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누명 (7)
그가 주운 건 길쭉한 모양에 끝이 세 갈래로 갈라져 있는 푸른 잎사귀였다.
손바닥보다 살짝 긴 크기에 폭은 손가락 한 마디 정도였고, 하얀 솜털이 살짝 노란빛을 머금은 풀잎 끝에 돋아 있었다.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자 미미하게 달콤한 향기가 났다.
그냥 보기엔 별것 아닌 잎사귀 하나일지 모르나, 느껴지는 위화감에 제라니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살펴봐도 이 잎사귀와 비슷한 모양의 나무나 풀이 없었다.
낙엽을 마저 헤쳐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제라니아는 손짓으로 이렌스를 불렀다.
“이렌스, 이게 뭘까요?”
“일단 보기에는 나뭇잎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주변에 있는 나뭇잎이나 풀들과는 확실히 다르게 생겼어요. 뭔지 알겠어요?”
나뭇잎을 유심히 살펴보던 이렌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동자에도 의문이 차올랐다.
“식물도감을 찾으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멀찍이 서 있던 세인이 입을 열었다.
“희미하게 마력의 흔적이 느껴지긴 합니다.”
“추적할 수 있겠어요?”
“…너무 양이 적어서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현장은 깨끗했고, 이렇다 할 단서라곤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제라니아의 손에 들린 풀을 제외한다면.
“조사해 봐야겠어요.”
잘못 쥐면 바스러질까, 조심스럽게 붙잡은 풀잎이 바람을 따라 살랑거렸다.
“대체 이게 뭘까….”
제라니아가 제 손에 들린 잎사귀를 깃펜처럼 흔들며 중얼거렸다. 난잡하게 흩어져 있는 책들에는 식물로 보이는 그림과 온갖 글자들이 적혀 있었다.
어제 이것을 발견한 뒤로 곧장 도서관에 틀어박혀 식물에 관한 서적을 찾아봤으나, 그 어디에도 이 풀에 관한 설명은 적혀 있지 않았다.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셀리나의 죽음이 알려지자마자 왕궁은 철통같이 통제되었고,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했다. 셀리나가 죽은 날 밤부터 왕궁을 나간 이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아직 범인은 이 안에 있을 것이다.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은 걸 보면 절대 들키지 않으리라 안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데릭 쪽은 꽤나 요란스러웠다. 떠들썩하게 움직이는 걸 보면 제법 그럴듯해 보였으나, 외부에 보여주고자 행동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이쪽에 감시자가 아주 붙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적당히 따돌릴 만했다.
왕비 쪽은 꽤나 조용했다. 괜히 문제에 끼어들어 봐야 이득은 없고 손해만 보는 상황이니 당연하겠지만.
약재방에 갔던 티레인에게서 며칠 동안 약재가 분실되거나, 마취제로 사용되는 약초를 가져간 이가 없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기가 차 웃음을 뱉었다. 단서가 없어도 너무 없는 게, 괜히 데릭이 수사를 포기한 게 아니구나 싶었다.
이 사건에 마법이 연관되어 있다는 건 확실해졌지만 현장에 남아 있는 마력이 워낙 미미해 누구의 것인지, 어떤 마법을 썼는지 판별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궁정에 머무는 신관들을 이 짧은 시간 내에 전부 조사하는 건 불가능했다. 당장 수백이 넘는 숫자였고, 대부분이 밤에 알리바이가 없었다. 외부에서 침입한 마법사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마법에 관련된 문제라고 알리면 국왕에게서 좀 더 본격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왕국은 마법 관련 범죄에는 특히나 더 냉정했으므로.
하나 그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아무런 단서가 없는 건 여전한데. 요란스럽게 움직여봐야 상대의 경계심을 부추기는 꼴이었다.
결국 남은 단서라곤 이 풀이 유일하다시피 했다. 사흘 중 귀중한 하루를 통째로 할애했을 정도로.
이것에만 매달릴 수는 없는지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재판에 필요한 준비 역시도 같이 진행 중이었다.
도서관에 처박혀 정오가 다 되도록 책을 읽기만 하던 제라니아는 마지막으로 꺼낸 책의 책장을 덮은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무 의자의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조용한 공기를 흐트러뜨렸다.
책을 정리한 뒤 숄을 챙겼다.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던 이렌스가 도서관을 나가려는 듯 움직이는 제라니아의 뒤를 따랐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리암 역시 그들과 합류했다.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이런 걸 잘 알 법한 사람한테요.”
그들이 부지런히 걸어 도착한 곳은 널따란 왕궁의 정원이었다. 화려한 꽃들이 철저한 관리하에 곳곳이 피어 있었고, 군데군데 정원사들이 조경수의 가지를 치고 있거나 화단을 정돈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제라니아는 정원사들에게 다가가 풀잎을 내밀었으나, 모두가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들을 하나하나 지나쳐 정원사들 중 제일 연륜이 있어 보이는 이에게로 다가갔다. 구근을 심고 있던 노인이 황급히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였다.
“혹시 이 잎이 뭔지 알겠어요?”
제라니아가 내민 잎을 받아 든 정원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살펴보았다. 기억을 더듬듯 한참 동안 말이 없던 그가 탄성을 내질렀다.
“오오, 이건 핀시가 아닙니까.”
“핀시?”
그게 뭐냐고 묻자 늙은 정원사는 나직한 목소리로 고했다.
“예, 그렇사옵니다. 피를 잘 돌게 하고 속을 보호하는 데에 효과가 있는 식물입니다. 혹시 끝에 노란 부분을 만지신 건 아니겠지요?”
“거길 만지지는 않았습니다.”
“다행입니다. 독이 있으니 가급적 손대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풀에 관해 비교적 잘 알고 있는 듯한 정원사에게 제라니아는 조용히 물었다.
“…왕궁에 있는 도감에서는 보지 못했는데, 혹시 그 이유를 알고 있나요?”
“특정 조건을 충족하는 장소에서나 겨우 자라나기 때문에, 아는 이가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보다 구하기 쉬운 좋은 약초가 이미 충분히 많기도 하고 말이지요. 모양이 특이하지 않았다면 기억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종이가 만들어지고, 많은 것들이 기록되기 시작했으나 아직까지도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것들이 있다. 지역 내에 전래되는 설화라든가 민요들이 그러했다. 이 식물 역시 그렇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되었다.
“자세히 좀 말해 보겠어요?”
나이가 지긋한 만큼, 정원사의 입이 열리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그는 느릿한 동작으로 핀시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금빛 저주’라는 뜻을 가진 이 식물은 크게 홍수가 난 뒤의 질퍽한 토양에서나 자라며, 그늘이 드리워진 서늘한 지역을 서식지로 삼는다. 특히 모래나 자갈이 섞여 있는 흙에서 유독 잘 자라는데, 경쟁하는 다른 식물이 자라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 내피에는 보랏빛이 감돌고 있으며, 독성이 있어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는 부분을 떼어내고 빻으면 보라색 가루가 된다.
“다만 섭취할 때 주의해야 합니다. 몸이 허한 사람이 먹어야 효과가 좋지, 건강한 사람이 지나치게 복용하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독이요?”
조심스럽게 묻자, 정원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빻아서 가루를 낸 뒤 물에 타 마시거나 음식에 살짝 뿌리는데, 단맛이 강한 만큼 먹기에 어려운 식물은 아닙니다.”
정원사의 설명을 잠자코 듣고 있던 제라니아의 머릿속에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 그럴 리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건강하다는 건…. 어떤 경우를 말하는 거죠? 건강하면 건강할수록 독이 되는 건가요?”
제라니아의 심각한 표정을 무엇으로 해석한 건지, 노인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혹시 싶어 말씀드린 것뿐, 엄청난 독이라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
“충분히 피가 잘 돌고, 몸이 따뜻한 사람이 장기간에 걸쳐 섭취한다면 해가 될 수도 있겠지요. 다만 그것도 적은 양만 복용한다면 크게 문제가 없을 겁니다.”
“정량이 어느 정도인가요? 어떤 부작용이 있죠?”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사옵니다. 아마도 기력이 쇠하거나, 피가 잘 돌지 않아 손발이 차가워지거나, 기대한 것과 반대의 효과가 나타나리라 예상할 뿐입니다.”
고개를 조아리는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제라니아의 눈동자에 여러 상념이 떠올랐다. 핀시라 부른 잎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정원사가 의아한 듯 질문했다.
“그런데 외람되오나,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허가합니다.”
“이 핀시를 도대체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 그걸 왜 묻는 거죠?”
“무례한 질문이라면 송구합니다. 다만 잎의 상태를 보니 꺾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아서 말입니다.”
줄기에 물기가 남아 있다며 중얼거리는 노인의 말을 제라니아는 놓치지 않았다.
“언제쯤 꺾은 것으로 보이나요?”
“으음, 확답하기는 어렵사옵니다만 줄기가 채 마르지 않은 걸 보니, 못해도 사흘이 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몇 가지를 더 질문한 뒤,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제라니아는 일행과 함께 그 자리를 벗어났다. 세자궁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발걸음이 못내 빨라졌다. 제라니아가 불쑥 입을 열었다.
“이거, 비약일 수도 있는데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건 비약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같은 것을 생각하는지 이렌스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유일하게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리암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는 우선 침묵을 선택했다.
세자궁에 도착한 다음, 비어 있는 방으로 들어간 제라니아는 재빨리 문을 닫았다. 제롬과 세인에게 연락을 넣은 뒤, 손거울을 꼭 쥔 채로 그가 단언했다.
“이 풀을 누군가 재배하고 있어.”
“재배라고요?”
“꺾은 지 얼마 안 됐다면 근처에 서식지가 있단 뜻이지. 조건을 들어보면 절대 이 근방에서 자연적으로 나타날 만한 풀이 아니야. 적어도 수도에서 홍수 비슷한 게 났던 적은 없었어. 내가 살았던 몇 년간.”
술술 내뱉는 제라니아의 얼굴이 자못 진지했다.
“어쨌든 이유는 몰라도, 그 자리에 핀시를 가진 사람이 있었을 거야. 셀리나와 엮였을 때 어쩌다 보니 한 장을 떨어뜨렸을지도 몰라. 그게 늦은 밤이었다면 주변이 깜깜했을 테니 그 사실을 알지 못했을 수 있지.”
왜 이런 까다로운 조건하에서나 자라는 풀을 구태여 재배하고 있을까. 답은 쉽게 나왔다.
“일단 재배지를 찾아야 해. 분명 범인과 관련되어 있을 거야.”
딱딱한 얼굴로 이렌스와 눈짓을 주고받는 제라니아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리암이 눈치껏 질문했다.
“범인의 단서를 찾은 건 그렇다 쳐도, 표정이 심각한 이유가 더 있으신 거죠?”
“섭취하기 쉽고, 과하게 복용하면 해가 된다 하지 않았습니까. 건강한 사람일수록. 하지만 독은 아니죠.”
이렌스가 재빨리 말을 받았다. 조금의 웃음기도 없는 얼굴로 그는 기꺼이 제라니아가 비약이라 말한 가능성을 언급했다.
“어쩌면 저희는, 국왕 폐하를 독살하려던 자들의 꼬리를 잡은 건지도 모릅니다.”
쉰을 향해 달려가는 나이에도 흰머리 하나 없이 여전히 정정한 국왕의 모습이 셋의 뇌리에 떠올랐다.
독 때문인지 지금은 혈색이 크게 좋지 않았지만, 왕국의 사자라 불리며 호령을 치던 무인인 만큼 그는 체질적으로 무척 건강한 자였다.
국왕 본인이 독을 먹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꺼냈지만, 대체 무엇을 어떻게 섭취하고 있는지는 계속 알아내지 못하던 차였다. 보다 철저히 음식을 가려내고 기미를 할 때도 이상 징후를 보이는 자는 없었다.
하지만 원인이 그 자체로는 독이 아닌 식물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비약일까 우려하면서도 이렌스와 제라니아는 이미 반 이상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풀이 어디 있다는 겁니까?”
제라니아는 말없이 창문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너머로 푸르게 물든 숲이 내다보였다.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바로 저기.”
저곳에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