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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88화 (89/171)
  • 제88화. 차가운 진실 (2)

    세인이 불꽃을 여인의 얼굴 바로 앞으로 튕겼다. 여인이 기겁하며 외쳤다.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얼굴은 안 보였습니다! 숨기려고 하는 것 같았고요!”

    “그 사람과 왜 같이 움직였죠?”

    “그것도 부인의 명이셨습니다. 밭에 물을 주려고…. 그랬던 것 같은데, 그 이상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며칠 전 일이고 충격적인 만큼 기억은 생생하게 떠올랐지만, 유독 그 남자에 대해서만은 안개를 목도한 것처럼 뿌옇기만 했다. 어쩔 줄 모르는 여인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제라니아가 마저 설명을 요구했다.

    남자가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자, 발소리를 들었는지 다시금 바스락 소리가 들리고 나무 뒤에서 여자 하나가 뛰쳐 나왔다. 어두워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옷차림만 봐도 고귀한 신분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남자는 그 여자를 제압했습니다. 처음에는 거기 서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여자가 계속 도망치려 하니 손가락을 움직이더군요. 여자는 그 즉시 나무토막처럼 굳어 버렸고요.”

    남자가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건 밭을 물로 적실 때부터 짐작했지만,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가까이 다가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더니…. 단검으로 여자의 가슴을 찔렀습니다. 저, 저는 너무 무서워서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가차 없이 사람을 죽이는 남자를 보니, 그 순간만큼은 그가 자신까지도 죽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옆에 서 있던 남자 역시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아무것도 문제 될 건 없으니, 조용히 입 다물고 도우라는 로브의 말을 따라 그들은 시체를 숲 어귀에 버렸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 이토록 멀다 느낀 적이 있었던가? 누군가의 눈에 띄었다간 중첩될 죄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다행히도 자신을 본 사람은 없었다. 가만히 숨을 죽이며 지내려던 중 밭 근처에서 지진이 났고, 국왕이 숲을 수색하겠다는 선언을 하니 초조해졌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남은 핀시를 수확하러 들어온 건 그 때문이었다.

    말하면서도 후환이 두려운지 여인은 중간중간 말을 멈췄다가, 세인이 위협에 못 이겨 다시 입을 열기를 반복했다. 말없이 이야기를 듣던 제라니아가 툭 말을 꺼냈다.

    “이 반지와 귀걸이는?”

    “패물 몇 개 사라진다고 곤란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해서….”

    사건이 잠잠해지면 처분할 생각이었던 걸까. 제라니아는 쓰게 웃었다.

    “…당신이 가져간 반지는, 내 친구의 결혼반지예요.”

    약지에 끼워져 있으니 당연히 알았을 것이다. 망자의 것이니 괜찮다 여긴 걸까. 할 말이 없는지 여인은 입을 다물었다.

    구름이 다시금 걷힌 자리에 고개를 내민 달빛이 은은하게 그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무심결에 하늘을 올려다보던 제라니아의 입매가 굳어 있었다. 피로감을 채 숨기지 못한 녹색 눈동자가 깜빡이며 상념을 털어냈다.

    바빠질 것 같았다.

    * * *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오르테가 백작 부인, 레이나 오르테가는 우아한 동작으로 부채를 들어 제 입가를 가렸다.

    여인을 감옥에 구속하고 감시를 붙인 다음, 제라니아는 바로 국왕을 찾아갔다. 알현이 가능해진 시간이 되자마자, 새벽같이 자신을 찾아온 여인의 말을 들은 국왕은 잠이 덜 깬 눈을 끔뻑거렸다.

    ‘사건의 범인을 찾아오라 했더니, 다른 걸 같이 찾았군.’

    ‘그건 지금 수사 중이니, 아직은 비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래, 무엇을 원하지?’

    ‘찾아야 할 게 있으니, 병사를 일부 빌릴 수 있겠습니까.’

    병사를 보내 국왕의 조찬을 준비하던 왕궁의 주방을 급습했다. 철저한 수색 끝에 기둥형 통에 담겨 있던 보랏빛 가루를 찾아냈고, 다들 이제껏 맛을 내는 향신료인 줄만 알았다며 입을 모아 증언했다.

    아무리 봐도 수상한 물건을 어째서 내버려 두었냐고 추궁하니, 조사하러 나온 이들도 이것을 발견하기는 했으나 독이라고는 생각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그냥 먹기만 하는 것 자체는 별문제가 없었으니까.

    가루가 있다면 이걸 들여온 이도 있다는 뜻이었다. 요리사들 중, 시녀가 묘사한 남자의 외양을 가진 남자를 찾아 체포했다. 얼굴을 확인한 시녀가 그가 맞는다고 인정하는 것까지 절차를 모두 밟았고, 그리고 지금 이 자리였다.

    “말씀하신 대로, 제가 그 향신료를 국왕 폐하께 보냈던 적이 있긴 합니다. 허나 그 후의 일은 모르는 일입니다. 제가 국왕 폐하께 그런 불충을 저지르려 했을 리 있겠습니까.”

    병사들이 삼엄하게 제 주변을 지키고 있는 와중에도 레이나의 몸짓은 지극히 여유로웠다. 하늘빛이 도는 은발을 하나로 단정하게 고정한 채 부채로 입가를 가린 그가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자신의 매력이 무엇인지 잘 아는 자 특유의 미소였다.

    “그리고 애초에 독살 관련으로 조사를 했을 때도, 다들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알고 있습니다. 외람되오나, 그게 독이었다고 하시는 말씀이 쉬이 믿기지 않는군요.”

    “그 향신료를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외국을 오가는 상인에게서 구했습니다. 믿기지 않으신다면 그 상인을 직접 불러다 심문하셔도 좋습니다.”

    과연, 빠져나갈 구멍은 다 열어뒀다 이건가.

    독살 시도와 더불어 시녀의 존재를 철저히 부정할 셈인지 레이나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제라니아의 머릿속이 바삐 굴러갔다.

    왕가의 숲을 멋대로 사유지처럼 사용하는 건 중죄였다. 순순히 털어놓을 리가 없는 게 당연했다.

    “좋은 약초가 있다는 말을 들었고, 실제로 일주일 정도 섭취해보니 효과가 좋더군요. 먹기에도 부담스럽지 않은지라 국왕 폐하께 진상하기 좋겠다 싶었습니다.”

    “처음에 보내신 향신료의 양이 상당하다 들었습니다. 외국에서도 구하기 어려웠을 텐데, 더 구하기 쉽고 좋은 약초들이 많은데도 굳이 이걸 진상품으로 고른 이유가 있나요?”

    “가격이 상당하긴 했습니다만…. 비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원래 진상품은 본디 가치보다 그 귀함이 가장 우선되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토록 왕실을 생각해 주시다니, 충심이 대단하시군요.”

    “왕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가져야 하는 태도라 생각할 뿐입니다.”

    미꾸라지처럼 심문을 쓱쓱 피해나가는 모습이 퍽 얄미울 만도 하건만 제라니아는 미동조차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약간의 미소가 어려 있는 것이 의아하다 싶을 찰나였다.

    제라니아가 병사에게 손짓했다. 병사가 작은 풀잎 하나를 가져와 제라니아의 손에 쥐여주었다.

    제라니아는 미동조차 없는 여인의 손에서 부채를 빼앗아 접어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따그락, 부채와 나무 탁상이 부딪히는 소리가 고막을 긁었다.

    “이게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양 태연하게 대답하는 레이나의 앞으로 제라니아는 핀시를 내밀었다. 잎사귀의 끝이 창문 너머로 들이닥치는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빛났다.

    “끝을 한번 만져 보시겠어요?”

    레이나는 침묵했다. 쉽사리 손을 뻗지 못한 채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레이나를 보며 제라니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려운 부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왜 그러시나요?”

    “아닙니다.”

    여인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노란색 끄트머리를 살짝 만지고 떨어지는 하얀 손가락이 못 만질 것을 만졌다는 양 살며시 까닥거렸다. 차분한 음성이 그에게 다시금 종용했다.

    “좀 더 제대로 만지셔야죠.”

    “갑자기 이런 걸 왜 시키시는 겁니까?”

    “글쎄요. 부인께서 지금 제게 질문하실 처지였나요?”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온화한 얼굴을 하고서 제라니아는 어서요, 라고 목소리를 내었다. 천천히 손을 내미는 여인의 앞으로 제라니아는 풀을 확 들이밀었다. 저도 모르게 몸을 물린 뒤 레이나는 아차 싶은 얼굴을 했다.

    “왜 피하셨나요?”

    “…….”

    “꼭, 이 잎사귀 끝에 독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여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제라니아는 싱긋 미소 지었다. 닦으라는 듯 그가 내민 손수건을 레이나는 받지 않았다. 그걸 받는 순간 자신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시인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기분 탓인지, 손가락 끝이 가려운 것도 같았다.

    자꾸만 만지작거리려는 제 손을 필사의 인내로 멈춘 채, 가만히 앉아 있는 레이나를 녹색 눈이 빤히 응시했다. 모든 것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깊고 투명한 눈동자가 여인을 가득 담아냈다.

    “간단한 확인 절차였을 뿐이니 그렇게 놀랄 필요 없어요. 부인과 그 시녀가 연관되어 있다는 증거는 이미 확보한 상태니까.”

    레이나의 입이 살짝 달싹거렸다가, 도로 다물어졌다.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상대에게 제라니아는 쐐기를 박듯 말했다.

    “설마 그 시녀가 아무런 대책 없이 부인과 협력했으리라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들키면 목이 날아가는 건 그쪽도 마찬가지인데요.”

    “…….”

    “설마 싶으시겠지만 세상에 증거가 남지 않는 일은 없답니다, 오르테가 부인. 그렇기에 제가 부인을 붙들고 이 자리에 앉아 있게 된 거 아니겠어요.”

    태연하게 말을 늘어놓는 제라니아를 보며 레이나는 고민했다. 정말 증거를 잡았나, 아니면 제게 자백을 받아내고자 교묘하게 말을 돌리는 건가.

    “증거가 있다고 하면서 왜 당신을 붙잡고 이런 쓸데없는 소모전을 벌이고 있나, 그런 생각을 하나요?”

    그 속내를 알겠다는 양 날카롭게 파고드는 목소리와 달리 화사한 미소가 제라니아의 입가에 머물렀다.

    “그 증거를 넘기면 당신을 고문관들에게 넘기는 걸 피할 수 없거든요. 국왕 폐하의 안위가 걸린 일인 만큼, 왕비 마마가 나서도 선처하는 건 불가능하죠.”

    바보도 아니고 그 증거가 뭔지 당신한테 말하겠나. 없애려고 들 게 뻔한 것을. 생략된 말을 읽어낸 레이나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증거를 가졌는데, 내가 왜 곧장 당신을 고문하지 않고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요.”

    “…….”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으니, 차라리 협상하자는 겁니다. 나는 사지가 멀쩡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싶거든요. 지금 털어놓는다면 투옥만으로 끝날 수 있게 조치를 해줄 의향이 있답니다. 물론 그 말이 진실이라는 가정하에 말이지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고문에 대해 언급하는 제라니아를 레이나는 멍하니 응시했다. 다과회에서 봤을 때도 말솜씨가 있는 여인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인상이었던가. 저토록 매정한 느낌이었던가.

    작게 난 창문에서 쏟아진 새하얀 한낮의 빛이 책상 언저리와 그들의 머리 위로 아른거렸다.

    개미 하나 죽이지 못할 것처럼 얌전하고 차분한 귀족 여인으로 보이는 이의 입에서 나오는 냉정한 발언들이 괴기스러운 느낌을 자아냈다. 살짝 밀려드는 한기에 레이나는 제 팔을 감싸듯 쥐었다.

    문득 그 얼굴이 바이첸 공작을 닮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겉만 보면 전혀 위협적이지 않지만, 이 왕궁에서 가장 만만치 않은 남자.

    닫혀 있던 레이나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여, 말을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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