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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80화 (81/171)
  • 제80화. 누명 (1)

    프란츠가 끌려나간 뒤, 제라니아는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한꺼번에 많은 사실을 목도한 탓인지 머리가 멍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셀리나가 정말 죽었다고? 프란츠가 셀리나를 만났어?

    마지막으로 만난 게 일주일 전, 데릭이 셀리나를 데려갔던 때였다. 도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생각을 털어내듯 제라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손바닥을 펼쳤다. 밧줄에 묶이기 전 프란츠가 몰래 제 손에 쥐여주었던 작은 손거울의 모양이 익숙했다. 그가 가신들과 연락할 때 쓰던 물건이었다.

    이걸 왜 나한테 줬지?

    당황스러움에 손으로 이마를 짚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재빨리 안으로 들어오는 리암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가득 묻어났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전하께서 끌려 나가시던 것 같은데….”

    “…리암, 마침 잘 왔어.”

    제라니아가 가볍게 제 뺨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피부끼리 짝 달라붙는 소리와 함께 정신이 드는지 그가 눈을 깜빡였다.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니지, 그럼.”

    “뭘 어쩌실 셈입니까?”

    “상황을 알아보러 가자. 그래야 뭘 할 수 있을 것 같아.”

    차분한 음색이 흘러나왔다. 평소와 달라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손이 살며시 떨리고 있었다. 그것을 곁눈질로 힐끗 쳐다본 리암이 정중하게 말했다.

    “비전하, 제가 잠시 무례를 저질러도 괜찮겠습니까.”

    “괜찮아.”

    말이 끝나자마자 리암은 손을 뻗어 제라니아의 손을 꽉 붙잡았다. 웃음기 없는 진지한 얼굴, 걱정 말라는 듯 굳건하고 단단한 손이 제라니아가 느끼고 있을 동요를 조용히 걷어냈다.

    떨림이 멎을 즈음에야 리암은 손을 놓아주었고, 제라니아는 그제야 몸을 움직여 방을 나섰다.

    셀리나 리나엔의 죽음이 알려지면서 왕궁 내부는 세차게 술렁거렸다. 셀리나의 시신은 왕궁 안에 자리한 숲 언저리에서 발견되었고, 지금은 왕궁으로 옮겨진 상태였다.

    “이렇게 둘만 만나는 건 처음인가.”

    능글맞게 올라간 입꼬리와 달리, 사납다 느껴질 만큼 날카롭고 붉은 눈동자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인을 주시했다. 차조차 내오지 않고, 상대의 요청으로 사람을 다 물린 터라 방에는 단둘뿐이었다.

    꼭 비밀 이야기를 시작할 것처럼.

    “그래, 무슨 볼일이지.”

    소파에 등을 기대고 살짝 턱을 치켜든 국왕은 흡사 배부른 사자처럼 보였다. 얌전하고 단정한 얼굴을 하고 있어, 초식동물을 연상케 하는 제라니아와는 영 딴판이었다.

    “허가가 필요합니다.”

    “허가?”

    “셀리나 왕자비를 만나러 갔는데, 병사들이 들여보내 주지 않더군요.”

    셀리나의 시신을 모셔 두었다는 건물의 경비는 철통같았다. 지키는 병사들이 전부 데릭의 사람들인 만큼 그들은 제라니아를 안으로 들여보내려 하지 않았다.

    막막한 상황에서 제라니아는 결단을 내렸다. 이 일에는 누군가의 협력이 필요했다. 평소였다면 프란츠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것이나, 그가 없는 이상 제라니아가 찾아갈 만한 상대는 단 한 명뿐이었다.

    다행히도 국왕은 제라니아를 내치지 않고 독대를 허락했다. 제 며느리가 죽었다는 소식에도 그는 크게 동요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안타깝다는 둥 말을 늘어놓아도 그 속까지 그럴지는 알 수 없었다.

    맹수와 같은 안광이 제라니아를 집어삼키듯 빛났다.

    “왕자비를 만나서 뭘 어쩔 셈이지?”

    “…….”

    “본인의 입장을 모르지 않을 텐데. 왕자비를 살해했다 의심되는 용의자의 하나뿐인 여인이지 않나.”

    용의자,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제라니아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국왕은 서슴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왕궁을 들쑤시고 다녀봐야 좋은 소리를 들을 리가 없지. 왕세자에게 불리할 법한 증거를 인멸하려 움직인다 여겨질 수도 있는데.”

    “…그이는 동서지간이기 이전에 제 친우입니다. 이별을 고할 시간 정도는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적은 그것만이 아니겠지.”

    제라니아는 입을 다물었다가, 잠깐의 뜸을 들인 뒤 다시 말했다.

    “전하께서 용의선상에 오른 만큼, 그분을 향한 의심은 앞으로도 깊어질 겁니다. 그러기 전에 다녀오고자 합니다.”

    셀리나를 죽인 범인은 프란츠가 아니다. 그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우선 동기가 없었고, 설령 정말 셀리나를 죽이려고 했다 해도 의심받지 않게 일을 처리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진짜를 찾아야 했다. 제 친구의 목숨값을 치러주고, 프란츠를 누명에서 구해야만 한다.

    꼭 쥐어 무릎 위에 올려둔 주먹 안에 땀이 배어났다. 이게 뭐라고, 이토록 긴장이 되나.

    “이미 다른 이들에게 범인을 수색할 것을 명령해 두었네. 굳이 그대가 나설 필요가 있겠나?”

    가만히 있으면 될 걸 왜 굳이 나서려고 하냐, 그렇게 묻는 국왕에게 제라니아는 조용히 질문으로 답했다.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왕궁에서는 매년 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난다. 목숨을 잃은 왕족이 그간 없었던 게 아니라, 대놓고 살해당한 이가 없었을 뿐이다. 그간 의문사가 많았음에도 제대로 수사하지 않던 이들이 이번 일이라고 제대로 범인을 찾을까.

    왕궁을 돌아다니면서 저를 보고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보았다. 호의보다는 의혹 어린 시선들이 얼굴을 콕콕 찔렀다.

    벌써 프란츠에 관련된 소문이 퍼진 모양이었다. 하긴, 묶인 채로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이동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제대로 범인을 찾지 못하면 빠져나올 수는 있을지 몰라도, 아마 그런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리라.

    침묵이 둘 사이를 가로질렀다. 국왕의 미간에 줄이 그어졌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듯, 못마땅한 눈초리로 그가 말했다.

    “그대가 영민한 이라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네. 허나, 그대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나? 범인을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었다면 왕세자가 잡혀 들어갔을 리가 없지.”

    “찾으려고 한다면 길은 있겠지요.”

    “미약한 가능성 하나를 붙잡자고 모험을 하겠다?”

    낮게 혀를 차던 국왕이 몸을 일으켰다. 워낙 거구라 그런지 앉은 자세로도 제라니아를 살짝 내려다보는 모양새였다.

    “범인을 찾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 텐가.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텐데. 아마 그대의 집안으로도 온전히 덮을 수 없을 만큼.”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국왕의 목소리가 워낙 낮은 탓에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활짝 열어둔 창문에서 뻗어 나온 햇빛이 국왕의 등에 닿아, 제라니아의 몸 위로 그늘을 드리웠다.

    낮이 만들어낸 어둠이 서늘하게 그를 감싸 안았다.

    “대신, 찾아낸다면 한순간에 모든 게 역전되겠지요.”

    여인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위압감을 느낄 만한 상황에서도 당당한 목소리가 국왕의 흥미를 끌었다.

    제라니아의 주먹에서 천천히 힘이 풀렸다. 축축하게 젖은 손바닥이 부드러운 드레스 자락에 닿았다.

    “자신이 있는 건가?”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확신을 주어야 했다.

    일말의 망설임을 능숙하게 숨기며 제라니아는 한껏 단호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두렵더라도 일단은 나아가야 했다. 제 자신에게 확신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어떤 변수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몰랐다.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혼자가 아니니까.

    이지적이고 또렷한 눈빛과 차분하고 냉철한 목소리, 여인의 얼굴엔 어떠한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바이첸 재상의 여식이라 그런지 아비를 많이 닮은 외모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상대였다.

    그렇기에 신기했다. 한낱 여인일 뿐인데 어째서 이리도 시선이 가는지 모르겠다. 공작의 딸과 결혼하겠다기에 단순히 배경을 얻고자 하는 줄 알았건만, 그런 것만은 아니었던 걸까.

    “좋다. 딱 사흘의 시간을 주지. 그동안 범인을 알아내도록 하게.”

    “…사흘이요?”

    “왜, 못 하겠나?”

    “아닙니다.”

    국왕을 향하는 제라니아의 시선이, 바닥을 향해 비스듬하게 뻗은 햇살만큼이나 곧았다.

    “해보겠습니다.”

    국왕과의 독대를 끝내고 밖으로 나온 제라니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국왕이 직접 하사한 증명패를 손에 꼭 쥐고 있는 제라니아의 앞으로, 대기하고 있던 리암이 다가왔다.

    괜찮냐고 묻는 그에게 제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인 뒤 앞장섰다. 저를 보고 수군거리는 이들을 무시한 채, 복도를 부지런히 걸어 본궁 밖으로 나가자 화창한 햇살이 얼굴로 쏟아졌다.

    통로의 바깥쪽으로 왕궁의 정원이 내다보였다. 여전히 한껏 화려하게 꾸며져 있는 꽃밭과 달리, 예쁘게 단장하고 있던 나무들은 옷을 벗듯 하나둘씩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앙상한 가지를 드러냈다.

    날이 무척 좋아, 원래였다면 기뻐하며 산책을 나갔을지도 모른다. 이토록 좋은 날씨조차 왕궁 전체에 들러붙은 음울한 기운을 아주 떨쳐내지는 못했다.

    셀리나가 있는 건물은 본궁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국왕이 아예 안 쓰는 작은 건물 하나를 데릭이 이끄는 조사팀이 쓸 수 있도록 내어준 덕이었다.

    제라니아가 찾아갔을 때, 그는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만났다면 언성을 높일 일이 생겼을지 모른다.

    다시 건물로 들어가, 쭉 뻗은 복도를 지나 이제 막 모퉁이를 돌려던 제라니아는 귓가에 꽂히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진짜 역대급 치정 싸움이긴 해.”

    치정 싸움? 제라니아는 빼꼼 고개를 내어 모퉁이 건너를 살펴보았다. 세 명의 시녀가 빨랫감이 든 바구니를 하나씩 챙겨 들고 방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리암을 손짓으로 멈추게 한 뒤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시녀들은 제라니아가 엿듣고 있는 줄도 모르고 제법 열심히 떠들었다.

    “비전하만 불쌍하게 됐지~. 안 그래?”

    “그러니까 말이야. 설마 왕세자 전하가 그런 파렴치한일 줄 누가 알았겠어? 착해 보이는 분인데 안타깝게 됐네.”

    “근데, 너무 속단하는 거 아닐까? 그냥 둘이 만났을 뿐이잖아.”

    콧잔등에 주근깨가 있는 시녀가 우물쭈물하다 내뱉자, 다른 둘이 그 시녀를 보며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꼭 순진무구한 아이를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얘 좀 봐. 중요한 건 밤에, 둘이서 만났다는 거지! 젊은 남녀가 밤중에 단둘이 만날 일이 대체 뭐가 있겠어?”

    “어떻게든 둘러대지만 뻔할 뻔 자야. 게다가 셀리나 비전하는 왕국에서 손꼽히는 미인으로 유명하잖아? 게다가 비전하랑 친한 사이라고 하니, 그런 인연으로 만나다가 눈 맞은 게 아니겠어?”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일까. 꽤 작은 소리로 말했음에도 단어 하나하나가 무척이나 잘 들렸다. 표정이 점점 굳기 시작하는 제라니아를 리암이 난감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제라니아의 어깨를 리암이 콕콕 두드렸다. 뒤를 돌아보자 리암은 ‘나설까?’라고 입 모양으로 말했고, 제라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기다려.

    “설마. 전하께서 비전하를 그렇게 좋아하시는데. 결혼 발표 때부터 난리였지 않았어?”

    “얘는, 사랑이 식었나 보지. 국왕 폐하를 봐. 그렇게 여자를 좋아하시는데 왕세자 전하라고 별수 있겠니?”

    “게다가 딱 봐도 집안을 노린 정략혼이잖아. 내가 아는 애한테 들었는데, 두 분 사이는 의외로 많이 건조하대. 왕세자 전하는 잘 웃기로 유명하시잖아? 그런 분이 비전하 앞에서는 별로 웃지도 않으신다고 하고.”

    “세자비 전하가 그렇게 미색은 아니니까. 남자라면 누구나 예쁜 여자를 좋아하지 않겠어?”

    제라니아는 살며시 벽에 머리를 기댔다. 차가운 벽의 감촉이 열이 오르려는 머리를 식혀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전하께서 그분을…. 그렇게 할 이유가 없잖아?”

    “물론 그냥 보면 그렇지. 이건 내 생각인데 말이야…. 그런 얘기가 돌더라고. 왕자비 전하가 요 근래 꽤 불안해했다는 얘기.”

    은밀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려던 제라니아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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