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89화 (90/171)
  • 제89화. 차가운 진실 (3)

    “…약속하시는 겁니까.”

    “약속하겠습니다.”

    힘주어 말하는 제라니아의 머릿속에 어젯밤 이렌스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시녀를 붙잡고 필요한 이야기를 다 들은 뒤였다.

    ‘어떻게 하실 참입니까?’

    ‘증거가 없다고 생각할 테니 아마 분명 시치미를 뗄 거예요. 그러니 어떻게든 입을 열게 만들어야겠죠.’

    증거가 있긴 했다. 방금 말한 것과 달리, 시녀의 증언뿐이었지만.

    고문관들에게 넘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대화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입을 열게 만들어야 하니까. 왕이 곧 국가와 동일시되는 만큼, 가벼이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계속 입을 다물어봐야 오르테가 부인한테는 좋을 게 없는 것도 맞았다.

    그도 그럴 게,

    “허가 없이 왕가의 숲에 손을 댄 건 인정합니다만, 맹세코 독살을 시도한 적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국왕 폐하의 건강을 생각해서 내린 판단입니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국왕 독살 시도까지 뒤집어쓸 판국이 아닌가.

    레이나의 대답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던 제라니아의 눈이 살며시 반짝였다. 어제 새벽, 시녀에게 그런 질문을 했었다.

    ‘백작 부인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가 언제입니까.’

    ‘이틀 전입니다.’

    ‘무슨 대화를 나누었죠?’

    ‘왜 점점 국왕 폐하의 몸이 허해지시는지 모르겠다면서, 양을 늘려보라 하셨습니다. 수확할 수 있는 양에 한계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초조하신 것 같았습니다.’

    그 말대로였다.

    오르테가 부인이 국왕을 독살하려 한다는 건 처음부터 말이 되지 않았다. 왕비의 입장을 생각하면 국왕의 죽음은 득이 될 것이 없었다.

    버젓이 왕세자인 프란츠가 살아 있으며 세력 역시 튼튼했다. 국왕이 죽고 나면 지금의 세력 구도를 봤을 때, 프란츠가 왕이 될 것이라는 건 자명했다. 왕이 된 그가 자기 정적들을 곱게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국왕을 약화시키려는 수작질이라 해도 묘했다. 그는 아이렌 왕비를 꽤 아꼈고, 은근하게 왕비의 편을 들곤 했으니까. 세력 구도를 생각했을 때, 프란츠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국왕은 최소한 5년 이상 건강하게 살아 있어줘야 했다.

    그러니 이상한 것이다. 똑똑하기로 유명한 여인이 무엇 하러 그런 자충수를 두겠나.

    왕비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라고 보기에 오르테가 부인의 충정은 사교계에서도 유명했다. 이렌스는 왕비의 세력 중 가장 경계할 만한 상대라 지목했었다.

    그런 상황을 종합해봤을 때, 이 심리전에는 승산이 있었다. 굳이 짓지도 않은 죄까지 뒤집어쓰고 고생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니까.

    이런 문제에 자백을 얻어내기 위해 고문을 가하는 게 드문 일도 아니다. 고초를 겪으면서도 입을 다물 수도 있겠지만, 고통에 익숙하지 않은 여인이 그걸 견뎌낼 수 있을까.

    “일단 알겠습니다만, 한 가지만 질문해도 될까요?”

    “말씀하십시오.”

    “방금 어떤 의도도 없이, 오로지 국왕 폐하를 걱정해서 벌인 일이라 하였죠.”

    의문인 점이 있었다.

    “따로 땅을 내어 키웠어도 될 것을, 왜 굳이 왕가의 숲에서 핀시를 키웠나요?”

    “아무래도 눈에 띄면 곤란하다 여겨서….”

    “그게 이상하단 겁니다. 말한 대로 그냥 효과가 좋은 약초라고만 생각했다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않았나요. 왜 왕가의 숲에 들어가는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존재를 숨기려 한 거죠?”

    몸에 좋은 약초라면 당당하게 제 안뜰에서 키운 뒤 국왕에게 진상을 보내면 그만이었다. 이렇게 몰래 뒤에서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니라.

    아예 핀시의 존재를 숨기려는 게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하는 물건을 그렇게까지 숨길 필요가 있던가?

    “게다가 몰래 먹일 필요 역시 없지 않았나요. 계속 당당하게 진상품으로 보냈으면 되었을 텐데.”

    그는 핀시의 섭취량이 많을수록 국왕의 입장에서는 부작용이 심할 수밖에 없다는 걸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해를 끼치려 한 게 아니라는 게 맞는다면, 그렇다면 굳이 왜?

    앞뒤가 맞지 않았다. 오르테가 부인을 불러온 진짜 목적은 바로 이 문제를 묻기 위해서였다.

    “그건….”

    질문에 둘러대려는지 뭐라 말하려던 오르테가 부인은 일순 멍한 얼굴을 내보였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차오르는 기시감에 제라니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레이나 오르테가는 가만히 제 턱을 만지작거렸다.

    “지금까지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말씀하신 것을 들으니 이상하군요.”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나. 혼란스러워하는 레이나를 지그시 보던 제라니아가 입을 열었다.

    “시녀의 증언에서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고 했는데요. 로브를 입고 얼굴을 가린 남자.”

    “아마 그 상인이 소개해줬던 이일 겁니다. 밭을 만드는 것에 도움이 될 거라고….”

    “얼굴이 기억납니까?”

    곰곰이 생각하던 오르테가 부인은 다시금 고개를 내저었다. 제라니아는 확신했다.

    이 상황에 마법이 개입되어 있음을.

    “우선, 당장 그 상인을 잡아들여야겠군요.”

    제라니아는 레이나에게 몇 가지 질문을 마저 던진 뒤, 병사들을 불러 그를 옥으로 보냈다. 끌려 나가는 레이나를 뒤로한 채 상인의 체포를 명하며 제라니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륵,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울렸다.

    * * *

    그 후, 시간은 쏘아 보낸 화살처럼 쏜살같이 지나갔다.

    자신을 독살하려는 음모에 마법이 관련되어 있다는 제라니아의 보고를 들은 국왕은 노발대발했다. 신전과 유착하고 있는 만큼, 역시나 데릭은 그 사실을 제대로 고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마법은 신전이 관리하는 영역이므로, 사라진 마법사를 찾는 문제는 신전에 맡겨야만 했다.

    물론 신전을 아주 신뢰하지는 않는 만큼 국왕은 기한을 두고, 그 안에 마법사를 찾지 못한다면 신전의 면세 혜택을 거두겠다는 지극히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다.

    신전에서 반발할 것이 분명했으나 국왕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건 일종의 본보기였으므로.

    신전에 공문을 보내면서 대대적인 조치를 취하겠다 선언하는 국왕의 앞에서 누구도 감히 토를 달지 못했다. 아무리 신전의 세가 강하다 하나 왕실은 왕실이었고, 국왕의 분노가 쉬이 가라앉지 않을 것임을 직감한 탓이다.

    셀리나를 죽인 범인이 드러나면서 프란츠는 누명을 벗었으나, 여전히 셀리나와 만났던 일에 관해서는 함구했다. 그는 참고인 조사차 며칠 정도는 구속되어 있을 예정이었다. 아마 데릭의 안배일 것이다.

    기껏 맺은 계약이 무효가 된 것에 그가 분노하고 있으리라는 건 직감했다. 대놓고 티를 낼 수는 없는 만큼 동태는 꽤 잠잠했지만, 그 화풀이가 프란츠의 석방에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건 쉬이 짐작 가능했다.

    그리고 이제 곧, 대신전에서 재판이 열린다.

    셀리나의 죽음만이 아닌, 국왕 독살에 관한 문제까지 얽혀 있어 준비까지 꽤 시간이 걸리겠지만.

    제라니아의 손이 탁자에 놓여 있던 푸른 문양이 그려진 새하얀 찻잔을 집어 들었다.

    티끌 하나 없이 새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응접실의 모습은 무척 고아했다. 고급스러운 장식이 달린 황금색 소파와 매끈한 탁자, 한쪽 벽에는 신화의 한 장면이 생생하게 표현된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었다.

    남쪽으로 나 있는, 새까맣고 우아한 문양이 그려진 금색 커튼이 매달린 창문에서 볕이 들었다. 벽의 구석마다 놓여 있는 관상용 화초들이 푸른 잎사귀를 하늘거렸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신관이 내어준 따뜻한 차를 음미하고 있을 무렵, 문이 열리고 금발의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 방의 벽만큼이나 하얀 피부와 붉은 입술, 또렷한 금빛 눈동자가 갑작스레 찾아온 손님의 얼굴을 가득 담았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그쪽이….”

    “이피나스 에이르 산드리아입니다.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 주십시오, 비전하.”

    대신전의 유일한 아나샤이자 가장 고귀한 자라 통칭되는, 그 능력의 이름만으로도 모든 신관들의 동경을 한 몸에 받는 여인이 제라니아의 눈앞에 있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걸어와 맞은편 소파에 앉는 에이르의 얼굴을 제라니아는 물끄러미 응시했다.

    결혼식장에서 스치듯 본 적은 있지만, 이토록 가까이서 여인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아름답기도 했지만, 신성하다는 말이 이토록 잘 어울릴 수가 있을까. 호박을 떠올리게 하는 투명한 눈동자는 사람을 매료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신관들은 고고한 이들이다. 적어도 신전 내에서만은 왕족들조차 신관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지금의 이 만남도 벤자민의 주선이 아니었다면 성사되지 못했을 것이다.

    잠깐이라면 한번 말을 해보겠노라고 대답하던 벤자민의 말간 얼굴이 제라니아의 뇌리에 잠깐 스쳤다 사라졌다.

    부탁을 하면서도 잘될지 긴가민가했는데, 다행히도 여인은 흔쾌히 만남을 수락했다. 이유가 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지만.

    새하얀 장갑을 낀 손가락이 찻주전자를 가만히 그러쥐고, 제 앞에 마련되어 있는 찻잔에 차를 따랐다. 물 흐르듯이 우아한 동작에 저절로 시선이 갔다.

    호록, 조심스럽게 차를 마시는 소리가 허공에 닿았다 흩어졌다.

    “이렇게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만나 뵐 수 있어 기쁩니다.”

    무표정한 얼굴과 고저 없는 목소리. 비인간적이라 여겨질 만한데도 묘하게 납득이 되었다. 살아 있는 조각상을 보는 기분이 이러할까. 문득 프란츠를 떠올린 제라니아의 눈빛에 따스함이 깃들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신전에서 대대적인 재판이 열릴 예정이지 않습니까.”

    “예, 들었습니다.”

    “혹시, 아나샤께서도 그 재판에 참석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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