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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93화 (94/171)
  • 제93화. 폭풍의 눈 (1)

    “무슨 일로 찾아왔습니까.”

    무표정한 얼굴을 한 프란츠가 소파에 앉아 있는 불청객을 응시했다. 제 어깨를 감싸고 있는 숄을 꽉 쥔 손가락에서 셀리나의 동요가 고스란히 묻어났다.

    “저기, 비전하께서는….”

    “보시다시피, 밤이 늦어 자고 있습니다. 밤중에 이런 식으로 찾아오는 건 곤란합니다만.”

    “…그렇겠죠.”

    궁에는 눈과 귀가 많았다. 자칫 잘못하면 추문이 돌지 모르는 일이었다. 늘 웃는 얼굴로 사람을 대하던 프란츠의 차가운 태도에 셀리나는 당황한 것 같았지만 할 말이 없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혹시, 기다려도 괜찮을까요.”

    차마 제라니아를 깨워달라는 부탁을 할 수는 없었는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셀리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프란츠가 운을 떼었다.

    “설마, 도와달라는 말을 하러 온 건 아니겠지요.”

    정답이었는지 셀리나의 몸이 살짝 움찔거렸다. 하, 바람 빠진 소리가 모양 좋은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미쳤군요.”

    한 번도 그에게서 들어보지 못한 과격한 표현에 셀리나는 퍼뜩 시선을 돌려 프란츠를 쳐다보았다. 푸른 눈동자에는 온기가 없었다.

    “분명 거절하고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이제 와서 무슨 염치로. 생략된 말을 읽어낸 셀리나가 입을 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제대로 사과도 할 거고요.”

    하나로 땋인 검고 풍성한 머리카락이 마치 꼬리처럼 셀리나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렸다. 사과를 하면 받아줄 거라 당연하게 믿는 듯한 그 얼굴에 심사가 뒤틀렸지만, 프란츠는 내색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도움을 청할 거라면, 휴스타인 공작가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

    “안 되겠지요. 당신이 밀어붙여 하게 된 결혼에 이제 와서 문제가 있다 말하기는 곤란할 테니.”

    아버지인 휴스타인 공작과 형제들의 우려를 깨치고도 결혼을 밀어붙였던 셀리나의 행동을 지적하자, 셀리나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 모습이 흡사 초식동물처럼 가련해 보였지만 그는 매정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읊조렸다.

    “그래도, 협상하지 못할 건 없겠지요.”

    “협상…. 이라고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모든 일에는 그만한 대가가 필요한 법이니까요.”

    느긋하게 몸을 일으킨 프란츠가 셀리나의 머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꽤 가까이서 셀리나를 내려다보는 얼굴이 더없이 오만해 보였다. 그가 나직이 속삭이듯 말했다.

    “형수님, 당신이라면 알고 있겠지요. 당신의 남편이 소유하고 있는 금고의 위치를.”

    셀리나는 커다란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물기가 묻어날 것만 같은 푸르고 맑은 눈동자와 심연을 담고 새파랗게 물든 눈동자가 서로 마주 보았다.

    “그중 신전과의 협약을 적어둔 문서가 있을 겁니다. 그걸 가져오십시오.”

    신전과 결탁하지 않은 자가 왕궁에 몇이나 있겠냐마는, 직접 드러내는 건 다른 문제였다. 어쨌거나 법적으로 신전과의 결탁은 금지되어 있는 만큼 데릭의 입장을 실추시키는 데 이만큼 적당한 구실도 없을 것이다.

    제 손으로 남편의 약점을 팔아넘기라는 말에 셀리나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프란츠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왜, 못 하겠습니까?”

    형형한 눈빛이 마치 저를 옭아매는 것만 같아, 셀리나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위압적인 분위기가 그의 온몸을 짓누르고 숨통을 틀어쥐었다.

    “그것만 가져온다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최선을 다해 당신의 안위를 보장할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그는 사적인 정 따위는 질색했지만, 한 번 약속한 것은 그게 무엇이든 철저하게 지켰다. 설령 제 목숨과 연관된 일이라도 마찬가지였다. 프란츠의 어머니, 아그네스가 그에게 남긴 유산이었다.

    떨리는 눈으로 말을 잇지 못하던 셀리나가 조그맣게 목소리를 내었다.

    “제라니아한테는…. 알리지 않는 건가요?”

    “왜 알리겠습니까? 이건 당신과 나 사이의 거래인데.”

    “…….”

    “그리고, 자꾸 제라니아를 찾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경칭이 아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무척 부드러웠다. 곧 돌변했지만.

    “비가 제 주변 사람들에게 관대한 건 익히 알고 있지만, 지나치게 편히 여기는 게 아닙니까?”

    눈가를 휘어 웃고 있었지만, 미소에 스며들어 있는 스산한 한기를 느끼고 셀리나는 몸을 떨었다. 두려움을 가득 담은 눈동자로도 눈을 피하지 않고 자신을 쳐다보는 셀리나에게 프란츠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비라면 분명 이런 취급을 받고서도 어쨌거나 당신을 도우려 하겠죠. 난 그게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리암 그라시아 때도 그렇고, 이 여자 때도 그랬다. 선한 천성을 가졌기에 뛰어난 머리를 아낌없이 그들을 위해 할애한다.

    해결사를 대하는 듯이 제라니아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자꾸만 나방처럼 그를 찾아드는 인간들이 프란츠는 거슬렸다. 도대체 그가 누구의 사람이라 생각하는 건가.

    사적으로는 그들의 친우일지 모르나 공적으로는 제 아내였다. 편하게 대하는 것도 정도가 있었다.

    셀리나는 오묘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두려움만 가득하던 눈동자에 다양한 감정이 피어나고 스며들어 아래로 침잠했다.

    “정말, 제라니아를 아끼시는 모양이에요.”

    부러워하는 듯도, 안도하는 듯도 한 음성이었다.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모습에 프란츠는 가만히 침묵하는 쪽을 택했다.

    셀리나가 결단을 내리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응시하는 프란츠의 얼굴이 다시금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렇게 된 겁니다.”

    설명을 마친 뒤 프란츠는 선고를 기다리듯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고 제라니아를 살펴보았다.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라니아가 입을 열었다.

    “…그 문서는요.”

    “데릭의 말을 보니, 문서를 빼돌리기는 한 것 같습니다.”

    받아내지는 못했지만.

    “설령 내 손에 있다 해도, 써먹을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말입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니까. 확실하게 선을 긋는 프란츠를 쳐다보던 제라니아는 입술을 꾹 깨물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온 제라니아가 뺨을 때리려는 것처럼 손을 들었고, 프란츠는 눈을 감았다.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고통이 없는 것에 프란츠는 살며시 눈을 떴다. 선명해진 시야로 손을 올린 채로 굳어버린 제라니아의 모습이 보였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손을 내린 그의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다.

    “왜 그럽니까?”

    “…….”

    자기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듯, 녹색 눈동자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울컥 넘치는 감정을 어떻게든 추스르려는 듯 세게 깨문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프란츠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으나, 제라니아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 그것을 피했다.

    “난, 그게, 그러니까….”

    이토록 혼란스러워 보이는 제라니아를 본 적이 있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그를 압도했다. 턱까지 차오른 물속에서 발뒤꿈치를 들고 어떻게든 목을 빼고 있는 것처럼, 방심하면 금방 이 심연과도 같은 감정에 잡아먹힐 것만 같았다.

    “전하는, 왜, 내게….”

    무어라 띄엄띄엄 말하던 제라니아의 눈이 살짝 붉어졌다.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문 제라니아가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저, 공작저에 가 있을게요.”

    갑자기 궁을 나가겠다는 제라니아의 말에 프란츠는 곧장 반박했다.

    “내가 나가 있겠습니다.”

    “아니요, 제가 나가는 게 맞아요. 여기는 전하의 공간이니까요.”

    제 자리가 아니라는 양 선을 긋는 목소리에 프란츠는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제라니아의 입장에서는 그가 자신 때문에 불편한 외부에서 밤을 보내길 바라지 않아 내뱉은 말이었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다르게 들렸다.

    프란츠는 초조한 듯 이름을 불렀다.

    “제라니아.”

    “미안해요. 나중에 다 설명할게요. 지금은, 일단 시간을 가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 말만 남기고 급히 방을 빠져나가는 제라니아를, 프란츠는 붙잡을 수 없었다.

    * * *

    “수고했다.”

    저를 치하하는 목소리에 로브를 입은 남자는 조용히 고개를 수그렸다. 어둠에 잠겨 있어 상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너답지 않은 실수를 했구나 싶었지만…. 그래, 들키지 않았으니 되었다.”

    선심을 쓰는 듯한 목소리가 가증스러울 법도 하건만 남자는 고저 없이 ‘감사합니다.’를 읊었다. 그 감정 없는 말투가 만족스러운지 상대는 한껏 누그러진 투로 말했다.

    “당분간은 몸을 사리도록.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되니까.”

    외부에 드러난 만큼 그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나중에 다시 사용될 일이 있을지는 몰라도, 상황이 지나가길 기다리면 되었다. 가장 안전한 곳에 머물고 있으니 들킬 염려는 없었다.

    차분하고 건조한 지시에 남자는 알겠다고 한 뒤 물러났다. 있는 듯 없는 듯, 희미한 존재감을 끌어안고 비밀 통로를 걸어가는 남자의 발소리가 어두운 공간에 스며들었다.

    답답한 후드를 벗어내자 앳된 얼굴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로브를 벗어 뒤집자 새하얀 안감이 드러났고, 곧 청년의 벗은 몸과 등에 선명하게 새겨진 낙인을 둘러 감쌌다. 남자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이곳을 나서는 순간부터,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야 했다. 상황은 언제나와 같았는데도 무언가 기분이 이상했다. 낙인의 위치가 하필 심장의 뒤편이라 그런 걸까. 쓸데없는 상념이 뇌리를 맴돌았다.

    남자는 가만히, 그 가엾은 여인에 대해 회상했다.

    처음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여인을 발견했을 때는 아무리 그라도 조금 놀랐다. 자신을 따라왔으리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분명 은신 마법으로 존재감을 지웠을 텐데,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 건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언령을 듣고도 계속해서 달아나려는 여인을 마법으로 구속했다. 방금 본 것들은 절대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사실들이었다. 그러나 혼동 마법을 걸었는데도 표정이 변하지 않는 것에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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