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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84화 (85/171)
  • 제84화. 누명 (5)

    “두 세력은 분명 같은 목표를 가지고 손을 잡았겠죠. 바로, 왕세자의 몰락.”

    가장 앞서 있는 자를 제거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맺어진 얄팍한 동맹은, 마치 살얼음과 같았다. 작은 계기만 있다면 쉽게 균열이 일어날 것들.

    “헤세론은 후계자의 상징이고, 그들은 어쨌거나 왕위를 목표로 하는 세력이에요. 잠시 손을 잡았을 뿐 언제 깨질지 모르는 관계죠.”

    데릭은 절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니 그걸 조금, 일찍 깨뜨려 보자는 거예요.”

    왜 제게 선택권을 넘겼을까. 제라니아는 그 사실에 주목해 프란츠의 저의를 파악하고자 애썼다. 그가 이유 없이 그런 소리를 했을 리 없으니까.

    하지만 곧 깨달았다. 어느 쪽이든 상관이 없다는 걸.

    설사 헤세론을 넘기더라도 찾아오고자 한다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이건 그저 조금 더 담대하게 판을 휘어잡고 흔드느냐, 조금 느리더라도 안전하게 뒤에서 수작질을 하느냐의 차이였다.

    이 선택이 거대한 흐름의 분기점임을 프란츠 역시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방법을 선택하냐에 따라서 본인이 발을 딛고 있는 위치가 달라질 수도 있다.

    갇혀 있다고 해도 바깥과 소통할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결정권과 함께, 제 안위까지도 통째로 제라니아의 선택에 맡겼다.

    제게 모든 권한을 넘기겠다던 그의 전언은 빈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건 그만큼 자신을 신뢰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그걸 깨닫고, 제라니아는 뒤에 남아서 기다리기보다는 앞으로 나아가는 쪽을 선택했다. 얌전히 물러서는 건 성격에 맞지 않으니, 아예 본격적으로 판을 뒤흔들 생각이었다.

    물론 데릭이 그런 갈등이 벌어질 걸 예상하지 못하고 헤세론을 요구한 건 아닐 터였다. 계약서의 내용이 그걸 증명했다.

    [헤세론의 영토 문서를 건네받는 방식은 이쪽에서 지정한다.]

    물론, 계약 조건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이 모든 계약의 내용은 상호 협의 아래 비밀에 부쳐진다.]

    [데릭 트라베티스-리나엔이 프란츠 리베라-리나엔의 무탈한 석방에 기여하는 것으로 계약은 효력을 가진다.]

    등이 있었다.

    “이렌스.”

    “하명하십시오.”

    “세자궁에 왕비 측의 첩자가 있나요?”

    냉큼 대답이 돌아왔다.

    “짐작 가는 자가 있어, 적당히 정보를 흘리던 차였습니다.”

    “헤세론의 영토 문서를 준비하고, 그 과정을 그자가 목격할 수 있게 조치하세요. 늦어도 오늘 저녁까지는 왕비한테 소식이 들어가도록.”

    둘을 갈라 세우는 데는 그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직접 정보를 흘리는 건 아니니 계약에 위배되는 일도 아니었다.

    국왕에게 받은 시간은 사흘. 데릭이 판을 새로 짜는 것도 아마 그쯤 걸리리라. 판을 조작하는 동시에 왕비 측과의 마찰에 시달리자면 상대적으로 이쪽에 관심을 두기 어려울 것이다.

    데릭이 방심하고 있을 때, 그보다 앞서 진짜 범인을 물색해야만 했다.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설마 제가 진짜로 범인을 찾아내고자 한다고 생각하지는 못할 테니, 혹시 모를 방해에 대비하는 정도겠지.

    이미 쉬운 길이 있는 상황에서 구태여 어려운 길을 밟으려 한다고 그 누가 생각하겠는가.

    “판돈을 꽤 크게 거시는군요.”

    진심이냐고 묻는 듯한 이렌스의 눈을 제라니아는 마주 응시했다.

    “마음에 들지 않나요?”

    “아니요. 그 반대입니다.”

    이렌스의 입가가 시원스레 호선을 그렸다. 덤덤한 시선 앞에서 그는 나직하게 고했다.

    “뜻대로 하십시오. 그게 무엇이든.”

    제라니아는 선언했다.

    “어서 움직이죠. 시간이 없으니까요.”

    * * *

    국왕의 처소에서 나오자, 일렬로 대기하고 서 있던 시녀들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 인사를 무심하게 받아넘기며 아이렌은 복도를 걷기 시작했고, 시녀들이 줄줄이 그 뒤를 따랐다.

    셀리나 왕자비의 죽음과 왕세자의 투옥으로 궁이 떠들썩한 만큼 기분이 저조할 줄 알았건만, 국왕은 꽤 덤덤한 태도로 아이렌을 맞았다. 덕분에 크게 시달리지는 않았으나 묘하게 찜찜했다.

    아이렌은 꺼림칙한 기분을 애써 떨쳐내며 표정을 정돈했다. 며느리가 죽은 만큼 어쨌거나 침통한 태도를 보여야만 했다.

    왕궁에는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궁인들은 수군거리다가도 왕비를 보고 퍼뜩 예를 갖추었다.

    처소에 도착하자 시녀장인 디제 후작 부인이 왕비를 맞이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지만, 난처한 눈빛을 한 그를 의아한 듯 바라보던 왕비가 눈썹을 살짝 말아 올렸다.

    “무슨 일이지?”

    “손님이 와 계십니다.”

    “손님? 내 허가 없이 안에 사람을 들이지 말라 했을 텐데.”

    “그러려고 했습니다만, 이안 왕자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라….”

    도대체 누구기에 저러는 걸까. 의문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바로 풀렸다.

    이안의 맞은편에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맞이하는 티레인을 본 순간 왕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티레인 앞에 놓여 있는 낡은 모자에 힐끔 시선을 두었다가, 무심하게 눈을 돌렸다.

    “오셨어요, 어머니.”

    밝게 웃는 이안의 뺨에 볼우물이 피어났다. 하늘색에 가까운 눈동자는 왕궁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맑고 투명했다. 2년 전을 기점으로 훌쩍 큰 키와 호리호리한 체형, 근심이나 걱정과는 인연이 없어 보이는 수려하고 앳된 얼굴.

    사랑받고 자란 사람 특유의 분위기가 이안을 감싸고 있었다.

    “사람을 아무나 들이면 안 된다 하지 않았습니까, 왕자.”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숙… 티레인 경을 뵈었더니 반가워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는지 이안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까.”

    “그게….”

    “전하께서 마마를 많이 닮으셨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물쭈물하는 이안 대신 티레인이 냉큼 대답했다. 아이렌의 눈이 슬며시 가늘어졌다.

    “바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군. 여기서 어슬렁거릴 시간이 다 있고. 하긴 한가할 만한가?”

    왕비가 왕세자의 상황을 빗대어 비꼬아 말하는 와중에도 티레인은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눈은 상대를 탐색하듯이 날카롭게 빛났다.

    “다행입니다.”

    생뚱맞은 대답이 흘러나왔다.

    “혹시 하고 생각했는데, 역시 아닌 것 같으니까요.”

    “무슨.”

    “증언을 한 시녀가 왕비 마마의 사람이라는 걸, 정녕 모를 줄 아셨습니까?”

    예고 없이 훅 파고드는 질문에도 아이렌은 태연한 얼굴로 대꾸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무례하게 굴고자 나를 찾아온 거냐.”

    “뭐 탐색하러 온 거긴 합니다만…. 직접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으신 것 같으니 됐습니다.”

    돌을 던지듯 제멋대로 말을 투척하는 티레인의 태도에 아이렌은 기가 찬다는 듯 말을 뱉었다.

    “헛소리를 하러 온 건가?”

    “표정만 없애면 속을 읽히지 않으리라 생각하시는 건 여전하군요.”

    어깨를 으쓱이는 티레인을 보며 아이렌은 짜증스레 이맛살을 구겼다. 저를 다 안다는 듯이 떠드는 목소리에 열이 받으면서도, 왕비는 무어라 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너무 오래 알고 지낸 게 문제였다. 쉽사리 반박할 말이 없으니.

    티레인은 모자를 집어 들어 다시 제 머리에 눌러 썼다. 낡았지만 잘 관리된 짙은 푸른색의 모자가 그의 머리 위로 안착했다.

    “오랜만에 전하를 뵙는 영광도 누렸으니,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할 일이 많아서요.”

    “벌써 가시게요?”

    놀란 얼굴로 벌떡 일어난 이안이 아차 싶어 다시 아이렌을 보았다.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타박하지 않는 걸로 봐서는 묵인하겠단 뜻으로 보였다.

    이안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들어 어머니와 자꾸 충돌하는 것 같아 마음이 콕콕 쑤셨지만, 이제 가면 언제 볼지 모르는 상대였다.

    가지 말라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티레인은 이안의 앞으로 다가갔다. 한쪽 무릎을 굽히고 몸을 숙여 이안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든 그가 싱긋 웃었다.

    “전하, 나중에 또 존안을 뵈러 오겠습니다.”

    “…6년 전에도 그렇게 말했으면서, 이제야 왔잖아요.”

    “벌써 그렇게 됐습니까?”

    그래서 키가 많이 자라셨군요, 라고 덧붙이며 너스레를 떠는 남자를 바라보며 이안은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아홉 살 때도 의젓한 편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럴 때면 영락없이 제 나이로 보였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말을 슬쩍 털어놓으며 비밀로 해달라 중얼거리던 것도 그렇고, 그 또래다운 귀여운 면이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웃다가도 무심하기 짝이 없는 주군을 떠올리고 티레인은 마음 한구석이 심란해졌다.

    이 삭막한 왕궁에서 이안과 같은 아이는 흔하지 않다. 대부분 오만하고 눈치가 빨랐으며, 상대를 찍어 누르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렇게 자랄 수밖에 없는 환경을 두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이안의 순수함은 천성도 있겠지만 그를 둘러싼 환경의 영향이 컸다. 왕비와 후작이 이안을 그토록 싸고돌지 않았다면 저토록 밝게 자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라는 말이 잘 어울렸다.

    그런 이안을 보고 있자니 프란츠가 자꾸 생각이 났다.

    자신이 프란츠 왕자를 섬기기로 결정했을 때, 그는 열일곱의 나이였다. 이안과 비슷한 나이에, 화사한 겉모습과 달리 건조하기 짝이 없던 소년을 떠올리니 등골이 오싹했다.

    그는 메마른 황무지에 피어난 꽃과도 같았다. 제1계승권자로서의 중압감, 그에 따라오는 수없는 암살 시도, 그럼에도 제대로 된 제 편 하나 없이 철저하게 방치되어 자라난 아이.

    평범한 사람이라면 진작 미쳐 버리고도 남았을 환경을 딛고 소년은 그 누구보다 아름답게 피어났다. 그 모든 것을 싹 지워낸 아래에 보이는 얼굴이 지독하게도 무감정할 뿐이었다.

    희로애락이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사람처럼.

    끔찍할 정도로 합리성을 따지는 주군의 성정에 질릴 때도 있지만, 연민을 아주 버릴 수 없는 건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다음에 뵙는 건, 그때만큼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달래듯이 말하자 이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티레인은 왕비를 돌아보았다.

    “왕비 마마.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말없이 그를 쳐다보던 아이렌이 질문으로 답했다.

    “바쁘다고 하지 않았던가?”

    조용히 축객령을 내리자, 티레인은 예를 갖춘 뒤 방을 나섰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뒷모습에 미적지근한 눈길이 따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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