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91화 (92/171)
  • 제91화. 차가운 진실 (5)

    “이미 죽었는데 명예가 도대체 무슨 대수란 말인가요. 외부에 알릴 것도 아닌데.”

    “가까운 친지이기에 더 신중해야 하는 일이라 봅니다.”

    “그들의 의견을 들어본 것도 아니잖아요. 휴스타인은 셀리나 왕자비의 가족이에요. 그들이 이 문제에서 이렇게 배제된다는 건 불합리해요.”

    “정치가 언제나 좋게만 흘러갈 수 없다는 걸 당신도 알지 않습니까. 그들은 온화하다 하나, 이를 드러내지 못하는 이들은 아닙니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게 전하께는 덜 성가신 길이니까요?”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이기도 하지요.”

    제라니아의 목소리는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듯 조금씩 떨리고 있었지만 프란츠는 시종일관 평온했다. 무엇도 그를 뒤흔들 수 없을 것처럼.

    높아지는 발언 수위에 아이작은 슬슬 국왕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면서도 딸을 말릴 생각은 안 하는 게 참 그답다고 생각하며 국왕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가 상황을 환기하듯 불쑥 끼어들었다.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다만.”

    “하명하십시오.”

    “그래서, 너는 도대체 왕자비와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

    국왕을 돌아보는 프란츠의 얼굴에 미소가 깃들었다. 대답할 마음이 조금도 없는지 입을 다문 채 웃고만 있는 프란츠를 보며 국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손짓한 뒤, 대화의 종결을 선언했다.

    “이 문제는 이미 논의한 대로, 이 자리에서 묻어두기로 하겠다. 왕자비의 죽음과 독살 시도의 범인이 같은 걸로 확인되었으니, 곧 열릴 살인사건을 다룰 재판은 적당히 종결시키도록 하지.”

    반박을 허용하지 않는 엄숙한 모습에 제라니아는 입을 달싹였지만, 결국 말을 뱉지는 못했다. 한 줌의 답답함을 끌어안고 고개를 수그리는 제라니아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세자궁으로 돌아간 프란츠는 곧장 제라니아를 찾았다. 시종의 보고에 따라 휴게실로 마련된 공간에 들어선 프란츠의 시선 끝에 제라니아가 보였다. 탁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얼굴에 여러 상념이 어려 있었다.

    생각에 잠길 때면 하늘을 바라보는 게 버릇인가.

    평온한 분위기를 깨뜨릴라, 프란츠는 가만히 서서 그런 제라니아의 옆얼굴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녹색 눈과 작지만 오뚝한 코, 얌전해 보이지만 꾹 다물려 있는 얇은 입술.

    그 모든 것을 꼼꼼히 뜯어보고 있던 프란츠에게로 제라니아는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무언가를 훔쳐보다 들킨 기분이 이런 걸까. 저도 모르게 굳어버린 프란츠와 달리 제라니아는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려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전하.”

    평소보다 조금은 기운 없는 얼굴이 못내 신경 쓰여, 프란츠는 결국 말을 꺼냈다.

    “그렇게 걱정이 됩니까.”

    대답은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제라니아는 고민하듯 잠시 말이 없었다. 언제나 제게 꽤 확실하게 말을 꺼내던 태도와는 사뭇 달라, 프란츠는 묘한 초조함을 느꼈다.

    “이런 기분을 느낄 일이 생길 거라는 건 예상했는데, 막상 다가오니 제 각오가 부족했구나 싶어서요.”

    “…무엇을.”

    “이게 정말 옳은 길일까, 생각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목소리에 옅은 체념이 어려 있었다. 프란츠는 재빨리 말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질 겁니다.”

    “그게 마음에 안 든다는 거예요.”

    당신은 그래서 문제라고 장난스레 말하며 제라니아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은 풀어진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프란츠가 툭 말을 꺼냈다.

    “…왕자비의 가족들에게 못 할 짓을 하는 것 같습니까.”

    제라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가문끼리 친하다고 해도, 정치적인 입장은 다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휴스타인 공작 각하께서 데릭 왕자를 동업자로 선택한 이유는 분명하죠.”

    오랜 전쟁을 거친 만큼, 왕국에는 여러 형태의 귀족들이 존재했다. 기존의 귀족들과 더불어 기사가 되어 영토를 하사받아 귀족이 된 경우, 멸망한 나라에서 유입된 귀족들 등.

    그들은 서로의 이득을 챙기기 위해 무리를 이루었다. 기존의 귀족층은 왕비와 보데로아 후작을 중심으로 뭉쳤고, 프란츠는 그 정통성을 바탕으로 한 기존 귀족층의 지지와 신생 귀족층의 지지가 반씩 섞였다면 데릭은 신생 귀족들 쪽에 세력이 쏠려 있었다.

    프란츠는 줄타기에 능숙했지만 방식은 꽤 단호한 면이 있었다. 귀족들과 잘 어울리는 만큼이나 부정에는 냉정했고, 인정에 휩쓸리는 일이 없었다. 신전과의 관계에 조금의 여지조차 두지 않는 것이 그 연장선이었다.

    그에 비하면 데릭은 훨씬 온건하고 개방적인 편이었던 만큼 그를 따르는 젊은 귀족이 상당했다. 특히 그는 트라이탄이나 클라단 출신 귀족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정통성이 부족한 만큼 권력의 틈새를 찾아 세력을 확장한 것에 가깝겠지만, 휴스타인가와 손을 잡은 것도 그 일환일 터였다.

    제라니아의 가문인 바이첸 공작가는 왕국 최고의 세도가였다. 왕국의 개국 공신이자 기존 귀족층의 정점에 선 이들이나, 지금의 가주인 아이작은 정치적인 문제에서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 상태를 고수했다.

    휴스타인과 아무리 친하다 한들, 각자의 입장이 다른 만큼 이런 날이 오는 건 당연했다.

    그러니 심란해하는 건 옳지 않았다. 이러면 안 되는 게 아닐까 하면서도, 결국 그들을 외면해야만 한다.

    ‘범인을 찾는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만한 대가를 받게 해줄 겁니다.’

    크리스토퍼가 했던 말이 귓가에 아른거렸지만, 고개를 흔들어 털어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건 자신의 특기인 만큼 괜찮을 것이다.

    범인을 찾긴 찾았으니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편할 텐데. 왜 그러지를 못할까. 이럴 때면 자신이 미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아마 평생 가도 달라지지 않겠지.

    “전하의 우려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요. 근데 마음이란 게 쉽게 정리되는 건 아니니까요.”

    엷게 웃어 보이는 제라니아를 향해 프란츠는 나직이 물었다.

    “왜, 아무것도 묻지 않습니까.”

    하고 싶은 말도, 묻고 싶은 말도 많을 텐데. 프란츠가 돌아온 이후로도 제라니아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서요.”

    조용히 대답하는 제라니아의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조금, 정신이 없기도 하고…. 재판이 끝나고 나서 들을게요. 그때는 얘기해줄 수 있겠어요?”

    “…당신이 원한다면.”

    그가 머뭇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건 착각일까. 그럴 리 없었다. 자신과 논쟁할 때도 더없이 평온해 보이지 않았나. 얼굴을 붉게 물들였던 그 새벽의 기억이 꿈이었나 싶을 정도로 냉정한 얼굴을 하고서.

    “피곤합니까?”

    그렇게 물으면서도 제게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 프란츠의 모습이 이상했지만, 제라니아는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조금은요.”

    그 말을 들은 프란츠가 조심스럽게 제라니아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천천히 걸어 그 옆에 선 프란츠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제라니아의 이마에 가만히 닿은 손가락이 삐죽 튀어나온 잔머리들을 옆으로 살짝 걷어냈다.

    “프란츠?”

    제 머리칼을 매만지는 손길에 간질거리는 기분이 피부를 타고 스며들었다. 손을 들어 프란츠의 손등을 감싸자, 손등에 난 핏줄이 아주 미약하게 움찔거렸다.

    “…당분간 세인이 이쪽에서 근무할 겁니다.”

    “세인은 숨은 조력자였던 게 아니었나요?”

    패를 뒤집어도 되겠냐는 말에 프란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상한 마법사가 궁 안에 있다는 사실이 염려되는 걸까. 확실히 국왕의 처소 앞에도 병사들 사이에 신관복을 입은 이들이 서 있기는 했다.

    하지만 자신은 국왕이 아니니까,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던 제라니아는 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프란츠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덤덤한 얼굴과 달리 그의 눈빛은 강렬했다.

    푸르고 투명한 눈동자 속에서 여러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 자신을 한데 집어삼킬 것처럼 깊으면서도, 마치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듯도 했다.

    왜 나를 향해 저런 눈을 하는 걸까. 묻기도 전에 그는 손을 떼어냈다. 떨어져 나간 온기가 아쉽다고 생각할 즈음 프란츠는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말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무엇을요?”

    “고생 많았습니다.”

    툭 튀어나온 치사에 제라니아는 일순 멍해졌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상황이 빨리 정리될 순 없었을 겁니다.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는 것처럼 어색하고 멋쩍은 듯한 목소리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감사를 표하는 프란츠를 향해 제라니아는 밝게 웃었다.

    “나야말로, 날 믿어줘서 고마워요. 무척 기뻤어요.”

    겉치레 없이 내보이는 순수한 미소를 살짝 놀란 얼굴로 쳐다보던 프란츠의 입가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자신이 웃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라서 믿었던 겁니다.”

    비밀을 털어놓는 것처럼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에게 마주 웃어주면서, 제라니아는 자꾸만 마음속에서 먹구름처럼 무럭무럭 자라나는 불길함을 털어냈다. 아니겠지, 설마. 아닐 거야.

    괜찮을 거라 재차 다짐하며 제라니아는 차가워진 손끝을 꼭 말아 쥐었다.

    넓은 공간이었다.

    옅은 푸른색의 벽지가 발려 있는 벽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천장에는 종교 프란의 신화를 표현하는 화려한 천장화가 공간을 차지했다. 양옆으로 계단처럼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고, 그 중심에는 높게 설치된 단상이 자리했다.

    단상의 왼쪽에 마련된 계단에는 신관복을 입은 사람들이, 오른쪽으로는 왕실을 비롯해 귀족들이 일렬로 앉아 있었다. 제라니아 역시 왕족에게 마련된 상석에 앉아 긴장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새까만 재판복을 입은 이들이 줄지어 안으로 들어왔다. 가운데에 자리한 단상에 줄줄이 착석한 이들 중, 정중앙에 앉은 남자가 손을 들고 엄숙하게 선언했다.

    “재판을 시작합니다.”

    단상 밑에 서 있다가 앞으로 나온 남자가 간단하게 상황을 요약했다. 낭랑한 목소리가 셀리나의 죽음에 관한 사실을 담담히 서술한 뒤, 몇 명의 사람들이 재판대에 섰다. 그 이후로도 증인들이 나왔다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순조로이 재판이 흘러가던 중, 새로운 증인이 문을 열고 등장했다. 이제 갓 성인이 되었을 법한 어린 청년이었다. 재판장이 말했다.

    “증인의 이름을 대시오.”

    “루, 루안 플레니스입니다. 데릭 왕자 전하의 처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재판장은 몇 가지를 물었고, 청년은 더듬거리면서도 성실하게 대답했다. 그러던 그가 무언가를 결심했다는 양 재판장을 올려다보았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한 가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허가합니다.”

    수백 쌍이 넘는 시선이 청년에게로 몰렸다. 부담스럽게 쏟아지는 시선에도 청년은 결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외람되오나 셀리나 비전하의 죽음은, 데릭 전하께도 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예상치 못한 발언에 제라니아와 프란츠의 얼굴이 차게 식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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