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화. 차가운 진실 (4)
“…그걸 물으시는 저의가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제라니아는 다 마신 찻잔을 내려놓으며 싱긋 웃었다.
“참석하신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 말이 완곡한 권유임을 알아채지 못하는 자는 이 자리에 없었다. 과거를 읽을 수 있는 에이르가 재판에 참여한다면 많은 일이 수월해질 터였다.
묵묵히 차를 마시던 에이르의 시선이 연두색이 감도는 찻물 위에 닿았다. 흔들림 없이 잔잔한 수면을 내려다보던 그가 천천히 찻잔을 그릇 위에 올려놓았다.
“비전하.”
제법 진지한 울림이 둘 사이를 수놓았다.
“저는 신관입니다.”
아주 많은 의미를 내포한 한 마디였다. 신을 섬기는 자, 그 의미를 또렷이 담은 문장을 따라 정리된 말들이 에이르의 입에서 줄줄이 튀어나왔다.
“아시다시피 저는 아나샤.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지만, 그 진실함은 오로지 저 개인의 평판에 좌우되지요.”
그는 이 신전에서 누구보다도 고귀하게 여겨지지만, 그만큼이나 처신에 신중해야 했다. 천칭의 중심에서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중립, 그 균형을 맞추는 일은 굉장히 까다로웠다.
“비전하께서는 좋은 분이시지요. 그에 이견이 있는 자는 아마 별로 없을 겁니다.”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은 걸까, 꽤 긍정적인 평을 내리는 것에 제라니아는 속으로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비전하께서 좋은 의도로 말씀하신 것을 알지만, 제게도 입장이라는 게 있습니다.”
에이르는 막힘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자신의 역할에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얼굴에는 망설임이라곤 한 톨도 보이지 않았다.
“저는 사사로운 일에 제 힘을 남용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그럴 생각 역시 추호도 없습니다.”
자신이 재판에 나선다면 좀 더 시시비비를 가리기는 쉬울 것이다. 신전에서도 경외하고, 또 두려워하는 능력이니까.
그러나 에이르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신전의 문제가 아닌 이상 이건 사사로운 일이었고, 그는 나서야 할 때와 아닌 때를 신중하게 구분하는 이였다.
“맞물리지 못할 톱니바퀴를 맞추려 해본들, 결과가 달라질 리가 있겠습니까.”
단호하게 떨어지는 음성이 대화의 종결을 선언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진지하게 제라니아를 쳐다보고 있던 에이르의 얼굴이 살짝 허물어졌다.
“그렇군요.”
놀랍게도 제라니아는 웃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제라니아를 보며 에이르는 눈을 살며시 깜빡거렸다.
“왜 그런 표정이신가요?”
“…화를 내실 줄 알았습니다.”
“제가 왜 화를 내겠어요. 오히려 무척 기쁩니다.”
그 말대로, 예쁘게 휘어진 제라니아의 눈동자에는 기쁨이 넘실거렸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에이르에게 제라니아는 작은 힌트를 건넸다.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어야 하니까요.”
지극히 당연한 소리를 하는 것에, 순간 뭔가 하던 에이르는 살며시 표정을 굳혔다.
“설마, 제가 다른 누군가의 편을 들 거라 생각하신 겁니까?”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는 생각했어요.”
제라니아는 순순히 시인했다. 아름답지만 무표정한 얼굴이 제라니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절 시험하셨군요.”
“궁금했을 뿐입니다. 제가 어디까지 신전을 믿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요.”
“…이 사건에, 마법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까?”
제라니아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말이 없던 에이르가 입을 열었다.
“비전하께서 믿든, 믿지 않으시든 상관없습니다만, 신전 역시 하나의 집단일 뿐입니다. 이익을 추구하는 이도, 그렇지 않은 이도 존재합니다. 저 역시도 그렇고 말입니다.”
그 역시 치열한 삶을 살고 있었다. 나름대로 그어둔 선이라면 문제를 신전 외부로 끌고 나가지 않을 것.
선을 지키는 건 어디까지나 자신을 위해서였다. 생각 없이 폭주하다가는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가버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이피나스 주제에,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으려 하는 벤자민에게서 불쾌한 동질감을 느끼는 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믿을 수 있는 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자도 있다. 찾는 건 당신의 몫이다.
에이르가 내놓은 뜻밖의 친절에 제라니아는 놀란 듯 입을 살짝 벌렸다가, 활짝 웃었다.
“아나샤께서 어떤 분인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던 제라니아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입에 올렸다.
“그럼 언젠가 저희의 길이 겹쳐질 때가 올지도 모르겠네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글쎄요. 세상에 절대적인 건 없으니까요.”
입가를 가리고 웃던 제라니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를 따라 일어서는 에이르를 돌아보며 제라니아는 손을 내밀었다.
“오늘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피나스 에이르.”
악수를 권하는 그 손짓에도 에이르는 물끄러미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기만 했다. 곧 하얀 장갑을 낀 보드라운 손이 제라니아의 손을 움켜쥐고 흔들었다.
매끄러운 비단의 감촉 너머로, 작은 온기가 느껴졌다.
* * *
오랜만에 프란츠는 어전 회의에 참석했다.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건지 귀족들은 평소와 같이 소란스러웠고, 그만큼이나 귀찮았다. 제가 끌려갈 때는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는 제 눈치를 보는 귀족들의 면면을 프란츠는 무심하게 받아넘겼다.
아론 휴스타인은 시종일관 잠잠했다. 그는 조용한 성품답게 앞장서 떠들기보다는 어전에서 오가는 모든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딸을 잃은 슬픔에 젖어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기품이 있었다.
프란츠는 아닌 척 그의 동태를 살폈다. 케라온이 성가시다면 휴스타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이 문제였다. 공작에게서는 슬픔을 제외하고 이렇다 할 감정이 읽히지 않았다. 바이첸 공작 역시 그에게 쉽사리 말을 걸지 못했다.
회의에서는 범인과 더불어, 재판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개중에는 신전의 아나샤에게 협력을 요청하자는 기가 막힌 의견도 존재했으나, 여러 귀족들의 반대하에 기각되었다.
종교와 정치를 분리해야 한다는 이유로. 시커먼 속을 감추고 정론을 읊어대는 귀족들의 얼굴을 프란츠는 묵묵히 기억했다.
회의가 끝나고 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어전을 나섰다. 고요한 시선으로 인사를 건네고 밖으로 나가는 아론의 뒷모습을 조용히 관망하던 프란츠가 찜찜한 듯 미간을 구긴 바이첸 공작을 돌아보았다.
“이걸로 된 겁니까.”
“그렇겠지요.”
영 뒷맛이 좋지 않은지 그는 별로 표정이 좋지 못했다. 무심하게 등을 돌린 프란츠가 옥좌에 앉은 국왕에게 시선을 두었다. 팔짱을 낀 채 앉아 있는 남자의 얼굴에는 권태로움만이 가득했다.
며칠 전, 감옥에서 석방되자마자 프란츠는 곧장 국왕에게로 불려 갔다. 국왕과 아이작 바이첸 공작, 제라니아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라니아에게서 여러 증언들을 토대로 구성한 사건의 진상을 전해 듣고 그들은 고민에 빠졌다. 국왕이 입을 열었다.
“휴스타인이 어떻게 나올지 걱정되는군.”
고명딸의 죽음이 걸린 문제인 만큼, 진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나올지 장담할 수 없었다.
“왕실과 관련된 건 숨기는 게 나을 겁니다. 그게 무엇이든.”
프란츠가 냉큼 대답했고, 아이작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제라니아의 말대로 데릭의 측근이었던 이를 조사하라 일렀지만, 이미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셀리나를 죽인 남자와 그가 동일인일지 모른다는 가정이 확신으로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기이한 사실이라면 데릭 본인도 그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꽤 오랜 시간을 곁에 둔 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데릭은 나름대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남자를 추적하는 일은 앞으로 신전이 전담하게 된다. 왕실에서 감시인을 붙인 데다, 늘 얌전히 상황을 관망하기만 하던 벤자민이 나서겠다고 한 만큼 내부에서 문제가 벌어지진 않겠구나 싶었다.
이런 속사정을 아는 건 여기 모인 사람들과 데릭, 조사를 위해 움직이는 신전의 극히 일부 인물들뿐이었다. 마법에 관한 한 신전의 입은 무거우니 안심해도 될 일이었으나, 끝나지 않은 것들이 있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와중에 이 상황이 발생한 이유가 왕실에도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굳이 알려 좋을 게 없었다.
데릭과 셀리나는 사교계에서도 몇 안 되는 연애결혼을 한 사람들이었지만, 데릭이 휴스타인의 힘을 얻기 위해 셀리나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했으리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가 이 사태조차 이용하려 움직였다는 것만 보더라도, 앙심을 품기에는 충분했다.
국왕 역시 찬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유일하게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는 건 제라니아뿐이었다. 한참을 조용하던 제라니아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제대로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제라니아의 입은 멈추지 않고 생각을 쏟아냈다.
“제가 알아온 바로는, 공작 각하께서는 사리 분별이 확실한 분이십니다. 데릭 왕자 개인에게 원망을 가질지는 몰라도 왕실을 적대할 분이라고 생각지는 않아요. 어쨌거나 범인은 아예 다른 사람이고, 왕실은 그를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할 테니까요.”
살며시 가라앉은 분위기를 깨고 입을 연 건 프란츠였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진실만이 모든 문제의 정답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당신이 봐온 사실만이 휴스타인 공작의 전부일 수는 없듯이.”
긁어 부스럼이라는 말을 돌려 말하는 제 남편을 제라니아는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두 손을 모으고 얌전히 서 있는 모습과는 달리 눈만은 날카롭게 빛났다. 추궁하는 듯한 그 시선을 프란츠는 묵묵히 받아냈다.
“말씀하시는 바에 일리는 있어요.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잖아요. 숨겼다가 들킨다면, 그 후폭풍이 더 크게 올 거예요.”
그걸 어떻게 감당할 거냐고 눈으로 묻는 제라니아에게 프란츠는 들킬 일 없을 거라는 말과 더불어, 조용히 덧붙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가족에게 털어놓는 것 자체가 죽은 왕자비에게는 치욕스러운 일일 수 있습니다.”
범인으로 추정되는 남자에게서 정조의 위협을 받았다고 해도, 세상은 셀리나가 정숙하지 못해 그렇다고 판단할 것이다. 잘못의 여부가 어느 쪽에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제라니아 역시 그런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다. 셀리나가 왜 자신을 찾아왔던 건지도 이해했다. 하지만, 그래도.
하얀 손이 드레스 자락을 와락 그러쥐었다. 지금 떠올린 말을 여기서 내뱉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