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87화 (88/171)
  • 제87화. 차가운 진실 (1)

    바깥으로 나오자, 차가운 공기와 내려앉은 어둠이 셀리나를 반겼다. 처소에서 나와, 가끔씩 망을 보기 위해 돌아다니는 위병들을 지나쳐 조심히 걸어가던 셀리나의 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셀리나가 달빛이 닿지 않는 그늘진 곳에 몸을 숨겼다. 고개를 살짝 내린 그가 오른손에 쥐고 있는 두루마리를 보았다.

    ‘정말, 이래도 될까?’

    시간이 지난 탓일까, 얼음처럼 단단하던 확신이 햇빛에 녹아내리듯 점차 물러졌다. 그도 그럴 게, 셀리나의 인생에서 이만큼 거대한 일탈은 없었다.

    아니, 정정하자. 배신이었다. 남편이 자신을 용서할 리 없었다.

    가족한테 이야기한다 한들 아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고작 그런 이유로 이렇게까지 하냐고 하겠지.

    두루마리가 손 안에서 살짝 구겨졌다. 바닥을 굴러다니던 낙엽이 고민하는 셀리나의 발을 훑고 지나갔다. 싸하게 부는 바람 때문인지 코가 시큰거렸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그때, 근처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셀리나는 저도 모르게 종이를 꼭 쥐었다.

    위병일까?

    서 있는 장소에서 빼꼼 눈만 내밀어 제 뒤에 오던 사람이 누군지 확인한 셀리나의 눈이 살짝 커졌다.

    ‘어라.’

    저 자는.

    * * *

    깜깜한 밤, 겨울이 다가와서 그런지 제법 건조하고 쌀쌀한 바람이 나뭇잎들을 씻어 내리는 소리가 귓가에 음산하게 울렸다.

    새까만 먹구름을 걷어내고 옆이 살짝 이지러진 둥근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을 받아 좁은 땅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핀시의 끄트머리가 노랗게 빛났다.

    풀숲에 몸을 숨긴 상태로, 제라니아는 가만히 숨을 죽였다. 그 옆에 모여 있는 이들 역시 숨소리 하나 허투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그들은 덫을 놓은 채, 사냥감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가의 숲에서 그런 식물을 재배한다고요? 간이 엄청 큰 거 아닙니까?’

    ‘등잔 밑이 어둡다 하잖아. 게다가 잘 알려지지 않은 식물이라면 더더욱 들킬 염려는 덜한 거 아니야? 이 숲은 넓어. 왕가의 소유인만큼 함부로 들어가는 사람도 없지. 아지트로는 안성맞춤이라 생각하는데.’

    핀시를 왕궁 밖에서 재배했다면 잎사귀가 떨어져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냥 가루로 빻아 가져오면 되었을 테니. 그렇다는 건 왕궁 내에 서식지가 있다는 뜻이었다. 남들 눈에 띄지 않고 그런 걸 키울 만한 장소라면 저 숲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서식지를 찾는 것은 세인이 있어 크게 어렵지 않았다. 숲에서도 제법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밭에 핀시가 가득 돋아 있었다. 누가 봐도 사람의 손길이 묻어나는 장소였다.

    그것을 확인한 뒤 그들은 다시 논의에 들어갔다. 세인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하, 하지만 그 범인이 오늘 밤에 안 오면 어떡하죠? 시간이 없다 하지 않으셨나요.’

    ‘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오게 만들어야죠.’

    제라니아는 세인에게 부탁해 군락이 있는 서쪽 숲 주변에 지진 비슷한 것을 일으켰다. 푸드덕거리며 새들이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그것을 목격한 이들이 곧장 왕에게 보고를 올렸고, 국왕은 곧 숲에 병사들을 파견 보냈다. 물론 미리 협력을 요청해둔 덕에 병사들은 서식지를 찾기보다는 우선은 경계선을 훑는 것에 그쳤다.

    왕자비가 겪은 변고도 그렇거니와 지진까지, 불길한 징조가 연달아 나타나는 것처럼 보일 법했다. 국왕은 지진의 원인을 반드시 파악하겠다며 내일은 좀 더 확실하게 숲을 수색할 것이라 선언했다.

    제아무리 토끼굴에 숨어 있다 한들 연기를 들여보내면, 궁지에 몰린 토끼는 결국 밖으로 뛰쳐나오기 마련이다.

    바스락, 수풀이 흔들렸다.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나무들을 헤치고 나온 새까만 인영이 달빛을 받아 그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를 하나로 땋은 여인이 소쿠리를 들고 등장했다. 나이는 스물네다섯쯤 되었을까. 키는 보통 정도였고 삐죽 올라간 눈꼬리와 꾹 다물린 입술, 콧잔등에는 주근깨가 박혀 있었다.

    살금살금 걸어온 여인이 달빛에 의존해 열심히 핀시를 뽑기 시작했다. 허둥지둥 핀시를 수확하는 여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제롬과 리암이 수풀 밖으로 뛰어나갔다. 제 등 뒤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뒤를 돌아본 여인이 비명을 내질렀다.

    “꺄악!!”

    소쿠리를 챙기지도 못한 채 일어나 도망가려던 여인은 순식간에 둘에게 제압되어 바닥에 고개를 박았다. 축축한 흙에 얼굴을 묻은 채 바둥거리는 여인의 손발을 밧줄로 꽁꽁 묶었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밤공기를 찢었다.

    “이거 뭐야. 당신들은 누구야?!”

    “그건 우리가 묻고 싶은 말인데.”

    흡사 괴한을 보는 시선에 리암이 어이가 없다는 듯 눈가를 찡그렸다. 물론 굳이 따지면 그들이 괴한인 건 맞았다.

    “‘핀시’를 가져다 어디에 쓸 셈입니까?”

    뭐라 더 득달같이 떠들 것 같던 여인은 제롬의 질문을 듣자마자 입을 꾹 다물었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여인이 입을 열었다.

    “그게 뭔데? 난 그런 거 몰라! 당장 이거 안 풀어?!”

    어떻게든 도망치려는 듯이 바닥에 앉은 자세로도 엉덩이를 움직여 뒤로 움직이려는 여인의 뒷덜미를 제롬의 손이 꽉 붙들었다. 우악스러운 손길이 그에게 움직이지 말라 경고하는 것 같았다.

    뻣뻣하게 굳어버린 여인의 앞으로 뒤에 숨어 있었던 제라니아와 이렌스, 세인이 다가왔다. 제라니아는 여인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지시했다.

    “움직이지 못하게 꽉 붙잡고 있어요.”

    “꺅! 이거 놔!”

    제 몸을 더듬는 손길에 여인은 소름이 돋은 듯 비명을 질렀다. 여인이 그러거나 말거나 철저히 몸수색을 하던 제라니아는 곧 한숨을 토해냈다.

    “…하.”

    여인의 옷 주머니에 들어 있던 반지와 귀걸이, 익숙하게 봐왔던 물건에 착잡한 눈길을 내보였던 제라니아는 곧 감정을 추스르고 냉정하게 말했다.

    “당신이 왜 죽은 왕자비의 물건을 가지고 있나요?”

    “…….”

    발뺌해봐야 소용이 없어졌다는 걸 깨달았는지 여인은 침묵을 선택했다. 다시금 흘러가는 먹구름이 조금씩 보름달을 먹어치우더니, 곧 완연한 어둠이 세상을 덮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제라니아의 뒤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비전하.”

    고개를 돌리자 부드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린 채 서 있는 세인의 얼굴이 보였다.

    “이건 제게 맡겨 주십시오.”

    “당신한테?”

    “예.”

    “해보세요.”

    세인이 성큼성큼 걸어 여인의 앞에 섰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검지 끝에서 새하얀 불꽃이 화르르 타올랐다. 세인은 싱글 웃으며 여인의 눈앞으로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타오르는 불꽃이 여인의 겁먹은 눈동자에 가득 담겼다.

    “자, 말하지 않으면 아픈 꼴을 당하게 될 겁니다?”

    더없이 산뜻한 음성과 달리 위협적으로 흔들거리는 불꽃이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얼굴을 지질 것처럼 아주 천천히 다가오는 불에 여인은 눈을 꽉 감고 소리쳤다.

    “오, 오르테가 백작 부인의 명을 받았습니다.”

    느닷없이 튀어나온 이름에 모두는 시선을 교환했다. 왕비의 최측근이자 책사로 유명한 여인의 이름이 대관절 여기서 왜 튀어나온단 말인가?

    하얀 불꽃에서 얕은 불티가 튀었다. 차마 눈을 뜨지 못한 채 여인은 재차 외쳤다.

    “저, 저는 이게 뭔지 전혀 모릅니다! 그냥, 이걸 채집해 오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입니다.”

    “거짓말이 서툴군요.”

    차분하게 단언하는 목소리에 여인의 몸이 흠칫 튀었다. 제라니아는 피곤하다는 듯 제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일단, 이건 원래였다면 여기서 자랄 수 있는 식물이 아니지 않습니까. 조건을 아주 살뜰히 맞춰놨던데, 키우느라 고생 많았겠습니다. 그러니 채집이 아니라 재배라 해야 맞겠지요.”

    물을 들이부은 것처럼 축축하고, 주변의 흙바닥과 달리 모래가 덮여 있는 땅은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역력했다.

    “게다가, 왕가의 숲에 허가 없이 멋대로 들어오는 것부터가 중죄에 해당한다는 걸 알 텐데요.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을 처형한다 해도 정당방위가 될 겁니다.”

    “…….”

    “그리고, 아직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왕자비의 물건을 왜 당신이 가지고 있습니까?”

    서릿발처럼 냉랭한 음성으로 제라니아는 여인을 다그쳤다. 겨우 눈만 뜬 채, 여전히 말이 없는 여인에게 직설적인 질문이 떨어졌다.

    “당신이 왕자비를 죽였습니까?”

    “아, 아닙니다!”

    화들짝 놀라 즉각 대답하는 여인을 지그시 바라보던 제라니아가 확언했다.

    “역시, 한패가 있군요.”

    “…….”

    “누구죠?”

    셀리나는 저항의 흔적 없이 죽었고, 눈앞의 여인은 척 보기에도 마법사가 아니었다. 핀시와 관련된 게 여인이라면 마법사는 따로 있다는 뜻이 된다.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여인은 혼란스러운 듯 시선을 한곳에 두지 못했다. 망설이는 여인의 고민을 덜어주려는 듯 세인이 웃는 얼굴로 손가락을 한 바퀴 돌렸다.

    “자~ 어서 말하지 않으면 재미없어질 거예요.”

    그 말과 동시에 작은 불꽃 몇 개가 여인의 주변에 불쑥 등장해 그를 감쌌다. 실처럼 가느다란 머리카락 끝이 머리 위에 떠오른 불꽃에 닿아 타들어 가며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세인이 지휘하듯 손가락을 휙 들자, 불꽃 중 하나가 여인의 팔에 옮겨붙었다. 아악! 울음을 닮은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다른 불꽃들에 닿을까 여인은 제대로 몸부림을 치지도 못했다. 새하얀 불꽃에 먹혀 피부가 까맣게 타들어 갔다.

    “하나 더 갈까요? 아, 물론 죽이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속 모를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은, 사람을 돕는 일에 보람을 느낀다고 말하던 선량한 신관의 얼굴과는 거리가 멀었다.

    상대가 악당이라 그런 걸까?

    그렇더라도 역시 사람은 겉만 봐선 모른다고, 제라니아는 재차 생각했다.

    “마, 말하겠습니다!”

    다급한 외침에 불꽃 하나를 더 붙이려던 세인의 움직임이 멈췄고, 팔에 붙었던 불꽃 역시 꺼졌다. 화상을 입은 팔을 차마 건드리지도 못한 채, 눈물을 줄줄 흘리는 여인의 얼굴은 퍽 처량했다.

    “그날, 어떤 남자한테 이걸 갖다 주던 차였습니다.”

    “남자?”

    “예…. 다 자란 것들을 조금씩 수확해서 밤마다 그에게 넘겼습니다. 그런 명령이었으니까요.”

    여인이 이 식물을 키우게 된 건, 시녀들 중 손꼽히게 원예를 잘하는 이였기 때문이었다. 워낙 까다로운 식물인 만큼 아무한테나 재배를 맡길 수도 없었고, 여인은 돈이 필요했다. 높으신 분들이 이걸로 뭘 할지는 그가 알 바 아니었다.

    “왜 이런 까다로운 식물을 키우는지, 궁금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 그렇지만 깊이 알았다간 정말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묻지 않았습니다.”

    왕가의 숲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기겁했으나, 1년이 넘게 다니다 보니 어느덧 익숙해졌다.

    눈에 띄지 않아야 했기에 주로 밤에 나다녔고, 위험과 비례해 주머니에는 차곡차곡 평생 시녀 일만 해서는 만져보지도 못할 돈이 쌓여갔다.

    그렇게 돈으로 이루어진 얄팍한 종잇장 같은 충성심은 고통과 함께 불에 타버려 잿더미가 된 상태였다.

    “그 남자는 어떻게 생겼습니까?”

    “제법 덩치가 있고, 갈색 머리에 길쭉하게 뻗은 눈매와 얇은 입술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남자의 생김새를 보다 자세하게 서술하던 여인은, 그날 한 사람이 더 있었다고 했다. 새까만 로브를 입은 호리호리한 남자.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묘한 긴장감에 분위기가 확 조여들었다. 제라니아가 질문했다.

    “그는 어떻게 생겼죠?”

    “그게….”

    숲에서 나온 여인은 핀시를 담은 소쿠리를 덩치 큰 남자에게 넘기려던 순간, 인기척을 느꼈고 놀란 마음에 그만 바구니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급하게 그쪽을 돌아보니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다.

    순식간에 머릿속이 백지처럼 변했다. 설마, 누가 있나? 들킨 건가? 어떻게 하지?

    그때, 로브를 쓴 남자가 움직였다.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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