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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82화 (83/171)

제82화. 누명 (3)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데릭의 음성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겉치레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지 말투가 제법 거칠었다. 격식에 맞지 않는 말씨를 듣고도 프란츠는 입가에 슬쩍 미소를 그렸다.

“무슨 소리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데릭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태연하게 답하는 프란츠의 멱살을 와락 붙들었다. 형형하게 자신을 노려보는 시선에도 프란츠는 요지부동이었다. 데릭이 이를 갈았다.

“시치미 떼지 마라.”

“무엇인지는 몰라도, 귀중한 문서를 도둑맞으셨나 보군요. 안타깝습니다.”

정말로 안타까운 듯 살짝 높아진 어조로 답했지만, 데릭은 못마땅한 듯 그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덤덤하게 그것을 받아넘기는 프란츠의 멱살을 팽개치듯 놓으며 데릭은 한껏 짜증을 냈다.

“그럼, 도대체 왜 네가 어젯밤에 셀리나를 만난 거지?”

“이미 말했다시피, 형수님께서 비를 찾아왔는데 이미 자고 있어서 차 한 잔 대접하고 돌려보냈을 뿐입니다.”

“그리고 시체로 발견됐지.”

“…….”

프란츠는 말이 없었고, 데릭은 의기양양하게 제가 가져온 추론을 늘어놓았다.

“네가 내 아내에게 무슨 짓을 했겠지. 협박이든 뭐든 말이야. 그리고 단물 다 빼먹고 필요 없어진 셀리나의 입을 막고자 일을 벌였다, 그럴듯한 해석 아닌가?”

이 와중에도 문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교묘하게 언급을 피하는 걸 보니 그 역시도 긴가민가한 모양이었다. 나쁘지 않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프란츠는 싱긋 웃었다.

“요즘 피곤하신 모양입니다. 논리가 맞지 않는 말이라는 것쯤은 형님께서도 이미 아실 텐데 말이죠.”

처리하더라도 이렇게 요란하게 처리하겠냐. 그런 뉘앙스를 한껏 담아 대답하자 데릭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

“뭘 믿고 그렇게 웃는지 모르겠군. 왕족 살해가 얼마나 큰 죄인지 모르는 건가? 재판으로 넘어가는 순간 분명 불리할 텐데.”

문제의 성격이나 주체를 봤을 때, 신명 재판1)이나 결투 재판으로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전 출신인 재판관들이 중심이 되는 재판소로 넘어가겠지. 거기서부터는 사실상 진실 공방보다는 정치적 알력 싸움에 가까웠다.

데릭과 후작이 손을 잡았다면, 확실한 범인을 찾지 못하는 한 제가 불리한 건 맞았다. 그럼에도 프란츠는 느릿하게 손깍지를 낀 채 의자에 기대었다. 갇힌 상태에서도 그는 배부른 맹수처럼 느긋하기 짝이 없었다.

“무엇을 바라시는 겁니까.”

다시 자리에 걸터앉는 데릭에게 조용히 묻자, 그가 대답했다.

“거래를 하자는 거야.”

“거래?”

“선처를 해주지. 그 대신, 네가 가진 헤세론의 영토 문서를 내놓는다면.”

프란츠는 저도 모르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헤세론의 영토.

왕국의 남동쪽에 자리한 이 작은 영지는 그 자체로는 별다른 특징이 없었으나, 건국왕인 카르디안 리나엔의 고향이라는 점이 특별했다.

때문에 그는 이 영지를 제 아들에게 물려주었고, 그 아들 역시도 똑같이 했다. 그런 관습이 굳어져, 헤세론은 대대로 왕국을 이어받을 자에게 주어졌으며 후계자의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즉, 헤세론의 영토를 내놓으라는 건 결국 제게 왕세자 자리를 내놓으라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실제로 계승을 하는 건 아니더라도 영토의 유무는 상징성에 타격이 크다.

“…참으로 관대하십니다. 형수님을 죽였을지도 모르는 이에게 자비를 베푸시겠다니 말이지요.”

“왕족의 덕목 중 하나가 관대함 아니겠나.”

하나뿐인 아내의 죽음마저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새삼 여기가 왕궁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그간 너무 해이해져 있었던 것일까.

“범인을 찾지 못한다면 너는 최소 유배를 피하지 못해. 왕족으로서의 직위도 잃어버릴 테니, 자연스럽게 헤세론은 국고로 환수되겠지. 전부 잃는 것보다는 하나를 포기하는 게 그래도 덜 손해 보는 장사이지 않나?”

프란츠는 제 기분이 착 가라앉는 것을 느꼈고, 그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어 잠시 머뭇거렸다. 데릭이 눈치채기 전 재빠르게 표정을 관리한 그가 입을 열었다.

* * *

제라니아는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방의 중앙에 자리한 차가운 제단 위에 셀리나가 있었다. 그를 덮고 있던 천을 들춰 보았다.

시신은 단정하게 누워 있었다. 아직 옷을 갈아입히지 않은 건지 푸른 드레스 차림에, 창백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잘 빚은 조각상을 떠올리게 했다.

흙바닥을 굴러서 그런지 흙투성이인 드레스의 왼쪽 가슴 부근이 찢어져 있었고, 붉은 핏자국이 낭자했다. 누가 봐도 칼을 맞은 부위였다. 그것을 제외하면 지극히 멀쩡해 보여서, 그래서 더 슬펐다.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나를 다시 바라볼 것 같은데.

제라니아는 살며시 손을 뻗어 셀리나의 볼을 어루만졌다. 차갑게 식어버린 피부가 손끝을 간지럽혔다.

국왕의 인가를 받아 온 덕에 겨우 이렇게 셀리나를 만날 수 있게 되었으나,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제라니아는 울컥 치미는 감정을 추스르고 차분히 셀리나의 몸을 살폈다.

꼼꼼하게 살펴보았지만 가슴의 상처를 제외하면 별다른 특이점이 없었다. 셀리나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라든가 귀걸이가 사라진 걸 제외하면 더없이 깨끗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누가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면 반항을 하는 게 보통일 텐데, 그런 흔적이 일절 없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를 잘 아는 상대가 범인이거나, 아니면….

셀리나가 발견된 장소는 숲 부근이라고 했다. 그쪽도 이미 조사를 다 끝냈을까.

눈을 꼭 감고 있는 셀리나의 이마와 눈가 사이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제라니아는 미소를 지었다.

“꼭 범인을 찾아줄게. 그러니까, 쉬고 있어.”

그 말을 마치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려는 자신을 억누르며 제라니아는 문을 나섰다. 대기하고 있던 병사와 같이 건물 밖으로 나온 제라니아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데릭 전하께서 명하셨다 하지 않습니까. 그분의 허가 없이는 누구도 출입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언제 돌아오십니까. 그때까지 기다리….”

“…크리스?”

병사와 실랑이를 하고 있던 크리스토퍼는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힐끗 뒤편으로 시선을 옮겼다. 제라니아를 발견한 그의 얼굴에 당혹감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제라니아? 네가 어떻게….”

정말 당황했는지 존칭마저 깜빡하고, 멍하니 중얼거리는 크리스토퍼의 뒤에서 리암이 손을 흔들었다. 잘 다녀왔냐는 신호에 적당히 손짓해주던 제라니아에게 그와 설전하던 병사가 공손히 대답했다.

“볼일은 다 끝나셨습니까, 비전하.”

“예, 덕분에 무사히 인사를 마쳤어요. 크리스토퍼 경, 잠시 나랑 이야기 좀 할까요?”

크리스토퍼와 리암을 끌고 제라니아는 건물 근처에 보이는 나무 그늘 아래로 갔다. 근처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에야 그들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왜 여기 있습니까.”

“범인은 전하가 아니야.”

둘은 동시에 말을 꺼냈고, 제라니아가 머뭇거리는 사이 크리스토퍼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저 안에는 어떻게 들어간 거죠?”

“국왕 폐하께서 인가를 내주셔서.”

“…설마, 범인을 찾고 계십니까?”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제라니아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 애는 어떻습니까.”

“심장에만 칼이 꽂혀 있던 모양이야. …그래도 고통이 길지는 않았겠더라고.”

그나마 위안으로 삼아도 될까. 슬픔으로 일그러지는 얼굴을 커다란 손으로 가리며 크리스토퍼는 고개를 젖혔다. 말없이 슬퍼하는 그의 손을 제라니아는 살짝 붙잡았다.

괜찮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괜찮을 리 없으니까.

셀리나의 상태를 보니, 프란츠와 엮여 떠도는 이야기들은 역시 추측일 뿐으로 보였다. 셀리나가 죽었다는 것 말고는 알려진 게 없기 때문에 역효과로 괴이한 소문이 도는 건가.

아니면 그조차 의도한 것일까.

“공작 각하께서는 이 사실을 아셔?”

“아마 지금쯤은 아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훈련을 하던 중 소식을 듣고 찾아온 거고요.”

“…곧 찾아오시겠네.”

“…….”

둘은 한참을 말이 없었고, 제라니아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애써 열어 말했다.

“너는, 어디까지 알고 있어?”

“…셀리나가 시신으로 발견됐고, 프란츠 전하가 그 관련으로 붙들려 가신 것까지는 압니다.”

크리스토퍼는 셀리나가 전날 밤 프란츠를 찾아갔다는 것까지는 모르는 것으로 보였다. 제라니아는 고민했다. 대체 말이 어디에서 새어 나간 거지?

“그래서 그 애를 만나러 왔는데, 들여보내 주지 않아서요.”

그는 데릭이 올 때까지 계속 기다릴 기세였다.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기에 제라니아는 가만히 그의 팔을 다독였다. 그만 가보겠다 말하는 제라니아에게 크리스토퍼가 말했다.

“범인을 찾으실 수 있겠습니까.”

“찾아야지.”

“…정말 전하께서는 무고한 겁니까.”

제라니아는 잠깐 고민하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토퍼가 안도한 듯 미소 지었다.

“다행입니다.”

그의 머리칼이 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그의 입가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사라지며 꾹 다물렸다.

“범인을 찾는다면….”

곧게 뻗은 시선이 제라니아를 똑바로 직시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만한 대가를 받게 해줄 겁니다.”

맹수의 안광처럼 형형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 왠지 모르게 오싹한 느낌이 들어 제라니아는 제 팔을 문질렀다.

세자궁으로 돌아오자 미리 도착해 있던 이렌스가 그들을 맞이했다. 물론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안녕하십니까.”

“데릭 전하.”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 있던 데릭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의 앞에 있는 테이블에는 찻잔과 찻주전자가 놓여 있었으나, 그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제라니아는 천천히 걸어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멀뚱히 데릭을 보고 있던 이렌스가 제라니아가 앉은 소파 뒤쪽으로 가 섰다. 마치 그를 호위하는 듯한 모양새에 데릭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이 상황에서도 참 충성스럽기 짝이 없는 개로군요.”

“왜 나를 찾아왔나요?”

조용히 묻는 제라니아에게 데릭은 어깨를 으쓱였다. 교활한 눈동자가 제라니아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자신을 구석구석 관찰하는 듯한 시선에도 제라니아는 미동조차 없었다.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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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 불, 독 등을 써서 피고에게 육체적 고통이나 시련을 가하고, 그 결과에 따라 죄의 유무를 판단하는 중세의 재판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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