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92화 (93/171)
  • 제92화. 차가운 진실 (6)

    ‘더 나은 나라를 만들 겁니다.’

    셀리나와의 결혼 허락을 받으러 왔을 때, 젊은 왕자는 그렇게 말했다. 사실 아론은 이 결혼을 반대할 생각이었다. 아무리 셀리나가 왕자를 사랑한다 한들 세상은 사랑만으로 살아갈 수 없었다. 흉흉하기 짝이 없는 왕궁의 소문만 생각해도 그랬다.

    사랑스러운 만큼 여리고 약한 그 아이가 과연 그곳의 분위기를 견딜 수 있을까. 젊은 나이에 왕궁에 갇혀 쓸쓸히 죽어간 전 왕비의 이야기도 그렇고, 몰락한 왕국의 왕족이라는 출신도 그렇고 걸리는 점이 너무 많았다.

    분명 그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차별에 시달릴 터였다. 왕국에 통합되고 가문이 겪어왔던 일들처럼. 그런 와중에도 셀리나만은 어떻게든 감싸 보호하고자 했던 만큼, 귀하게 키운 딸을 홀랑 낚아채려는 무뢰한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그런 제 속내를 꿰뚫어 봤다는 양 왕자는 웃으며 말했다.

    ‘여러모로 곤란하게 여기고 있을 것을 압니다. 어떠한 꿍꿍이도 없이 셀리나에게 접근했다고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나, 셀리나에 대한 마음은 진심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겠죠.’

    ‘…….’

    ‘아무런 대가 없이 힘을 빌려달라 하는 게 아닙니다.’

    왕자는 여러 가지를 이야기했다. 셀리나에게 있어 자신이 어떤 남편이 될 수 있는가와, 어떤 나라를 만들어가고 싶은 것인지에 대해서. 귀족 간의 대단결을 이야기하는 왕자의 말에 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말씀하시는 저의를 모르겠습니다.’

    왕자는 사람 좋게 웃었다.

    ‘이 정도면, 내가 공작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할 만하지 않겠습니까.’

    미남자라는 명성에 걸맞은 수려한 용모가 환하게 빛났다.

    “헛소리하지 마라!”

    마구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치는 남자의 모습이 그 위로 덧씌워졌다. 패악을 부리는 데릭의 모습을 돌아보지 않은 채 시종은 그간 있었던 일들을 꿋꿋하게 증언했다.

    두 사람 사이에 다툼이 오갔고, 셀리나가 홀연히 외출하는 일이 늘어났으며 셀리나가 사라진 날 밤에 그가 내보였던 태도까지 전부 수백의 관중 앞에 까발려졌다.

    사람들 사이에서 수군거림이 오가다, 점점 커져갔다. 재판장이 정숙하라 외치는데도 쉽게 가라앉지 않을 만큼.

    이게 그 결과인가.

    더는 볼 수 없어 아론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옆에 서 있는 아들들의 목소리조차 의식 너머로 묻어버린 채.

    무언가 잘못되었다.

    청년의 증언을 들은 순간 제라니아는 단박에 얼굴이 굳었다. 데릭에 대한 이야기가 갑자기 여기서 왜 나온단 말인가. 분명 이번 재판에 나올 증인들은 전부 신중하게 선별했다. 프란츠가 지시한 일이다. 허투루 처리되었을 리가 없었다.

    황급히 프란츠를 돌아보자, 태연한 얼굴을 하고서도 그 역시 눈빛에는 낭패라는 느낌이 가득했다.

    제라니아는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애써, 휴스타인 공작이 서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상당히 놀란 듯한 크리스토퍼와 분노로 얼굴이 붉어진 루크와 달리 아론 휴스타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감정이 씻겨나간 듯한 무표정.

    그를 오래 봐왔던 제라니아는 알 수 있었다. 이건 위험해.

    루안이라는 청년의 얼굴에는 사명감이 깃들어 있었다. 순수하게 정의를 실천하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해 보이는 눈빛을 보고 있자니 심란함이 배가 되었다.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재판장은 병사들을 시켜 데릭 왕자를 붙들게 했다. 보통이라면 허락되지 않을 일이나 이곳은 신전이었다. 왕족조차도 신전 안에서는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차분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개판이 되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제라니아는 이 사태를 만들었을 게 분명한 원흉을 찾아 고개를 움직였다.

    이걸 폭로하면 셀리나는 물론, 데릭의 평판 역시 깎이게 된다. 그것에 이득을 보는 사람이라고 하면 뻔하지 않겠는가.

    보데로아 후작은 점잖은 얼굴을 한 채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숙덕거리는 귀족들 사이에 혼자 고고히 서 있는 모습이 기묘한 이질감을 불러일으킨다.

    이간질이 예상보다 잘 먹힌 걸까.

    고작 시종 따위에게 뒤통수를 맞은 게 억울했는지 답지 않게 분노하던 데릭은 병사들에게 붙들린 뒤에야 감정을 추스르고 냉정해졌다. 곧장 자신의 억울함을 조목조목 토로하는 그의 눈빛에 미처 감추지 못한 초조함이 넘실거렸다.

    대신전에서 열리는 재판은 신성하게 여겨졌다. 여기서 나온 결론은 어지간해서는 뒤집는 게 불가능했으니 그로서도 감정적으로만 굴 수는 없었다.

    물론, 시종이 저렇게 증언했다고 한들 데릭이 잡혀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부부관계에서 남편이 자기 아내를 어떻게 대했든 그가 직접 셀리나를 죽인 게 아닌 이상 문제와는 연관이 없었다.

    이 같잖은 연극에서 저 시종의 역할은 오직, 데릭과 휴스타인가의 관계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일 테니까.

    그 후에도 재판은 어떻게든 진행되었다. 짜놓은 그림이 어그러졌다고는 하지만, 어쨌거나 이 문제에 관해 증언할 이에게는 모두 손을 써둔 만큼 이 이상의 마찰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예상보다 더 오래 걸렸고, 재판관들의 눈가에도 피로가 덕지덕지 붙기 시작했을 무렵 재판은 마무리가 되었다.

    예정했던 대로 시녀와 요리사는 공범으로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직접적인 살해자인 남자를 찾기 위해 신전에서 조사단을 꾸리기로 결정되었다.

    재판이 끝나고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론 휴스타인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가 막힌다는 듯 씩씩거리는 루크의 어깨를 크리스토퍼가 꽉 붙들었다.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에도 루크는 짜증스레 형의 손을 털어냈다.

    아론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곧게 등을 펴고 걸어가는 남자의 넓은 어깨는 평생 기사로서 살아왔다는 것을 증명하듯 각이 반듯했다. 아들들과 함께 사람들 사이에 섞여 외부로 나가던 중, 저를 당기는 힘에 아론은 뒤를 돌아보았다.

    “헉, 헉….”

    “…비전하.”

    제 뒤에 서 있는 제라니아를 본 아론이 놀란 듯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아론의 옷자락을 꼭 붙든 제라니아가 그를 향해 안도한 듯 웃었다. 다른 손으로는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고 있었고, 급하게 내려왔는지 제법 숨이 거칠었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천천히 그들 주변을 가로질렀다. 네가 왜 여기 있냐는 양 눈살을 찌푸리는 루크와 뒤에서 재빨리 그 입을 틀어막은 크리스토퍼가 의아함을 한껏 담은 시선을 보냈다.

    “아무것도,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겨우 호흡을 틀어쥐고 제라니아는 어떻게든 웃으려 애썼다. 말해야만 했다.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셀리나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요.”

    “…….”

    “진실은 밝혀질 것이고, 범인은 온당한 처벌을 받을 거예요.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되도록 힘쓸 겁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론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처음 그와 대면했던 어린 시절에도 이토록 막막하지는 않았었는데.

    “그러니까….”

    포기하지 말아달라고.

    그렇게 말하려던 순간 아론이 움직였다.

    큼직한 손이 제라니아의 손을 붙잡고, 그것을 제 옷자락에서 조심스레 떼어냈다. 멍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는 제라니아를 향해 아론은 덤덤한 음성으로 말했다.

    “곧, 장례식이 있을 겁니다.”

    “…….”

    “…와주실 겁니까.”

    여전히 정중한 태도로 자신을 대하는 그를 보며 제라니아는 가만히 입을 달싹거렸다. 가슴에서부터 탁 치밀어 올라오는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까. 정제되지 않은 무언가가 튀어나올까, 입술을 꾹 다문 채로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걸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었는지 아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새벽의 안개와 같이 은은하게 피어난 미소는 금방 종적을 감췄지만, 먼 훗날까지도 제라니아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았다.

    “그때 뵙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돌아서는 아버지를 따라, 크리스토퍼 역시 움직였다. 제게 눈인사를 건넨 뒤 루크를 끌고 움직이는 그를 제라니아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문득 생각했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구나.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 이토록 실감이 난 적이 있던가.

    파삭, 안온하던 나날에 균열이 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제라니아는 조용히 외면했다.

    아직은.

    “괜찮습니까.”

    그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세자궁으로 돌아왔다. 옷을 갈아입고 침실로 들어서자, 활짝 열려 있는 창문 옆에 붙어 있는 커튼이 나직이 흔들렸다.

    시간이 꽤 흐른 탓에 어느새 해가 저물어 창문에서부터 들이친 노을이 사방을 붉게 물들였다. 물감을 풀어낸 듯 주홍색으로 뭉친 구름이 저 멀리 보이는 보라색 구름과 섞여 오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괜찮냐는 질문에 제라니아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간에 우두커니 선 채로 침대에 살짝 걸터앉은 제라니아를 쳐다보는 프란츠의 푸른 눈동자에 노을이 뒤섞였다.

    “쉬는 게 좋겠군요.”

    제라니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이야기를 들을 때가 온 것 같아서요.”

    재판이 끝났으니 이제는 정말 말을 꺼낼 때가 왔다. 예상치 못한 결과 때문에 심란하기도 했고, 프란츠 역시 뒤처리로 골머리를 앓을 걸 알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셀리나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프란츠는 침묵했다.

    둘러댈 수도 있었다. 그 정도 말재간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며내는 건 그의 장기 중 하나였다. 마음만 먹는다면 의혹을 가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그는 직감했다.

    곧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한다. 대답을 종용하는 목소리와 함께 성큼 다가온 녹색 시선이 그를 꽁꽁 옭아매었다. 천천히 조여드는 침묵이 가슴을 답답하게 눌렀다. 그런 자신을 프란츠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제라니아의 말대로,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었다. 하지 못할 말 역시 아니었다.

    그런데도 왜 이리 껄끄러운 걸까. 숨길 일이 아닌데도, 그렇게 생각하는데도 어째서 막상 입에 올리려니 이다지도 내키지 않는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결국 그는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이렇게 고민하는 건 자신답지 않았다. 그의 무의식은 변하고 있는 자신을 부정했다. 아집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그를 형성한 습관이, 감정을 부정함으로써 그를 이 자리에 붙들어둔 관성이 그것을 쉬이 용납하지 않았다.

    경계에 서 있던 프란츠가 한 걸음 더 내디뎌, 온전히 침실에 발을 디뎠다. 안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과 시녀들을 손짓으로 내보낸 그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당신을 찾아왔습니다.”

    비밀을 속삭이듯 아주 작고 낮은 목소리가 제라니아의 귓가에 닿았다. 그와 세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 선 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프란츠의 입술이 서서히 말을 그려냈다.

    “도와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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