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75화 (76/171)

제75화. 비극의 서막 (2)

말끝을 흐리던 이렌스가 곧 입을 열었다.

“이안 왕자님 쪽에서 약혼을 꺼리시는 것 같습니다. 태도가 꽤 강경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잠정 보류된 상태라고 들었습니다만….”

프란츠는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켰다. 이건 좀 의외였다.

“이유는?”

왕비가 아들에게 끔찍한 만큼, 이안 역시 상당한 효자로 유명했다. 그는 어지간해서는 어머니의 뜻을 거스를 성격이 아니었다. 어머니조차 제 야심의 발판으로 이용하는 데릭과는 여러모로 반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더 껄끄럽게 느낀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 채, 프란츠는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공손한 말투로 대답하는 이렌스와 프란츠 사이로 묘한 정적이 흘렀다. 프란츠는 꾹 닫고 있던 입술을 열어 지시했다.

“일단 지켜보도록 해.”

“예.”

“…….”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프란츠의 시선에 이렌스는 더욱 꼿꼿이 허리를 폈다. 지시할 사항이 더 있으신가. 하지만 그렇다면 저렇게 시간을 끄실 리가 없는데.

“…요즘 비가 도서관에 다닌다고 하던데.”

“예?”

“아마 지금도 거기 있을 테니, 들여다보고 오도록. 내가 시켰다는 건 비밀로 하고.”

뜬금없는 말에 이렌스는 눈을 껌뻑거리며 프란츠의 의중을 살폈다. 덤덤한 표정은 평소와 같았으나 그래서 더 기이했다.

“혹시 시찰에서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그건 왜 묻지?”

“직접 가시면 될 걸, 왜 저를 보내시는지 이해가 안 돼서요.”

꼭 염탐이라도 시키는 것 같지 않은가. 그것도 심지어, 같은 방에서 한 이불 덮고 잠드는 사이면서.

제 주군이 괴이한 명령을 할 때가 많긴 했으나, 대체로 맥락을 생략할 뿐이지 기본적으로 다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이건 명백하게 이상하지 않은가.

말마따나 직접 가면 되는 일에 왜 자신을 끼워 넣는가. 직거래를 하는 것보다 중개인을 끼고 거래하는 것이 더 불편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합리적인 결론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그답지 않았다.

거래 상대와 문제가 생긴 게 아니라면야.

조심스럽게 고하는 이렌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프란츠는 가만히 팔짱을 꼈다.

“불복할 셈이냐.”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치사하게 이러시긴가요. 대답하기 싫은지 권위를 내세우는 주군의 태도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이렌스는 가만히 고개를 조아렸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먹고살기 참 힘들다.

회의를 마친 뒤, 프란츠의 명대로 이렌스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도서관에 발을 들여놓자, 책상 하나를 차지하고 열심히 씨름하고 있는 동그란 갈색 머리통이 보였다.

높게 쌓인 책들이 제라니아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비전하.”

조용히 그를 부르자 무언가를 적고 있던 제라니아의 고개가 돌아갔다. 어서 와요, 부드럽게 말하는 목소리와 함께 제라니아가 펜을 내려놓았다.

시찰에서 돌아오자마자 제라니아는 도서관에 틀어박혔다. 근래 프란츠가 궁에 이토록 오래 머무른 적이 없음에도, 서로 얼굴을 자주 보지 못했을 정도였다.

일단 제라니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무엇을 하시느라 그렇게 집중하고 계셨습니까.”

“어.”

제라니아가 가볍게 손짓했다. 그 손짓대로 이렌스가 제라니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회색 머리칼이 흘러내려 그의 옆얼굴을 가렸다.

“영지전을 대체할 방법,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낮게 속살거리는 목소리에 이렌스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정말입니까?”

“몇 가지를 더 검토해야 할 것 같지만.”

이렌스가 의자를 끌어 맞은편에 앉자, 제라니아는 글씨가 잔뜩 적혀 있는 종이 몇 장을 그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제라니아의 주변으로 펼쳐져 있는 책들을 하나하나 살피던 이렌스의 눈이 종이를 가볍게 훑다가, 곧 진지해졌다.

한참 동안 종이들을 정독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비전하다운 방식이군요.”

“칭찬인가요?”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존재합니다.”

능숙하게 말을 돌린 이렌스가 종이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단계별로 적용해야 하겠군요. 방식이 꽤 복잡해 보이는데, 적절한 시기에 치고 빠지는 게 중요해 보입니다.”

“아무래도 그렇죠. 국가 차원에서의 전면적인 감독이 필요해요.”

“일주일 만에 이 정도로 얼개를 짜신 건가요.”

나지막이 감탄사를 흘리는 이렌스에게 제라니아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보다시피 아직까지는 틀만 있는 상태예요. 그러니 이렌스가 절 좀 도와줘야겠어요.”

“제 일거리까지 비전하께 빼앗기지 않으려면 분발해야겠군요.”

답지 않게 농담을 던지는 이렌스를 보며 제라니아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렌스가 차분히 말을 꺼냈다.

“오랜만에 얼굴을 뵙는다 했더니, 갑자기 이런 어마어마한 계획을 짜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단순히 귀족들의 세력을 누르는 것만이 아닌, 크게 보면 제라니아가 말했던 교육 체계의 재편과도 맞닿아 있는 일이었다. 그것을 관통하는 의지는 명백했다.

“이미 생각해두신 바가 있으셨던 겁니까. 아니면, 특별한 계기라도 있으셨습니까.”

빛을 삼킨 듯한 새까만 눈동자가 제법 날카롭게 빛났다. 그 눈을 마주하며 제라니아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특별한 계기라…. 그냥, 이번에 노예 경매 관련으로 일이 있었잖아요.”

“예, 들었습니다.”

“그게 신경이 쓰여서….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떠올린 거예요.”

모든 일은 의외로 아주 작은 계기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이 있다. 자신이 짠 모든 계획의 종착지에 노예제 폐지가 있음을 제라니아는 구태여 부정하지 않았다.

노예라는 계층에 관한 관심은 예전부터 있었다. 힘이 없었기에 그 이상 논지를 전개시키지 못했을 뿐이다. 무엇을 만들더라도 제대로 실행할 수 있을 리 만무했으니까.

제라니아는 결혼하기 전, 모임에서 사람들과 만나 어떤 주제로 토론을 나눈 적이 있었다.

반란이라는 방식을 제외하고, 권력과 크게 맞닿아 있지 않은 일개 개인의 집합이 나라를 바꾸는 것이 가능할까.

모여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가능하다는 견지를 내놓았고, 제라니아 역시 같은 생각을 했다.

국가의 권력은 왕과 영주, 즉 귀족에게 집중되어 있다. 전란의 시대가 길었고, 그만큼 기사들의 영향력 역시 무척이나 컸다.

영지 안의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서는 그러한 항의가 먹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국가를 상대로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위정자라면 권력을 가진 이들의 의견을 우선할 수밖에 없고, 국가를 이루는 것은 평민이되 관여하는 건 귀족이었으니까.

사실 이러한 생각 자체가 허용되기 곤란한 시대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제라니아를 포함해 모임에 참석하던 이들은 제 신분을 감추고 얼굴을 가렸다. 특유의 억양으로 인해 계층을 아주 숨길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그 모임 자리를 일종의 피난처로 삼았다.

서로가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기에 도리어 솔직해질 수 있는 자리. 그곳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면서, 제라니아는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는 행위 자체가 생각을 전개시키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혼자서만 생각하던 일들이, 입 밖으로 말이 되어 튀어나오면서 점차 정리되어 갔다. 무엇을 원하는지도 점차 분명해졌다.

그럼에도 답답함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의견을 나누는 것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하지만, 지금 제라니아는 왕궁의 중심에 있었다.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분명 다음 대 국왕이 될 상대를 남편으로 두었고, 그에게서 왕실의 이름을 걸고 받아낸 약조도 있었다.

설령 한 가지뿐일지라도, 제약 없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 일인지 당신은 알까.

“그렇군요.”

이렌스는 손등에 턱을 괴고 말했다. 경청하는 듯하면서도 무심한 태도였다.

“이렌스는 늘 한결같네요.”

“무엇이 말입니까.”

“보통 여인이 하는 말을 이렇게 귀담아듣는 사내란 드물지 않나요.”

“이 나라의 정점이 되실 분을 섬기는 자가 평범해서야 되겠습니까.”

더없이 가볍게 들리는 음성에는 바위처럼 단단한 확신이 뿌리박혀 있었다. 현실적이고 신랄하기 짝이 없는 남자에게 이만한 믿음을 줄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전하께서 왕이 되시리라고 믿으시는군요.”

“…믿고 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냉엄한 눈초리가 선고를 내리듯 지그시 제라니아를 쳐다보았다.

“전하께서 왕이 되지 않으신다면 미래에는 더한 혼란이 올 겁니다.”

주변이 너무 고요한 탓일까, 분명 작은 목소리로 말했음에도 유독 선명하게 들렸다.

“…그만 일어날까요, 이렌스.”

적어도 여기서 나눌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책을 정리하기 시작하는 제라니아를 이렌스는 묵묵히 도왔다. 제라니아가 종이들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고, 이렌스는 그 곁을 지나가던 사서에게 책의 정리를 맡겼다.

도서관 밖으로 나와 야외 통로를 걸어가자, 늦가을을 맞아 건조하고 쌀쌀한 밤공기가 얼굴에 확 번졌다.

주변이 무척 어두웠다. 통로의 기둥에 매달린 등불이 은은하게 빛을 냈다.

“지금 왕국의 구조는 더없이 기형적입니다.”

제라니아가 앞장서고, 그와 한 걸음 정도 거리를 둔 이렌스가 그 뒤를 따랐다.

“국가의 발전을 전쟁에 의존했던 만큼, 왕국에서 기사의 위세는 지나치게 드높습니다. 전쟁에 오래 시달렸기에 평온한 삶을 바라는 마음이 종교의 득세를 초래했고 말이죠.”

기사들은 전쟁에서 공을 세워 왕실로부터 봉토를 하사받아 영주가 되었다. 농민들은 일신의 안전을 보호받기 위해 영주의 휘하로 들어갔고, 그것이 모여 장원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 영주들이 신전과 손을 잡고 정치에 관여하고 있죠. 때문에 왕실은 오랜 시간 그들에게 휘둘려 왔습니다.”

제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도 쉬이 말하지 못하는 진실을 거침없이 입에 담는 남자의 대담함이 놀라우면서도, 부럽기도 했다.

“부실한 지반 위에 세워둔 탑이 오래 버틸 리가 없지요. 아마, 분명 큰 위기가 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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