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누명 (2)
“이런 건 어떨까? 아름다운 여인을 탐하려다가, 반항하자 우발적으로 이렇게, 했다는 건.”
손을 들어 칼을 휘두르는 시늉을 하는 시녀에게 다른 시녀가 손을 내저었다.
“에이, 그건 너무 갔다.”
“왜? 더럽게 노는 인간들이 어딜 가나 쫙 깔렸다고. 나만 이런 생각 하는 거 아닐걸?”
“하지만…. 그럴 분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그것도 모르지. 그 아름다운 얼굴로 괴물 같은 면모를 감추고 있을지도.”
주먹에 힘이 들어간 탓인지 부들부들 떨렸다. 조용히 나서려는 순간, 누군가의 손이 제라니아의 어깨를 붙잡았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회색 머리칼의 남자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 어깨를 붙든 커다란 손의 주인을 올려다보며 제라니아는 조용히 속삭였다.
“이렌스.”
살짝 고개를 조아린 이렌스가 제라니아를 대신해 모퉁이 밖으로 성큼성큼 나섰다. 깜짝 놀라 고개를 조아리는 시녀들에게 이렌스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하고 있습니까.”
“저, 그, 그것이….”
“입단속을 해야 할 상황을 구분하지 못하다니, 요즘 궁인 교육이 심하게 엉망이군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그, 그러니 제발….”
“변명은 됐습니다.”
근처를 지나는 병사에게 이렌스가 손짓하자, 그들은 재빨리 다가와 시녀들을 끌고 갔다.
잘못했다고 비는 시녀들의 목소리가 병사들의 발걸음 소리와 함께 사라지고, 근처에 있던 다른 궁인들이 이렌스의 눈치를 보며 발을 재게 놀려 가버린 뒤에야 제라니아는 모퉁이를 걸어 나왔다.
늘 미소가 곁들여져 있던 얼굴에 웃음기가 없었다. 그런 제라니아를 향해 이렌스는 정중하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혹시 제가, 비전하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습니까.”
“…아니요, 지금은 제가 직접 나서는 것보다는 이게 맞겠죠.”
왕족 모독죄로 치부될 만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이런 계산이나 하고 있는 자신이 우습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해결됐으니 됐다. 애써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다.
“어째서 시녀들도 대동하지 않으시고, 호위기사 하나만 끌고 나오신 겁니까.”
다소 질책하는 듯한 목소리가 제라니아의 상념을 깨뜨렸다.
“어디서 말이 새어 나갈지 모르니까요. 믿을 만한 사람만 데리고 오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이렌스야말로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는 차분히 대답했다. 왕세자 전하의 명을 수행하러 왔다고.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비전하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권한을 일임하겠다고 하셨으니까요. 그래서, 수족의 의무를 다하러 왔습니다.”
이렌스가 건네는 전언에 제라니아는 절로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심란해하는 제라니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재차 말을 이었다.
“제가 비전하의 입장이라면, 분명 셀리나 왕자비가 있는 곳으로 가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티레인 경과 제롬 경은요?”
“둘 다 필요한 것을 찾으러 갔습니다.”
“전하께서 셀리나를 만났다는 건 어떻게 된 건가요. 정말, 어젯밤에 둘이 만났었나요?”
가장 궁금한 걸 묻자 술술 대답하던 이렌스의 입이 딱 다물렸다. 잠깐의 뜸을 들인 다음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왜죠?”
“명령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적막한 분위기를 걷어내는 제라니아의 음성이 제법 밝았다.
“재미있네요. 나를 최우선하라고 했지만, 결국 여러분이 가장 우선하는 건 전하인 거죠.”
경쾌하다 싶을 정도로 밝은 목소리에 묻어나는 자조를 기민하게 눈치채고, 이렌스는 조용히 눈썹을 꿈틀거렸다.
“제가 아무것도 말씀드릴 수 없는 한, 비전하의 노여움을 가라앉힐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
“그래도, 전하께서 그 일에 대한 정황을 비전하께 영영 감추려는 의도로 이런 명령을 내리신 건 아닐 겁니다.”
나중에 이야기하겠다 이건가.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프란츠를 찾아가서 무슨 생각이냐고 묻고 싶었다. 그가 결백하리라는 것을 확신하면서도 속내가 쉬이 짐작 가지 않았다.
당신은 왜 셀리나를 만난 거지?
“…예, 그렇겠죠.”
허탈한 마음을 애써 내리누르고 제라니아는 다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리암과 이렌스가 조용히 따랐다.
이미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오간 건지, 복도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앞에서 걸어오던 시종 둘 역시 인사를 건네고 쏜살같이 그들을 지나 사라졌다.
“왜 이런 소문이 나고 있는 걸까요?”
정오가 넘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셀리나가 발견된 게 아침이었고, 정황을 찾아본 뒤 프란츠가 끌려 나간 게 11시쯤이었으니 이제 한 시간이 잠깐 넘은 상태였다.
고작 한 시간 만에 저런 비약이 나올 정도로 소문이 퍼지고 있다는 건 심각했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게 불구경 아니면 치정 싸움이라 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가십을 좋아하는 건 만국 공통이었다. 이미 흘러가던 소문은 이번 사건을 토대로 확 불이 붙었다.
“전하께서 죽인 게 아닙니다.”
“그건 당연한 거고요.”
그래서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도 않은 일에 그런 말까지 들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불만스러우신 듯하군요.”
그는 보지 않고도 기민하게 알아채고 말을 걸었다.
“비전하. 만약 아까 그 자리에 전하가 계셨다면, 어떻게 행동하셨을 것 같습니까?”
“…왕족 모독죄를 물었겠죠.”
간결하지만 핵심을 찌르는 답이었다. 바로 요점을 알아듣고 대답하는 제라니아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예, 정확하십니다. 그래서 왕족에 대해 떠들고 다니면 이렇게 된다, 의 본보기로 삼으셨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떠드는 상대한테 화가 나서는 아니겠죠.”
“바로 그겁니다.”
가십에 시달리는 것이 익숙하다고 하나, 사람인 이상 자신에 대해 마구잡이로 떠드는 것에 기분이 좋을 리 없다. 보통이라면 그렇겠지만 프란츠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겠지.
남들 앞에서는 늘 웃는 얼굴이지만, 가까이서 본 그는 자신의 감정을 쉬이 표현하지 않는다. 철저한 부동심. 그 어떤 폭풍이 닥쳐와도 무너지지 않고 서 있을 단단한 나무처럼. 바늘 한 점 들어갈 수 없을 것만치 빈틈이 없다.
제 앞에서 무표정할 때가 많은 이유는 구태여 감정을 꾸며낼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일 것이다. 다른 이들의 추측과는 달리, 그는 친밀할수록 웃음기 없는 얼굴을 내보이는 상대였다.
가끔 궁금해진다. 늘 그렇기만 할 것 같던 사람이 내보이는 의외로운 면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그는 제게 감정을 표현하는 말을 여러 차례 했었다.
그건 전부 진심일까? 아니면 본인의 위화감을 감추기 위해 둘러댄 말일까….
클라단 영지에서 목도했던 그의 모습이 아니었더라면 계속 이런 고민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침 햇살을 받아 귀까지 붉어진 얼굴을 하고 말을 더듬던 프란츠를 보고 있자니, 처음으로 그가 제 나이대의 청년으로 보였다.
말없이 걷기만 하는 제라니아를 따라가며 이렌스는 재차 말했다.
“그분은 타인이 말하는 자신의 평판에 관심이 없습니다. 필요하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일 뿐, 그에 연연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주변이 부산스러워진 만큼 이렌스의 목소리 역시 덩달아 낮아졌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그분을 상처 입힐 수 없지요. 공평하다면 공평하다고 하겠지만….”
“세상에 상처받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아요.”
조용히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렌스는 힐끔 앞을 쳐다보았다. 등을 꼿꼿이 세우고 올곧게 정면을 바라보는 제라니아의 입술이 살며시 달싹거렸다.
“만약 설령 그렇다 해도, 부당한 일을 겪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고요.”
“부당하다, 라….”
이렌스는 나직하게 고했다.
“전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세상에 부당하지 않은 일이 어디 있냐고.”
얼핏 듣기로는 왕족 특유의 오만함이 묻어난다고 해도 좋을 말이었다. 그것을 말한 주체가 프란츠만 아니었더라면 그렇게 듣고 넘겼을 것이다.
제라니아의 발걸음이 천천히 느려지다가, 멈췄다. 그를 따라 멈춰 서는 두 사람의 귓가에 나지막한 음성이 닿았다.
“마음에 들지 않아요.”
“예?”
“그 사람의 그런 점이요.”
제라니아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평상시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로, 크게 토라진 아이가 제 마음을 알아 달라 시위하는 것처럼.
“나는 앞으로도 이런 일을 본다면 화를 낼 거예요. 부당하다고 말하고, 해결해야 한다고 말할 거예요. 프란츠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게 맞다고 생각하니까.”
그도 알고 있다. 세상에 부당한 일은 넘쳐나고, 억울한 사람 역시 산처럼 많다는 걸.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상하지. 왜 나는 당신의 그 말이 체념조로 들릴까. 그리고 왜, 당신의 그런 태도에 화가 날까.
이렌스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지극히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심각한 상황임에도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입가를 가리는 이렌스를 리암이 괴상한 것을 보듯 쳐다봤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덧붙였다.
“그 말씀, 전하께도 꼭 해주십시오.”
일이 무사히 끝난다면.
* * *
푸른 시선이 베이지색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침대 하나와 탁자, 의자 두 개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제법 넓은 방에는 창문이 없었다. 유일하게 밖으로 나가는 입구는 닫혀 있는 데다, 외부에서 병사들이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다.
의자에 걸터앉은 채로 프란츠는 눈을 깜빡거렸다. 밧줄 자국이 남아 있는 손이 저릿했다.
방의 구성에서부터 사건 담당자들의 고뇌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혐의가 있다고는 하나 범죄가 확정된 게 아닌 만큼, 정말로 왕세자를 감옥에 넣어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본궁에서 한참 떨어진 별궁 중 하나에 격리실을 꾸민 건 그래서겠지.
프란츠는 셀리나를 만난 사실을 인정했지만, 그를 죽였다는 혐의는 부인했다. 사실 이 상황 자체가 우습기 짝이 없었다. 설령 죽이려고 했다고 한들 굳이 이토록 요란스럽게 죽일 필요가 있겠나.
만났다는 것에 대해서는 굳이 거짓말을 해봐야 좀 더 면밀히 조사하면 드러날 일이므로, 나중에 더욱 불리해지는 것보다야 인정하고 넘어가는 게 나았다.
셀리나가 세자궁에 찾아왔고, 마침 깨어 있던 자신이 그를 만났다. 왕세자비를 만나러 온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늦은 터라 차만 대접하고 돌려보냈다. 이는 세자궁에서 일하는 이들이 증언해줄 것이다.
이 말을 끝으로 그는 입을 다물었고, 모든 추궁을 흘려 넘겼다. 사실관계를 확인할 때까지는 여기에 가두어둘 모양이었다.
…당신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일이 모두 끝나기 전까지 가급적 얌전히 있어주면 좋겠지만 그럴 리 없겠지. 자신이 잡혀간 뒤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을 제라니아의 모습을 떠올리니, 이상하게도 웃음이 나왔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옆을 돌아보는 프란츠의 얼굴에 여유로운 미소가 피어났다.
그는 의자에 앉은 채로,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데릭의 얼굴을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맞은편에 마련된 의자에 앉으며 안부 인사를 건네는 데릭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국왕 앞에서 침통한 표정으로 어떻게든 범인을 찾아달라고 호소하던 남자의 모습에서는 아내를 잃은 지아비의 슬픔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프란츠는 감흥 없이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밖에서 병사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데다 문은 충분히 두꺼웠다. 여기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외부로 흘러 나갈 일은 없었다.
죄인을 심문할 때는 병사를 둘 이상 데리고 오는 것이 기본 규칙이다. 위험하니까. 병사들 없이 홀로 들어와서 제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답은 쉽게 나왔다.
“문서는 어디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