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폭풍의 눈 (2)
‘이런. 설마 싶었는데, 역시 마법이 통하지 않는 겁니까.’
남자의 얼굴에 짧게 고민이 스쳐 갔으나, 그는 곧 결정을 내렸다.
그냥 들켰어도 성가실 것을 자신의 정체까지 알고 있는 상대다. 그가 가장 우선해야 하는 명령은 존재를 노출하지 않는 것이었고, 정신에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군요. 부디 절 원망하지 마시길.’
길게 끌어봐야 좋을 게 없었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검을 꺼내 든 그는 곧장 그것을 여인의 심장에 박아 넣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절명한 여인의 몸을 받아 든 그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게 되었군.
부릅뜬 여인의 눈을 감겨준 뒤 여인이 들고 있던 종이뭉치를 발견했다. 돌돌 말려 있던 종이를 펴본 그는 이게 데릭 왕자와 신전 사이에서 오갔던 협약을 적어둔 문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이런 걸 들고 한밤중에 나온 걸까. 이제 와서 호기심이 일어봐야 대답해줄 수 있는 이는 죽고 없었다. 남이 발견하면 곤란한 물건인 건 사실이었기에 그는 종이를 챙긴 다음, 뒤에 서 있던 두 떨거지들을 불렀다.
뻣뻣이 굳어 있던 이들은 제 말에 따라 잠에서 깨어난 듯 퍼뜩 몸을 떨며 움직였다.
다 처리한 뒤 평소처럼 혼동 마법을 써 기억을 지웠다. 익숙하게 해오던 일이었다. 자신은 존재하되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인간이었고, 그 사실에 불만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그저 이렇게 기억에 남는 것은, 여인이 유독 반짝였기 때문이리라.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는 까마귀의 습성처럼 저 역시도 반짝이는 것에 약했다. 손을 뻗은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경기를 일으키듯 질겁하며 제 손을 뿌리치는 여인의 모습이, 마치 어릴 적 만났던 고양이를 보는 듯해 간만에 유쾌해졌다. 자꾸만 저를 피하는 게 거슬려 죽여버렸던 고양이와 달리, 함부로 죽일 수는 없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었다.
경계심을 사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짓을 한 이유가 뭘까. 고개를 갸웃거려 보았지만 정답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시 그렇게 반짝이는 무언가를 볼 수 있을까, 에 대한 아쉬움만이 잔상처럼 남았다.
죄의 무게를 알지 못하는 자.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깨닫지 못하고, 앞으로도 모를 남자는 그의 남은 인생처럼 기나긴 통로를 다시금 걸어 나갔다.
* * *
“언…. 아니, 비전하는 지금 저택에 안 계시는데요.”
코델리아는 새침하게 말했다.
바이첸 공작저에 방문한 프란츠는 마침 밖으로 나가려는지 한껏 차려입은 상태의 코델리아와 마주쳤다. 제라니아의 안부를 묻는 말에 돌아온 대답이었다.
그렇습니까, 라고 무심하게 돌아서려는 프란츠의 옷깃을 붙잡는 손이 있었다. 우뚝 멈춰 선 프란츠를 코델리아가 주변을 휙휙 돌아보았다. 가까이 오라는 듯 살짝 손짓하는 코델리아를 따라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라고, 전하께서 오시면 그렇게 대답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비밀을 속삭이듯 슬쩍 귀띔하는 코델리아의 말에 프란츠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알려줘도 괜찮은 겁니까?”
“음~. 보통은 당연히 안 되지만! 문제 해결에 협조해주실 것 같으니까요.”
“문제라니요.”
“언, 그러니까 비전하가.”
“…편하게 불러도 됩니다.”
“언니가 요즘 멍할 때가 많거든요!”
냉큼 호칭을 바꿔 쓰며 조잘거리는 얼굴에 활기가 넘쳐났다. 들뜬 것 같다가도 바로 진지한 표정으로 돌변하는 걸 보니 조금 정신이 없었지만, 프란츠는 애써 침착한 표정을 고수했다.
“저번 추수감사절 때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셀리나의 일 때문인가 했는데 그것만은 또 아닌 것 같아서요.”
셀리나 리나엔의 장례식이 끝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여느 장례식과 마찬가지로 엄숙하고 조용한 자리였다. 쌓아온 관계가 헛된 건 아니었는지 참석한 인물의 수가 상당했다.
그는 거기서, 그날 이후 처음으로 제라니아의 얼굴을 봤다.
새까만 상복을 입은 제라니아의 곁에는 키가 큰 남자가 서 있었다. 프란츠는 그가 누군지 바로 알아보았다.
크리스토퍼 휴스타인. 죽은 셀리나 리나엔의 첫째 오라비이자 휴스타인가의 후계자, 제라니아의 소꿉친구라던 이.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의 얼굴에 숨기지 못한 슬픔이 가득했다.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으나 심란한 표정에는 수많은 감정의 편린이 엿보였다.
그래서 다가갈 수 없었다. 마치 자신과 다른 세계에 속한 것처럼 보여서. 장례식에 따로 참석한 걸로도 모자라 말 한 마디 섞지 않는다니, 불화설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걸 머리로는 생각했으나 발은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먼발치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프란츠는 조용히 돌아섰다. 이해할 수 없다면 가만히 놔두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아무리 슬픔을 꾸며내도 제라니아라면 태연한 자신을 금방 알아볼 터였다.
…실망할지도 모른다.
프란츠는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냈다. 이런 자신은 이상했다.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필요하지 않다면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평소보다 고동치는 심장 소리는 언제나처럼 무시했다.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리고 때를 기다렸다.
후처리를 대략 끝마쳤으니, 이쯤이면 되겠다 싶어 공작저로 발을 디뎠다. 처음에는 편지를 보낼까 했으나 직접 찾아가기로 마음을 바꿨다. 쉬이 돌아올 거라면 처음부터 나가지도 않았을 사람이었다.
‘싹싹 비셔야죠. 원래 부부싸움이란 그런 거 아닙니까. 솔직히 그걸 듣고도 화를 안 내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나요.’
상황을 대강 들은 뒤, 손을 모아 비비는 시늉을 하는 티레인의 모습이 퍽 경박해 보였다. 그런 그를 이렌스가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결혼을 해보지도 않은 사람이 할 말입니까?’
‘에이, 연애할 때도 비슷한데 결혼이라고 다르겠어? 원래 이런 건 아쉬운 쪽이 굽히는 거라고.’
남의 일이라고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 티레인을 손짓 하나로 닥치게 한 뒤 프란츠는 고민에 빠졌다.
문제가 될 거란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친하던 이가 목숨을 잃었고, 그에 자신이 어느 정도 원인을 제공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다만 눈앞에서 화낼 거라 생각했지, 이렇게 제 얼굴조차 보려 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
요 근래 제대로 잠을 못 잔 탓인지 눈두덩이 뻑뻑했다. 최대한 반듯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기에 신경 쓰긴 했지만, 제대로 괜찮아 보일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언니가 저러는 건 처음 봐서요.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언니는 자기가 힘들어도 그렇게 티 내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엄청 차분하고, 사람한테 화낼 줄 모르는 것 같고.”
그게 참 멋지지 않냐고 발랄하게 덧붙이는 얼굴은 생김새도 그렇지만 분위기도 제 아내와는 많이 달랐다. 반짝이는 눈은 제라니아와 닮은 것 같기도 했지만, 그를 쳐다보고 있을 때처럼 심장이 술렁이진 않았다.
“뭔가 고민이 있어 보이는데, 칼리아 언니한테도 말을 안 해요. 전하의 얘기를 꺼낼라치면 묘하게 당황하는 것도 그렇고, 혹시 싸우시기라도 했어요? 아니, 제가 물어볼 일 아니라는 건 아는데요.”
“나도 잘 모릅니다. 그러니, 이제 물어봐야겠죠.”
진지하게 대답하는 프란츠를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던 코델리아가 눈을 깜빡이다 불쑥 말했다.
“저, 조금 불경한 소리 해도 될까요?”
“마음대로.”
“…사실 전하께서 언니랑 결혼하시겠다고 했을 때, 전 언니가 전하한테 약점이라도 잡힌 줄 알았어요.”
제가 두렵지도 않은지 엄청난 소리를 참 태연히도 내뱉는다. 프란츠는 정중하게 말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거야…. 솔직히 제 주변 사람들 중 가장 결혼을 안 할 것 같은 사람을 고르라면 전 두말없이 제라니아 언니를 고를 거였다고요. 저희 아버지가 정략결혼을 시킬 사람도 아니고, 시킨다고 순순히 결혼할 언니도 아니고.”
10년 넘게 자기만 바라보는 남자가 곁에 있었는데도 관심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쏙 뺐다.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결혼 얘기만 나오면 말을 돌리기도 했었고…. 그런 언니가 갑자기 결혼을 한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있겠어요? 언니 주변 사람들은 백이면 백 다 놀랐을걸요?”
프란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는 갔다. 가신들에게 제가 결혼을 통보했을 때도 그런 반응들이었으니까. 처음 대면했을 때부터 제게 맞선은 생각 없다 돌려 언급했던 것만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 프란츠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던 코델리아가 손을 내저었다.
“아, 물론 지금은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생각보다 전하의 곁에 있을 때 언니가 무척 즐거워 보이거든요.”
“그렇… 습니까?”
“네, 싫은 사람 앞에서도 웃는 게 언니 특기라고는 하지만…. 그 정도를 구분 못 할 사이는 아니라고요.”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말하던 코델리아는 집사가 저를 부르며 시간을 언급하자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아, 이런 늦겠다!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언니는 자기 방에 있으니 거기로 가면 돼요!”
뒤에 서 있던 노집사에게 그를 잘 부탁한다며 몇 가지 지시를 내린 코델리아가 부리나케 밖으로 나갔다. 금빛 머리카락이 움직임을 따라 깃발처럼 나부꼈다. 그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던 프란츠가 집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집사의 안내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간 프란츠는 굳게 닫혀 있는 방문 앞에 다다랐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살며시 문고리에 손을 얹고, 그것을 돌렸다. 천천히 문이 열리면서 내부가 드러났다. 하늘색 모포를 덮고 안락의자에 앉아 있던 제라니아가 프란츠의 얼굴을 보자마자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프란츠? 여긴 어떻게….”
문간에 선 채로 프란츠는 제라니아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분명 차근히 이야기를 전개할 생각으로 왔는데…. 제라니아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오는 말은 하나였다.
“내가 잘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