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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85화 (86/171)

제85화. 누명 (6)

숲으로 들어가는 초입,

마냥 푸르던 숲은 늦가을을 맞아 제법 알록달록하게 물들었다. 간간이 풀이 돋아난 흙바닥 위로, 바람에 맞춰 흐늘거리던 나무들이 버석거리는 잎사귀 몇 장을 떨어뜨렸다.

셀리나의 시신이 발견된 장소라 그런지, 그 고요함이 묘하게 소름 끼쳤다. 풀이 눌려 있는 바닥에 검붉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제라니아는 그 주변을 조심히 돌아다녔다. 바닥을 샅샅이 훑고, 무언가 이상한 점이 없는지를 차근히 살폈다. 이미 다 조사한 건지, 아니면 필요 없다 생각해서인지 몰라도 병사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의 탐색 끝에 제라니아는 결론을 내렸다.

“셀리나가 죽은 장소는 여기가 맞는 것 같아요.”

셀리나의 몸에서 피가 흐른 곳은 칼이 꽂힌 심장뿐이었다. 만약 다른 장소에서 죽었고, 여기로 옮겨졌다면 바닥에 이 정도로 핏자국이 짙게 남을 리 없었다.

“생각보다 더 외진 곳이군요.”

그를 따라 현장을 빙빙 돌던 이렌스가 하늘을 쳐다보았다. 까악, 까악. 하늘 위를 날아가는 까마귀들이 그들을 비웃듯 울음소리를 냈다.

“진짜 대충 조사하고 묻을 셈인 건가? 어떻게 병사가 하나도 없어? 매정한 인간일세.”

멀찍이 서서 망을 보고 있던 리암이 말을 얹었다. 사랑을 위해 아버지랑 반목할 각오까지 했던 사랑꾼답게 그는 데릭의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데릭과 이야기를 끝낸 뒤, 그들은 셀리나를 처음 발견했던 정원사와 대화를 나누고 곧장 이곳으로 향했다. 심문을 받고 나온지라 묘하게 해쓱해 보이던 늙은 남자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 제가 관리해야 할 구역으로 가던 도중에, 숲의 초입에 무언가가 보였습니다. 사람이 누워 있는 것처럼. 멀리서 봤을 때는 어떤 인간이 감히 왕가의 숲에서 저러고 있나 했는데…. 그게 아니더랍죠.’

심장에 칼이 박혀 죽어 있는 시신을 봤을 때 그는 기겁했다. 척 보기에도 귀한 신분으로 보이는 이인 만큼 함부로 손을 댈 수도 없었다. 허둥지둥 다른 사람에게 가 이 사실을 알렸고, 그 뒤로는 병사들에게 끌려가 제가 본 것들을 모두 소상히 고해야 했다.

시신을 옮길 때 되도록 온전히 보존하고자 노력했다고 하니, 반지와 귀걸이는 아마 그때부터 없었을 것이다. 패물이 왜 없어졌는가에 대한 의문은 차치하더라도 이상했다.

“분명 데릭 전하의 처소와 세자궁 사이라면 사이긴 한데….”

“굳이 따지면 중간에 길을 이탈한 느낌이죠.”

“맞아요. 이렇게 외진 곳까지 올 일이 뭐가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어젯밤 프란츠를 만난 건 사실이고 이른 아침에 발견되었으니, 셀리나가 죽은 건 아마 그사이였을 것이다. 새벽이나 다름없는 시간에 왜 굳이 이곳으로 온 걸까.

“풀이 수북한 편이라 발자국 정도는 남아 있을 줄 알았는데, 정말 아무것도 없군요.”

이렌스가 난감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낙엽들을 길쭉한 나뭇가지로 뒤적거리던 제라니아가 무심하게 말했다.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 완전범죄는 없어요.”

흔적이 없다는 것조차 단서가 될 수 있었다. 몇 가지 가능성을 속으로 상정하며 제라니아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이것저것 의문인 건 많지만…. 범인이 왜 셀리나를 죽였는지 모르겠어요. 동기가 영 짐작 가지 않네요.”

한탄처럼 나오는 음성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뒤에 우두커니 서 있던 이렌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비전하.”

“네.”

“…이것만은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 아룁니다만, 셀리나 비전하께서 귀중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귀중한 무언가요?”

이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빼앗기 위해, 누군가가 그분을 해쳤을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가요?”

“짐작일 뿐이라, 확률은 반반입니다.”

이렌스는 말을 아꼈고, 제라니아는 더는 묻지 않았다. 달리 말을 더 꺼내려는 순간 들려오는 발소리에 그들은 뒤를 돌아보았다. 갑옷을 입은 제롬이 제라니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비전하.”

“제롬 경!”

제롬의 옆에는 제법 통통한 체형을 가진 작달막한 남자가 서 있었다. 시종의 복장을 한 그가 깍듯하게 예를 갖췄다.

“아, 안녕하십니까. 비전하. 세인이라 합니다.”

그는 긴장했는지 말을 제법 더듬었다. 그의 복장을 의아한 듯 쳐다보자, 세인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관복은 꽤나 눈에 띄는지라, 갈아입고 왔습니다.”

저를 돌아보는 시선에 이렌스가 냉큼 대답했다.

“저래 봬도 입이 무겁고, 능력도 상당합니다. 그런 자를 불러달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네, 수고했어요.”

“이 일에 마법이 관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셨죠.”

제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셀리나의 모습이 그림으로 찍어낸 듯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반항의 흔적이 전혀 없었던 시신의 상태를 떠올리며 제라니아는 입을 열었다.

“일단, 찔린 상처의 각도가 좀 이상했어요.”

심장에 꽂혀 있던 단검은 이미 회수해 갔는지 찾을 수 없었지만, 그 흔적은 남아 있었다.

“보통 무언가를 찌를 거라면 칼을 잡고…. 아래에서 위로 꽂아 넣거나, 위에서 아래로 꽂아 넣잖아요? 그게 자연스럽고요.”

가볍게 손짓으로 시늉을 보이며 제라니아는 설명을 이어갔다.

“그런데 셀리나의 가슴에는 일직선으로 칼에 찔린 것처럼 보이는 상처가 있었어요. 다른 흔적 없이 딱 그 상처만요. 꼭 열쇠를 열쇠 구멍에 꽂은 것처럼…. 무슨 뜻인지 알겠죠?”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라니아는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이게 가능하려면….”

“상대가 스스로 가슴을 활짝 열고 찌르라는 듯이 얌전히 기다려야 하겠군요.”

이렌스가 무심히 대답했고, 제라니아는 차분한 목소리로 응했다.

“확신하건대, 셀리나는 스스로 목숨을 버릴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니 가능성은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죠. 약에 취해 정신을 잃었을 때 찔렸거나….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었거나.”

어느 쪽의 가능성이든 좌시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제라니아는 티레인을 약재방으로 보내 정보를 조사하게 했다. 제대로 된 설명 없는 지시에도 티레인은 익숙하다는 듯 알겠다는 대답만을 남겼다.

이렌스에게는 마법을 잘 알 만한 신관을 데려올 수 있는지를 물었다. 추적에 능한 자여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렌스는 3초 만에 가능하다고 답한 뒤 제롬을 보내 그를 데려오게 했다.

설명을 요구하듯 눈짓하자 이렌스는 입을 열었다.

“우선, 이자는 체질적으로 마력 친화도가 높습니다.”

“마력 친화도?”

“간단히 풀어 말하면 마력에 유독 예민한 체질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력을 탐지하기에 유용하죠.”

“네, 그렇습니다. 제어구를 차고 있는 게 아닌 이상, 마법사는 자연스럽게 마력을 조금씩 흘리게 됩니다. 숨을 쉬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그 가닥을 짚어내는 느낌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즉, 상대가 마법사인지 아닌지 알아볼 수 있다는 건가요?”

“맞습니다.”

제라니아는 몇 가지를 더 질문했고, 세인은 성실한 자세로 임했다.

마법사들은 대개 두드러지게 뛰어난 특성을 최소 하나씩 가지는데, 세인은 대지에 특화된 마법사였다. 광범위하게 지진을 일으키는 것도 가능하다지만 식물을 키워내거나 오염된 땅을 정화하는 쪽에 더 특화된 몸이었다.

“그거 대단하네요.”

“자주 쓰지는 못합니다. 이런 계통의 마법은 생명력을 많이 소모해서요.”

수명을 담보로 하기 때문에 능력을 남발하면 오래 살지 못한다며 그는 농담 아닌 농담을 했다. 누군가를 돕는 일이니만큼 능력을 사용하는 것 자체를 껄끄러워하진 않는다고 선량하게 웃는 모습은 좋은 신관의 표본 그 자체였다.

이런 자가 프란츠의 사람이라는 것도 꽤 의외였다. 프란츠와 신전은 빈말로도 사이가 좋다고 할 수 없었으니까.

그러다가 문득 벤자민 산드리아를 떠올리고, 제라니아는 속으로 웃었다. 그도 겉만 보면 자못 헐렁해 보이는 상대였지만, 단지 그렇기만 했다면 신전의 수호자라 불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럼 혹시, 상대를 현혹시키는 마법도 존재하나요?”

파티에서 겪었던 상황을 자세히 털어놓자, 세인은 곰곰이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

“드물긴 하지만, 없지는 않습니다. 신전 내에서도 희귀한 능력이기도 하고요.”

사람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는 마법은 흔하지 않았고, 영향 범주도 사람마다 달랐다. 목소리와 같은 매개체를 사용해 상대방의 정신을 제어하는 마법이 분명 존재하기는 했다.

“다만, 조종이나 세뇌 같은 개념과는 조금 다릅니다. 충동을 심어주는 느낌이랄까요.”

사람은 의외로 단순한 면이 있어, 충동 하나를 심어주는 것만으로도 다른 감정들과 결합해 연쇄적인 효과를 일으킨다. 앞으로 잘 나아가고 있던 뱃머리가 거센 급류에 휩쓸려 그 방향을 잃어버리는 것과도 유사했다.

그렇기에 강한 정신력이 있다면 저항할 수 있기는 했으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왜 가면무도회에 갔을 때 리암이 그렇게 괴로워했는지 제라니아는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떤 마법도 인간에게 온전히 영향을 줄 수는 없습니다. 치유 마법 역시 회복력을 키워주는 것에 그칠 뿐, 모든 병을 고치지는 못합니다. 신이 주신 능력이라지만 그걸 다루는 게 인간인 이상 불완전할 수밖에 없지요.”

사제의 얼굴을 하고서 경건하게 말하는 세인에게 제라니아는 다시금 질문했다.

“수호부가 있으면 괜찮을까요?”

“어느 정도 보호해 주기는 하지요. 하지만 그것도 만능은 아닙니다. 체질적으로 그런 마법이 아예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그 역시 흔하지는 않습니다.”

긴 설명을 마친 뒤, 세인은 가만히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혹시나 남아 있을 마력의 흔적을 찾고 있는 그를 뒤로한 채 제라니아는 다시금 다른 쪽에 쌓여 있던 낙엽 더미를 옆으로 헤집었다.

“…어?”

각양각색의 나뭇잎들 사이로 무언가를 발견한 제라니아가 손을 뻗어 그것을 주워 들었다.

“이게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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