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74화 (75/171)

제74화. 비극의 서막 (1)

“전하께서요?”

제라니아의 반문에 이렌스는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주군이 역모죄를 저질렀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말하면서도 지극히 산뜻한 태도였다. 제라니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말도 안 되잖아요.”

전하께서 그런 짓을 왜? 제라니아는 힐끔 프란츠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마치 남의 일을 관망하는 양 무감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가 말했다.

“정확히 고해라.”

“닷새쯤 전부터인가, 소문이 돌기 시작한 건 그즈음입니다.”

국왕이 병석에 앓아누웠고, 독살 시도가 의심되며 그 배후로 프란츠를 지목하는 소문이 돌고 있다. 생각보다 소문의 전파 속도가 빨라 수습하기도 전에 이미 퍼질 대로 퍼졌고, 거의 기정사실 취급되고 있다.

이렌스의 설명이 끝나자, 프란츠는 나른한 목소리로 답했다.

“제대로 입단속을 시켰을 텐데.”

병세에 관한 이야기가 어떻게 퍼져나간 거냐는 함의가 내포된 질문에 이렌스는 차분히 대답했다.

“그렇잖아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자들을 잡아들여 심문하고 있습니다. 국왕께서 무척 진노하신 상태라.”

국왕의 입장에서는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사실이 타의로 폭로된 셈이니 당연했다. 조용히 문제를 해결하려 했는데 보기 좋게 뒤통수를 맞은 셈이니 그 성질머리에 오죽할까. 프란츠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일이 귀찮아졌군.”

그들은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아렌타의 저택에서 벌어졌던 노예 경매에 관해 조사할 예정이었다. 이 상황에서 그가 나서봐야 소문의 확산을 도울 뿐이니, 당분간 몸을 사려야 하겠지만.

계획 한번 제대로 틀어지는군.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미 정답을 알면서 묻는 제 책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프란츠가 입을 열었다.

“국왕 폐하를 뵈어야겠다.”

돌아서는 프란츠의 붉은 망토 자락이 펄럭거렸다.

* * *

“아주 난리가 났더구나.”

침실에서도 권위를 챙기려는지 의자에 근엄하게 앉아 있는 국왕을 향해 프란츠는 형식적인 의례를 챙긴 다음 질문했다.

“기사들은 무사히 돌아왔습니까.”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는 모습에 국왕은 혀를 차면서도 테이블 위를 눈짓했다.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두툼한 책을 집어 든 프란츠가 무심히 페이지를 넘겨 내용을 확인했다.

“쓸 만하군요.”

짤막한 감상을 남기며 책을 덮는 프란츠에게 켄드릭은 말했다.

“정보를 얻은 건 좋다만, 그 과정에서 아까운 기사들을 잃었다.”

침통한 표정으로 보고를 올리던 기사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국왕은 진심으로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중요한 게 있긴 했던 모양입니다.”

낯빛 하나 변하지 않는 아들을 바라보며 국왕은 매정한 놈이라 덧붙였다.

“어떻게 할 거냐.”

“유가족들에게 훈장 수여와 더불어 충분한 보상을 보내는 것이 마땅한 줄 아룁니다.”

“아니, 그것 말고.”

다 알면서 왜 그러냐는 듯 손짓하는 국왕에게 프란츠는 잠시 뜸을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잖아도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만, 국왕 폐하께서 직접 명을 내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조용히 처리해야 할 이유가 사라진 거, 차라리 대대적으로 수사를 시작하는 게 나았다. 장부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으니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도 명확했다.

국왕은 조용히 미간을 찌푸렸다.

“계약 조건은 그게 아니었을 텐데.”

프란츠가 계약대로 왕위 계승을 받고자 한다면 그의 선에서 범인을 잡아야만 했다. 포기할 거냐고 돌려 묻는 말에 프란츠는 살짝 어깨를 으쓱했다.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 것뿐입니다. 지금 분위기에서 제가 나서면 역효과만 날 테니까.”

조사를 주도할 인물들은 이미 선정해 놨으니, 남은 건 국왕의 승인을 받는 일뿐이었다. 이렌스가 이미 정리해둔 서류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며 프란츠는 지나가듯 물었다.

“의심하지 않으십니까?”

“무엇을 말이냐.”

“정말 제가 범인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소문의 대부분은 근거가 없다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냐 의심하는 이들도 상당했다.

그가 여상한 투로 말하자, 국왕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네 녀석이 한 짓이냐?”

“아닙니다.”

“그럼 됐다.”

너무 간단하게 넘어가는 거 아닌가. 그렇다 쳐도 깊게 파고들 필요는 없었으므로, 그냥 돌아서려던 프란츠의 발걸음이 우뚝 멎었다.

“국왕 폐하.”

나직한 목소리가 말문을 텄다.

“제가 당신을 끝장내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면서, 왜 저를 옆에 두는 겁니까.”

왕의 생각에 긍정해줄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 이건 사소한 변덕 같은 거였다. 그와 저 사이의 관계는 통상의 가족이라 하기엔 꽤나 건조했고, 왕족으로서는 적당한 정도였다.

그럼에도 국왕은 묘하게 다른 자식들보다 제게 관대한 구석이 있었다.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었다. 굳이 파고들지 않으려고 했을 뿐이지.

“왜일 것 같으냐.”

의미심장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는 국왕의 눈이 무언가를 바라는 것처럼 기이하게 일렁였다. 복잡한 감정들이 붉은 눈동자 너머로 넘실거렸다.

꼭, 자신에게서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탐색하는 시선. 제 외양이 누구에게서 왔는지를 생각하면 답은 쉬웠으나,

“잘 모르겠습니다.”

프란츠는 언제나와 같이 그 답을 외면했다.

그가 제게 어떤 감정을 가지든, 그것을 감당하는 건 제 몫이 아니었다. 후회한다 한들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고, 이미 벌어진 일의 결과는 온전히 본인이 책임져야 마땅하다.

끝까지 엇갈려야만 하는 관계, 영원한 평행선. 그들 사이를 정의하는 말은 그것으로 족했다. 프란츠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태양의 찬란함이 언제나 국왕 폐하께 깃들기를. 무의미한 축복의 말을 읊조리며 프란츠는 뒤돌아섰다.

* * *

금방 진화될 거라 생각했던 소문은 예상보다 훨씬 더 오래 버텼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소문이 사그라질 기미가 전혀 없자, 프란츠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부추기는 이가 있겠군.”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국왕이 직접 나서서 부정했음에도 소문은 알음알음 왕궁을 계속 떠돌았다.

일주일간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국왕이 장부에 적혀 있는 이들에 관한 대대적인 조사를 명했고, 조사단의 우두머리에 데릭 왕자가 임명되었다. 감옥 마차에 실려 이송되는 노예들의 행렬을 사람들은 신기한 것을 보듯 구경했다.

조사를 명받은 이들은 쉐링턴 남작을 체포하고 병사들을 아렌타로 내려보냈다. 제라니아가 발 빠르게 움직인 덕분에 상단 지부에서 노예 경매와 관련된 장부를 찾아내긴 했지만, 노예들이 제공된 경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증거를 말소한 것처럼 깨끗하게.

목숨을 잃은 기사들의 경우 시신을 제대로 수습해 장례를 치렀다. 국장을 치르고 훈장을 수여해, 그들의 공로를 치하했다.

왕실에서 파견한 조사관들은 노예들을 추궁했으나 그들은 자신이 온 장소에 대해서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신관들은 그들이 혼동 마법에 걸려 있어 기억이 불완전하다는 진단을 내렸다.

마법에 관련된 문제이니만큼 신전에서도 사람을 파견했지만, 그들 역시 추적에 실패했다. 강력한 마법의 힘이 추적을 방해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사실에 충격을 받은 건지 신전에서는 대략 서른 명이 넘는 고위 신관들을 조사단으로 보냈다. 마법이 신전의 전유물이라 여겨지는 만큼, 이 문제를 좌시할 생각이 없다는 강력한 의사 표명이었다.

조각나 있는 단서들을 어떻게든 끼워 맞춘 조사단은 이 문제의 뒤에 거대한 조직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마법사를 보유하고 있으며 상당히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고, 역사가 오래되었을지도 모르는, 그런 조직이.

조사단에 심어둔 이에게 슬쩍 귀띔을 들으면서, 이렌스는 이 일에 직접 나서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정말이지, 소문을 흘린 놈이 눈앞에 있다면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프란츠는 이 모든 일에서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난 상태를 유지했다. 당분간 조용히 지내야 하는 만큼 그는 간만에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아주 쉬고 있는 건 아니었다.

소파에 마주 앉아 보고를 올리는 이렌스의 얼굴이 무덤덤했다.

“민간에도 소문이 퍼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현실적인 대답을 건네는 이렌스를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며 프란츠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이쯤 되면, 정말 범인을 잡으라고 등을 떠미는 것 같은데.”

“범인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쉽게 사그라질 것 같지 않습니다. 실제로 상황만 따져본다면 얼핏 보기에도 전하께서 최대 수혜자인 건 맞으니까요.”

“이렇게 허술하게 굴진 않겠지만.”

부추기는 이가 있다면 그 배후에 있을 사람은 필연적으로 둘이었다.

데릭과 왕비.

“어느 쪽일까요.”

“둘 다.”

프란츠는 단언했고, 이렌스 역시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한쪽만이 움직인 일이라면 다른 한쪽이 이렇게 잠잠할 리 없다. 데릭이 유난을 떨고 있긴 했지만 아마 눈속임일 것이다.

프란츠가 데릭을 조사단에 천거한 이유는 그가 가진 탐욕을 믿어서였다. 역모에 관련된 문제이니만큼 해결하면 따라오는 보상이 상당할 테니, 분명 열심히 응하리라 생각했고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아, 그리고. 신전에 보내뒀던 첩자 하나가 소식이 아예 끊겼습니다. 아무래도 걸린 모양입니다.”

신전에 보내둔 첩자들의 양상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소문을 퍼트리는 자와 정보를 모아 오는 자. 역할을 나눈 건 들켰을 때를 대비해 최대한 정보를 분산하기 위해서기도 했다.

“문제가 될 여지는?”

“그자의 입에서 전하의 이름이 나올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됐다는 듯 프란츠가 무료하게 손짓하자, 이렌스가 냉큼 다음 보고를 꺼냈다.

“그리고, 최근 케라온 공작이 왕비 측과 접신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왕비한테 말인가.”

갑자기 왜. 그렇게 묻는 듯한 프란츠의 눈을 마주 보며 이렌스는 차분히 대답했다.

“추측으로는…. 이안 왕자님을 노리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윌터 경에게 딸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윌터는 7년 전 사별한 부인과의 사이에 딸 하나를 두고 있었다. 수도에서 지내고 있다고 했던가. 프란츠가 아, 감탄사를 뱉었다.

“나이가 몇이지?”

“열둘입니다. 이안 왕자님이 올해 열다섯이 되셨으니, 약혼을 한다면 적당한 나이기는 하지요.”

프란츠가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팔을 톡톡 두드렸다.

“약혼이라, 성사된다면 꽤 성가시겠군.”

지금도 보데로아 후작의 세가 지나치게 큰데, 여기에 케라온이 가담한다면 권력 구도가 전복될 가능성도 없잖아 있었다. 데릭의 뒤에 휴스타인이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골치가 아프거늘.

“다만, 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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