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83화 (84/171)

제83화. 누명 (4)

누가 이기나 해보자는 양 침묵이 흘러갔다.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을까요.”

먼저 입을 연 쪽은 데릭이었다. 제라니아는 대꾸하지 않았고, 그 역시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는 양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특별한 점은 없어 보이는데, 어떤 점이 그 인간 같지도 않은 녀석의 관심을 끌었을까.”

“말씀이 과하신 거 아닌가요.”

프란츠에 관한 평에 반박한 것인데, 의도와는 다르게 알아들었는지 그가 결례를 범했다며 허울 좋은 사과를 건넸다.

“아시다시피, 전하께서는 딱히 좋은 상황은 아니시죠.”

“…….”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대가는요?”

차분하게 되묻는 제라니아를 본 데릭은 조금 놀라는 듯하면서도, 곧장 본론을 말했다. 헤세론의 영토를 요구하는 남자를 묵묵히 쳐다보는 제라니아의 표정이 꼭 익숙한 누군가를 닮아 있었다.

데릭은 그게 퍽 짜증스러웠다. 여기에 와서까지 그 재수 없는 녀석을 떠올려야 한다니.

‘맞는 말입니다. 전부를 잃는 것보다야, 최소한의 손해로 최대한의 이득을 보는 편이 낫겠지요. 하지만.’

데릭의 제안을 들은 뒤, 프란츠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재미있다는 듯 그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협상할 상대가 틀렸습니다.’

‘무슨….’

‘보다시피 자유의 몸이 아닌지라.’

어깨를 으쓱하며 그는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밧줄에 쓸린 자국이 선연한 손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현재 내가 자리를 비웠으니, 세자궁에 남은 유일한 귀빈은 한 사람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말문이 막힌 그에게 프란츠는 쐐기를 박았다.

‘제대로 협상할 상대를 찾아가십시오. 어떤 결정이든, 나는 비의 선택에 따를 테니까요.’

“그분이 비전하께 모든 권한을 일임하겠다고 했으니까요.”

이야기를 다 들은 제라니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녹색 눈동자에 당혹과 난처함, 심란함이 섞여 떠올랐다. 데릭은 가만히 대답을 기다렸다.

제법 성격을 안다고 자부하는 프란츠와 달리, 눈앞의 여자와는 얼마 전의 일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넓게 보면 왕세자비 자격과도 연관된 문제인데,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럼, 셀리나 전하는요?”

예상치 못한 질문이 훅 날아들어 데릭의 온몸을 꽁꽁 묶었다. 자신만만하던 얼굴이 석고상처럼 뻣뻣하게 굳어가는 일련의 과정을 제라니아는 지그시 응시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분의 죽음과 연관된 일인데. 이걸로 거래를 하겠다니, 진심인가요?”

죽음, 이라는 단어를 듣자 데릭의 미간이 살며시 일그러졌다. 그는 제 얼굴을 조용히 쓸어내렸다. 고양이의 털을 빗는 것처럼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에는 언제 그랬냐는 양 태연해진 얼굴이 자리했다.

“…이미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더 최악으로 가지 않도록 노력할 수는 있는 거잖아요.”

“순진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퀭해 보이는 눈가와 살짝 건조한 입술, 웃음기 없는 얼굴이 제라니아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목소리는 상대를 설득하듯 더없이 부드러웠다.

“지금보다 더 최악이겠습니까.”

‘…셀리나?’ 셀리나가 시체로 발견된 아침, 데릭은 새벽에 눈을 떴다. 흐릿한 눈을 몇 번 깜빡이자 비어 있는 옆자리가 보였다. 손을 뻗어 침대보 위를 쓸어내렸다. 자리를 비운 지 꽤 된 건지 서늘한 감각이 손끝에 묻어났다.

침실을 지키는 시종들을 추궁하니, 그들은 한목소리로 셀리나가 새벽에 밖으로 나갔다 이야기했다. 목적지를 알리지 않고 날이 밝기 전에는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여인은 사라졌고,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다라.

‘왜 혼자 보냈지?’

‘말씀을 드리긴 했습니다만, 필요 없다 하시어….’

이 궁에서 셀리나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은 자신밖에 없으니, 상전의 지시를 어기기는 어려웠을 터다. 그럼에도 솟구치는 짜증에 데릭은 시종들을 노려보았고, 그들은 눈치 빠르게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터져 나오는 한숨을 갈무리하며 데릭은 생각에 잠겼다.

‘당분간 휴스타인 공작저에 가 있고 싶어요.’

최근 셀리나가 답지 않게 행동하는 일이 많아지긴 했다. 늘 순종적이던 아내의 변화에 데릭은 꽤 당황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것까지는 그러려니 했으나, 눈물까지 보이며 소리를 지를 줄은 몰랐다.

‘제발, 저를 내보내 주세요!’

늘 차분하고 다정하던, 제가 아는 셀리나가 아닌 것 같았다. 무엇이 두려운지 몸을 떨기까지 하는 그 모습은 퍽 가련했고,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을 만큼 어여뻤으나 주제넘게 바깥일에 간섭하려 드는 것까지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 사람을 내보내시지 않을 거라고 하셨으니, 대신 제가 나가 있어야 마땅하지 않겠어요.’

‘당신, 왜 이래? 그 여자한테 무슨 소리를 들었기에 안 하던 행동을 하지?’

‘정말 모르시는 건가요, 전하.’

슬퍼 보이는 눈빛으로 호소하는 셀리나의 어깨를 감싸며 데릭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렇게 그를 싫어하나. 그자가 온 뒤로 일이 술술 풀리고 있는데. 조금만 기다리면, 당신 역시 지금보다 더한 영예를 안게 될 거라고.’

셀리나는 대답 없이 입술만 꾹 짓씹었다. 늘 도톰하니 예쁘기만 했던 붉은 입술에 난 생채기가 안타까워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흠칫거리던 셀리나는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건 왕궁 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이리라. 별일 아니겠지, 병사 몇을 불러 셀리나를 찾으러 가라 명하고 다시 침소로 들어가려던 데릭을 붙잡아 세운 건 꺼질 듯 연약한 목소리였다.

‘그, 사실 비전하께서 돌아오신 걸 보았는데요….’

연배가 어려 보이는 시종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돌아왔다고?’

‘네, 그, 그렇습니다.’

‘자세히 말해 보거라. 특이한 점은 없었느냐.’

‘어, 언제나와 비슷하셨습니다. 어디를 다녀오셨냐고 여쭤봤는데…. 대답은 듣지 못했습니다. 금방 침실로 돌아가겠다고 하시면서 다른 곳으로 가셨고요. 그리고….’

무어라 더 말하려던 시종은 몰려오는 두통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마치 잊고 있는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것처럼 끙끙대던 그는 데릭의 한마디에 번쩍 정신을 차렸다.

‘…어느 쪽으로 갔지?’

시종이 가리킨 방향을 본 데릭의 머릿속에 제가 주로 사용하는 집무실이 떠올랐다. 그때까지는 제법 여유로웠던 그의 얼굴에 균열이 났다.

시종들을 뒤로한 채 집무실로 들어간 데릭은 벽에 숨겨져 있던 금고를 열었다. 안에 들어 있던 온갖 문서들을 헤집어본 그는 제 안위와 연관된 중요한 문서 중 하나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사색이 되었다.

벽에 설치한 금고는 열쇠가 없는 대신 특정한 배열을 맞춰야만 열렸고, 이것을 열 줄 아는 사람은 세상에 단둘이었다. 금고를 만든 자와 자신. 금고를 만든 자의 입은 영영 막혀 버렸으니 남은 건 오직 자신뿐이었다.

다른 사람의 앞에서 금고를 연 것은 딱 한 번밖에 없었고, 그게 누군지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데릭은 초조하게 집무실 안을 서성거렸다. 치미는 화는 소파를 쥐어뜯는 것으로 해소했다. 감정적으로 굴기보다는 침착해야 했다.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일단 셀리나를 찾는 게 먼저였다.

그러나 상황은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날이 밝아올 무렵, 여인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숲 근처에 버려지듯 죽어 있는 셀리나를 발견한 정원사가 혼비백산해서 병사들에게 달려왔고 왕궁은 발칵 뒤집혔다.

밤새 뜬눈으로 기다리던 데릭은 즉시 병사를 풀어 셀리나를 데려오고, 상황을 알아보게 했다.

어젯밤 세자궁에서 나오는 셀리나를 봤다는 증언을 들었을 때는 배신감에 눈이 뒤집혔지만 데릭은 애써 자신의 역할을 고수했다. 그는 이제 막 아내를 괴한에게 잃어버린 자였다. 슬퍼하는 모습을 보여야 마땅했다.

사실 현실감이 없기도 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분명 멀쩡했는데, 어떻게 이런 모습으로 돌아오나.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건 수없이 봐왔지만 여러 의미에서 막막했다.

이후 휴스타인 공작가와의 관계도 그렇고, 범인을 찾는 것도 그렇고, 문서가 누구 손에 넘어갔는지도 알아야 했다.

악재라면 악재였고, 호재라면 호재였다.

프란츠 리나엔이 이 문제와 엮여 있지 않았다면 단순히 악재이기만 했을 것이다.

문서는 그 녀석의 손에 넘어갔는가. 가능성은 반반이었다. 사건을 전담한 건 자신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문서의 행방을 알아내야 하는 것이 먼저였고, 그게 아니라면 문서를 대체할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렇기에 떠올린 게 헤세론의 영토였다. 왕족 살해에 엮인 이상 제아무리 프란츠라도 쉽게 빠져나가지는 못할 것이고, 이 사건의 담당자가 자신인 만큼 협상을 할 여지는 충분했다.

어쨌거나 이건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기회가 다가왔는데 그것을 놓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어떻게 할 겁니까.”

제라니아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응접실에 걸려 있는 시계 초침 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질렀다. 무겁게 침잠하는 침묵을 깨치는 음색은 차분하고 부드러웠다.

“좋아요.”

데릭이 응접실 밖으로 나간 뒤, 제라니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에 서 있던 이렌스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역시 눈치채셨군요.”

“당연하죠.”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찻잔과 찻주전자를 힐끔 내려다보며 제라니아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시작은 왕궁에 돌기 시작한 소문이었죠. 국왕의 독살 시도에 전하께서 연관되어 있다는.”

“…….”

“소문이 퍼지는 속도가 이상하게 빨랐어요. 뒤에 배후가 있다는 뜻이겠죠. 굳이 이런 짓을 할 만한 세력은 데릭 리나엔과 아이렌 왕비 측 정도고.”

차분한 음성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그의 말대로 셀리나에 대한 권한은 데릭 왕자에게 있지만, 선처를 대놓고 해줄 순 없겠죠. 헤세론 역시 평범한 방식으로 건네받아서는 안 될 거고요.”

“휴스타인을 적으로 돌릴 순 없을 테니까요.”

제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셀리나의 죽음이 걸린 일이다. 크리스토퍼의 태도를 보면 그들은 이 문제를 절대 가볍게 넘기지 않을 것이다.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은근하게 배척받는다고 하나, 그들이 가진 영지와 세력은 무시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그러니, 이 거래의 존재가 드러나면 그들은 분명 크게 반발할 것이다. 물증이 없는 이상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적당히 다른 범인을 만들려고 할 거예요. 애초에 범인을 찾을 수 있다는 기대가 없을 테니까요.”

셀리나의 몸에는 흔적이 거의 없었다. 관련된 다른 목격자도 없는 만큼 사건은 미궁에 빠진 거나 다름없었다.

사실 증인이야 조작하면 된다. 단서를 찾아 진실을 파헤치는 것보다는 아예 이미 존재하는 단서들을 짜 맞춰 판을 짜는 게 더 편했다. 국왕에게서 이 사건을 위임받은 게 데릭이니 그리 어렵지는 않을 터.

아내의 죽음조차 철저하게 이용하려는 그 비정함에 기가 질렸으나, 생각해보면 이게 왕궁의 현실이지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의문 하나가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내가 죽으면, 당신도 데릭 왕자처럼 나를 이용하려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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