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화. 수상한 가면무도회 (6)
협력하지 않을 수 없게 몰아가면서도 자신을 탐색하는 그 시선에, 후작은 노예들의 탈옥이 눈앞의 여인과 관련되어 있음을 직감했다.
“…기꺼이 협력하겠습니다.”
하하 호호 웃고 있는 두 사람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안내를 받아 환하게 빛나는 성 안으로 들어가는 제라니아의 뒷모습을 후작은 지그시 응시했다.
맹랑한 계집.
이겼다고 생각하겠지. 하나 그는 당하고만 끝낼 생각이 없었다. 며칠 전 첩자를 통해 알아낸 재미있는 정보가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수도에 마련해둔 선물이 부디 마음에 들기를.
후작의 입꼬리가 살며시 비틀려 올라갔다.
* * *
불타오르는 저택과 달리, 이쪽은 아주 고요했다.
“으악!”
새까만 복장을 한 네 명의 기사들은 조용히 어둠을 틈타 불이 꺼져 있는 상단 건물로 접근했다. 그들은 건물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을 깔끔한 솜씨로 기절시켜 밧줄로 꽁꽁 묶었다.
육탄전을 선호하는 만큼 길버트나 보노는 간만에 몸을 풀겠다며 날아다녔고, 상대적으로 침착한 패트릭과 키스는 뒤에서 그런 둘을 엄호했다. 놀러 온 게 아니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물론 둘은 귓등으로 듣고 넘겼다.
유일하게 기절시키지 않은 병사에게 상단주가 머무는 방의 위치를 알아낸 뒤, 그들은 그 역시 고이 꿈나라로 보내주었다. 방을 이 잡듯이 뒤진 이들은 상단주가 숨겨둔 비밀 방을 찾아내 그곳에서 문서 한 장을 발견했다.
문서를 챙긴 뒤 그들은 기분 좋게 건물을 나섰다. 내일이면 난리가 나겠지만 이 정도 소란쯤은 괜찮지 않을까. 묘하게 허술한 경비에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딱히 문제를 느끼지는 못했다.
약속 장소로 잡아둔 외곽의 숲으로 향하면서, 키스는 제 손에 쥐어진 두루마리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이 문서가 진짜라면, 난리가 나겠군.”
“난리만 나겠나. 아주 뒤집어질 판인데.”
와하하, 웃는 보노의 목소리가 자못 쾌활했다. 하여간 매사에 긍정적인 녀석다웠다. 손을 눈가에 대고 저 멀리를 내다보던 길버트가 입을 열었다.
“저쪽에서 연기가 나는데, 설마 불이라도 났나?”
“저택 쪽이잖아. 혹시 저택에 불이라도 붙인 거 아니야?”
“크리스토퍼 경이나 헤네스 경이 그런 일을 벌일 리가요.”
패트릭이 차분하게 받아쳤고, 남은 셋 역시 공감했다. 이 팀에서 가장 소란과 인연이 없는 인물들이 아니던가. 한 명은 워낙 진중한 성격이고, 다른 한 명은 귀찮은 일을 감수하기 싫어하는 이였으므로.
도시를 벗어나 숲의 초입에 다다랐을 때, 앞장서 뛰어가던 보노가 제 앞에 튀어나온 누군가를 발견했다.
새하얀 로브를 입은 상대였다. 키는 그들 중 제일 큰 패트릭의 턱까지 오는 정도에, 후드를 눌러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 멈춰 선 네 명의 기사가 그와 대치했다. 키스가 놀라 소리쳤다.
“누구냐!”
“문서의 내용을 봤습니까?”
엉뚱한 질문을 던지는 상대를 보고 기사들은 전부 검을 빼 들었다. 그게 대답이 되었는지 로브 아래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헛된 발버둥을 치는군요.”
그렇게 덧붙인 이가 그들에게로 손을 뻗었다.
“뭐, 뭐지?!”
무형의 힘이 기사들의 손에서 검을 빼앗더니, 곧 그들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급하게 단검을 빼 들 틈도 없이, 춤을 추듯 움직이던 검들이 기사들의 몸을 마구잡이로 베어냈다.
촤악, 소리와 함께 피가 공중으로 튀었다.
기사들이 피를 토해내며 그대로 풀밭 위로 고꾸라졌다. 순식간에 처참한 주검이 된 이들을 힐끗 내려다보던 이가 몸을 숙여 키스의 손에 쥐어져 있던 문서를 주워 들었다.
그리고, 모습을 감췄다.
“…뭐지, 이건.”
약속 장소로 향하던 중, 피 칠갑이 되어 있는 시신들을 발견한 크리스토퍼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시체를 살펴보던 크리스토퍼의 뒤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황급히 뒤를 돌아보자 헤네스가 그와 같이 망연한 표정으로 참극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 이게 대체?”
“…칼에 베인 것 같은데, 깔끔하면서도 참혹하군요.”
이토록 무자비하게 베였는데도 저항의 흔적조차 거의 없다니, 기묘하기 짝이 없었다. 크리스토퍼의 옆으로 다가와 동료들의 시체를 살피던 헤네스가 나직이 침음했다.
“어떻게 된 걸까. 왜….”
“뭔가를 찾은 모양입니다. 입막음을 당했을 수도 있고.”
제 손에 들린 장부가 묵직하게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잠시간 묵념한 뒤, 크리스토퍼는 몸을 일으켰다. 원통함과 분노가 묻어나는 헤네스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우선, 빨리 이곳을 떠나죠. 위험할 것 같으니까.”
* * *
사열식이 시작되었다.
병사들이 우렁찬 함성을 자아내며 절도 있게 움직였다. 도시 외곽에 자리한 넓은 벌판에서 마차는 천천히 그들을 살피며 나아갔다. 말을 타고 앞장서는 루이스 케라온의 안색이 미묘하게 어두웠으나, 그의 동작은 완벽했다.
2인용 마차는 결국 사용하지 못했다. 아렌타에서 날아온 제라니아의 전서구를 받은 프란츠는 당분간 아렌타에 머물겠다는 그의 요청을 수락했다. 수도로 올라가는 길에 데리고 가면 되는 일이었다.
공작에게는 제라니아가 친정에 일이 생겨 먼저 보냈다고 둘러대었다. 바이첸 가문은 그가 케라온의 눈을 피해 몰래 출발할 동기로서는 안성맞춤이었다.
군사들의 모습을 곰곰이 살펴보던 프란츠가 입을 열었다.
“대단한 장관이군요.”
그간 봤던 사열식 중 움직임이 가장 군더더기 없었다. 야생마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던 케라온에 이런 면모가 있다니. 깔끔한 평가에 케라온 공작이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으니까요.”
“여전히 마상 시합을 중시하는 모양입니다.”
부상자나 사망자가 많이 나오는 만큼, 크레이츠에서는 마상 시합의 규모를 점차적으로 줄여가고 있었다. 반면 클라단은 여전히 마상 시합이 활발하기로 유명했다. 사망자는 물론, 비공식적인 부상자의 수도 상당할 것이다.
그러고도 이 정도의 숫자라.
프란츠의 눈이 고요히 번뜩였다. 확실히 병사의 수가 기준에서 벗어나지는 않으나, 숙련된 정도를 생각하면 장차 성가시게 될 것 같았다. 클라단을 편입한 건 좋지만 자치권을 준 건 역시 양날의 검이었나. 그의 머리가 바쁘게 굴러갔다.
사열식이 끝난 뒤, 방으로 돌아가던 프란츠의 주머니에서 그를 호칭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거울을 꺼내자 이렌스의 얼굴이 거울에 나타났다. 여전히 이지적이고 냉정한 얼굴로 그가 말했다.
- 전하. 지금 어디십니까.
“아직 클라단이다. 무슨 일이지?”
이렌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곧 그가 입을 열어 말했다.
- 조금 귀찮아질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냐.”
- 직접 와서 보시는 게 나을 듯합니다. 일단은 제 선에서 처리하고 있겠습니다.
의아한 듯 보던 프란츠가 무심하게 고개를 까닥였고, 거울은 곧 평범하게 변했다.
* * *
달이 살짝 이지러진 밤이었다.
“이거 놔!”
제압된 와중에도 발버둥을 치는 남자를 바닥에 꽉 내리누른 채, 벤자민은 턱을 매만졌다.
그는 그저, 수제자인 다니엘과 함께 밤 산책을 즐기고 있었을 뿐이었다. 귀여운 사제들이 다니엘을 통해 맡긴 선물들을 받고 멋쩍어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걸어가다 수상한 사람이 신전의 고위층에게 할당된 숙소에 잠입하려고 시도하던 걸 본 것도, 그걸 보자마자 들고 있던 물건들을 다니엘에게 맡긴 뒤 그를 잡으러 날아갔던 것도 제 탓은 아니라 이거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을 따돌리려고 했다. 노력은 가상하다만, 이 신전에서 제 눈을 피해 도망갈 수 있다 믿다니. 벤자민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어쩌다 운도 없이 나한테 걸려서는.
“스승님, 어떻게 하실 건가요?”
버둥거리는 남자를 보며 쯧, 혀를 차던 다니엘이 가만히 손짓하자 무형의 힘이 그의 머리를 내리눌렀다. 체념한 듯이 힘을 빼는 남자를 안타깝다는 듯이 보던 벤자민이 가만히 팔짱을 꼈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음, 수상한 사람이니까 아비스께 보고해야겠지?”
“너무 건성이시잖아요!”
“단, 너도 나이가 들면 이렇게 될 거란다.”
꼰대 같은 소리를 늘어놓는 제 스승을 다니엘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다니엘이 가져온 밧줄로 남자를 꽁꽁 묶으며 벤자민은 곡조를 흥얼거렸다.
“수상한 인물을 잡았다고.”
잡은 이를 감옥으로 보낸 다음 날, 벤자민은 설렁설렁한 태도로 보고를 올렸다. 책상에 팔꿈치를 세워 손등을 포갠 뒤 그 위에 턱을 괴고 있던 와이엇의 눈이 흥미롭다는 듯 빛났다.
“예, 그렇습니다. 알아보니 이제 막 데리트가 된 사제라고 하더군요. 일단은 감옥에 데려다 놨습니다만….”
수습 사제인 엔데에서 정식 사제인 데리트가 되기까지는 최소 몇 년의 시간을 소요해야 했다.
신전을 구성하는 7할이 엔데이고 데리트로 승격받기 위해 필요한 조건 중 하나가 신실함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건 꽤 놀라운 일이었다. 신전 차원에서 신실함을 인정받은 사람을 첩자로 꼬여내다니.
적어도 이 사제의 뒤에 있는 배후가 신전 탐색에 꽤 공을 들이고 있다는 건 짐작이 갔다.
어쨌거나 무단침입을 한 만큼 심문을 하기는 해야 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걸 보면 쉽게 입을 열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니, 내가 처리하지.”
“직접 말씀이십니까?”
놀랍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는 벤자민에게 와이엇은 온화한 미소를 내보였다. 더 이상 반론을 허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압박에 벤자민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어째서일까. 20년을 가까이 봐온 얼굴인데, 늘 보던 인자한 미소인데, 그가 낯설다 느껴지는 것은.
찜찜함이 제 마음 한구석에 똬리를 트는 것을 외면하며, 그는 등을 돌렸다.
* * *
사열식이 끝나자, 모든 일은 일사천리에 이루어졌다.
아렌타에 들러 제라니아를 데려오고, 그제야 조용히 자초지종을 듣던 프란츠는 다치지 않았으면 되었다는 말을 남겼다. 파티에서 만난 크리스토퍼에 대해 추궁하자 그는 선선히 자신이 그들을 보냈음을 시인했다.
설명이 없는 건 여전했다.
왕세자의 행렬이 수도인 카암에 도착했다. 미리 정해둔 길로 나아가는 그들에게 환호성이 쏟아졌다. 물을 엎듯 수많은 시선이 그들에게로 와르르 쏟아졌다.
이상함을 느낀 건 왕성에 도착해서였다.
분위기가 영 뒤숭숭했다. 목에 사탕이 걸린 것처럼, 마냥 환영하는 것 같지는 않은 묘한 시선들. 기대를 담은 듯하면서도 저들끼리 속살거리는 모습이 가시처럼 가슴을 따끔따끔 찔렀다.
분명 환대하는 자리임에도 어째서 이토록 껄끄러운 느낌이 가득한 걸까. 제라니아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분위기가 왜 이러죠?”
프란츠 역시 모르겠는지 고개를 내저었다.
의문은 세자궁에 가서야 해소되었다.
마차에서 내려 세자궁으로 들어가자, 응접실에 미리 도착해 있던 이렌스가 그들을 맞이했다. 덤덤한 얼굴로 찻잔을 내려놓은 그가 이제 오셨냐며 태연하게 말했다. 설명을 요구하자 이렌스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오실 때 분위기를 보셨습니까.”
프란츠와 시선을 교환한 뒤 제라니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렌스는 지체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왕성은 물론, 수도에 국왕 폐하께서 병세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이 파다합니다.”
더없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이렌스의 태도에 제라니아는 불길함을 느꼈다. 고작 그것만이라면 방금 전과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을 리 없다. 긴장한 듯도, 꺼려하는 듯도 했던 사람들의 표정과 눈빛.
역시나, 이렌스는 재차 덧붙였다.
“거기, 전하께서 연관이 되어 있으시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이렌스가 말에 방점을 찍는 것과 동시에, 제라니아의 눈빛이 딱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