 말 몇 마디에 밖으로 끌려 나갔고, 크리스는 나를 위해 사람들에게 화를 냈다.

    그러나 그것들은, 무엇 하나 내 힘으로 해낸 것이 아니다. 나는 누군가의 그늘에 서서, 그 수혜를 받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서 있는 이 위치조차 아버지에게 기반한 것. 그렇다고 무언가를 하려고 해봐야 할 수 있는 게 너무나도 한정되어 있었다.

    어떤 직업이든 의미가 있다 하나 나는 아버지를 닮은 사람이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건 재상인 아버지와 거의 비슷했다. 그럼에도 오빠처럼 작위를 가질 수도, 내 뜻을 펼치려 관직에 나설 수도 없었다.

    좋은 남자를 만나 시집가는 것이 내게 남은 거의 유일무이한 선택지였다.

    자연스레 의문이 싹텄다.

    나는 보호받기만 해야 하는 존재인 걸까. 내 힘으로 무언가를 이뤄낼 수는 없는 걸까. 홀로 서는 건 불가능한가? 나 자신으로서 타인에게 인정받을 수는 없는 건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하고 싶은 것은 많았으나, 할 수 있는 일은 그에 비해 너무나도 적었다. 귀족이기에 타인보다 선택지가 많기는 했지만, 여성이라는 사실이 그 선택지를 다시금 크게 제한했다.

    발버둥을 치기 시작한 뒤에야, 내가 얼마나 좁은 테두리에 갇혀 있는지를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가끔은 외롭기도 했다. 이 답답한 심경을 토로할 만한 상대가 없어서.

    나보다도 어린 코델리아에게 부담을 줄 수는 없었으니 유일하게 믿을만한 사람은 칼리아 언니 정도였지만, 언니는 그 시기에 힘든 일이 있었는지 안색이 좋지 않았다. 거기에 내 기분을 알아달라고 투정을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우선은 최선을 다하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걸 찾아보자. 포기하기만 하는 건 적성에 맞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몸은 편하더라도, 마음은 아닐 것이다.

    …아니, 난 그저 절망하지 않기 위해 애썼던 건지도 모른다. 지금에 와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어머니는 티엘라 폴리에트였지만, 지금은 바이첸 공작 부인이라 불린다. 어머니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런 삶에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아마, 대다수의 여인들 역시 그럴 것이다.

    나는 그게 싫었다.

    결혼은 여인을 철저히 대상화한다. 결혼이 싫었고, 내 성조차 가져갈 수 없는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제라니아 바이첸이야. 다른 누구도 아닌, 오롯이 나인데.

    프란츠는 모른다. 내가 당신의 청혼을 받아들인 게 어떤 의미인지. 그 모든 두려움을 딛고서라도, 내가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는 그 기회 하나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는 걸.

    “어째서….”

    주먹을 꽉 쥔 채 내뱉었다.

    “어째서 전하께서도, 저를 아무것도 못 하는 인간으로 만들려고 하시는 건가요.”

    당신만큼은 그러지 않으리라 믿었는데.

    그 생각을 떠올린 순간, 제라니아는 깨달았다. 왜, 당신에게서 이런 서운함을 느끼고야 만 건지.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해놓고, 당신에게 기대를 해버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당신은 내가 무엇을 말하든 늘 진지했으니까.

    울 것처럼 웃는 제라니아의 표정을 본 프란츠의 표정이 당황으로 이지러졌다. 손을 뻗으려고 하자, 제라니아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간결하지만 분명한 거절의 의사에 프란츠는 울컥한 듯했지만, 손을 말아 쥐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제라니아.”

    “…….”

    “그러니 그런 표정 짓지 마십시오.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테니. 절대로.”

    봐, 지금처럼.

    당신은 언제나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지. 그러니까 자꾸 헷갈려. 당신을 믿고 싶어져.

    “…어째서요.”

    “모릅니다. 그냥, 그러고 싶으면 안 되는 겁니까.”

    말하면서도 긴가민가한지 프란츠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섣불리 다가올 생각을 못 하는 그에게 미안해졌다.

    이야기가 다 끝나면, 손을 붙잡고 돌아가자. 언제나처럼.

    “하고 싶은 이야기가 남은 것 같군요.”

    눈치가 빠른 건 여전했다. 얌전히 제 말을 기다리는 프란츠는 어쩐지 커다란 대형견을 떠올리게 했다. 당신이 뻗은 손을 거부했으면서 막상 당신의 그런 모습을 보니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싶은 이 모순은 어째서일까.

    “전하.”

    “프란츠. 이름이 좋습니다.”

    “…그럼, 프란츠.”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며 감정을 정리하고자 노력했다.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건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그제야 조금 홀가분하게 말할 수 있었다. 혼자만의 시간 동안 생각했던 것들을.

    “나를 생각하고, 프란츠 당신을 생각하고, 셀리나에 대해서도 생각했어요. 그리고 결론을 내렸어요.”

    지나간 일을 반추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은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시간이 많았고, 직접적인 당사자이기도 했으며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어리석었다는 것을요. 저는, 셀리나에게 선택지를 줘서는 안 됐어요. 손을 내민 순간부터 저는 이미 그 결과에 대한 정답을 알고 있었으니까.”

    셀리나가 내 손을 잡지 못하리라는 걸.

    “셀리나에게 손을 내밀고 잡으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 손을 내 쪽에서 잡아줬어야 했어요. 셀리나가 그렇게 쉽사리 자기에게 주어진 틀을 깨버리고 나올 수 있을 리 없었는데. …그걸 알았는데.”

    힘껏 잡아당겼다면 못 이기는 척 끌려왔을지도 모른다. 그 순전한 성정과 수동적인 성격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더욱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다. 내 태도에 영향을 받아 인생의 중요한 분기점을 결정하게 될까 봐. 그래서, 이후에 후회하게 될까 봐. 본인의 인생이니까 스스로 결정하게 두어야 한다 여겼다.

    학습된 삶을 살아오던 사람이 일탈을 결정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충분히 알고 있다 생각했었는데도. 내게 편한 방식만이 상대에게 맞을 수는 없는데도.

    타인을 존중한다고 하지만, 언제나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만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중립적인 선은 결국 아무것도 구할 수 없다.

    그토록 자신 있게 줄리아에게 말해놓고, 자신은 결국 모순된 선택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 친구를 잃었다.

    고집을 부려야 하는 때를 놓쳐서, 친구가 영영 볼 수 없는 길로 간 뒤에야 깨달아서.

    제라니아는 그게 슬펐다. 더 늦기 전에 무언가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는데. 일이 터지고 나서야 겨우 수습을 도울 수 있었다는 게.

    “그래서, 후회합니까.”

    무미건조한 음성이 프란츠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못마땅한 듯 잘생긴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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