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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72화 (73/171)
  • 제72화. 수상한 가면무도회 (5)

    지그시 자신을 바라보는 제라니아에게 크리스토퍼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것만 가지고 나가기로 했잖아. 이 이상 지체하는 건 위험해.”

    “계획이 있어.”

    “계획?”

    제라니아의 설명을 들은 크리스토퍼가 떨떠름한 낯으로 말했다.

    “너 진심이야?”

    “응. 그러니까, 날 도와줄래? 아니면 나 혼자서라도 어떻게든 할게.”

    스스럼없이 도움을 요청하면서도,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이는 제라니아를 보며 크리스토퍼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겠다 싶었는지 수락했다. 물론, 위험해지면 바로 중지하고 도망가자는 약속을 받아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방 밖으로 나가자 바닥에 누워 있는 남자의 시체가 눈에 띄었다. 크리스토퍼가 그 시체를 짐짝처럼 들어 제 한쪽 어깨에 둘러멨다.

    “데리고 갈 거야?”

    “그럴 리가. 저 방에 넣어두려고. 잠시 눈속임은 되겠지.”

    그가 성큼성큼 걸어가 방 안에 마련된 책상에 시체를 기대어 앉힌 뒤 나왔다.

    집무실에 자리하고 있는 시계를 힐끗 살펴본 두 사람은, 파티가 재개되기까지 20분밖에 남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같이 온 동료가 한 명 있어. 그 녀석이랑 조금 있다 합류할 거야.”

    제라니아는 다시금 책을 꽂아 방을 원래 상태로 만든 뒤, 적당한 장식물 하나를 집어 들고 등불을 껐다. 집무실 밖으로 나와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조용한 복도를 걷던 차, 계단 아래쪽에서 불빛과 함께 누군가의 음성이 들렸다.

    “아니,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곧 다음 경매를 시작해야 하는데!”

    이게 무슨 일이냐며 투덜거리는 남작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재빨리 근처에 있는 방 중 하나를 열어 그 안으로 몸을 숨겼다.

    “아직도 찾지 못했나? 변덕이 들끓는 건 여전하군.”

    “사람을 풀었으니 곧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목소리만 들어도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아까는 그렇게 공손하게 말하더니, 그렇게 화기애애한 사이는 아닌 걸까.

    발소리가 사라졌을 즈음 둘은 다시 계단을 내려가, 2층 왼쪽 복도 끝에 자리한 방에서 크리스토퍼의 동료인 헤네스와 조우했다. 그는 크리스토퍼와 같이 온 제라니아에 놀랐지만, 설명을 듣고 곧 고개를 끄덕였다.

    “역겨운 인간들 좀 골려준다고 신이 벌을 내리지는 않겠죠.”

    헤네스가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그가 확고한 무신론자라는 걸 아는 크리스토퍼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들은 계속 밑으로 내려가다가, 중간에 마주친 병사를 때려눕힌 다음 옷을 갈아입었다. 거추장스러운 드레스 자락을 꼭 움켜잡으며 제라니아는 기사들을 조금 부럽게 쳐다보았다.

    지하 감옥에서의 일은 조금 더 수월했다. 남작의 명이라는 말로 감옥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을 유인해낸 뒤 기절시키고, 문을 열어 노예들을 해방시켰다.

    감옥의 문을 전부 열어젖힌 후, 어둠 속에서 두려움과 반항심으로 똘똘 뭉친 수십 쌍의 시선 앞에서 제라니아는 조용히 지시했다.

    “문을 열어줄 테니, 저택을 나선 다음 바로 오른쪽에 보이는 성을 향해 있는 힘껏 달려가세요. 당신들을 도와줄 사람이 거기 있을 겁니다.”

    반응은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불신에 가득 찬 눈을 하고 있는 이도, 고개를 끄덕이는 이도 있었다.

    믿느냐 아니냐는 이제 그들의 몫이었다.

    앞장서 위로 올라간 기사들이 후문 쪽에 서 있는 병사들을 소리 없이 제압했다. 문을 열자 시원한 밤공기가 얼굴을 흠뻑 적셨다.

    헤네스에게 그들을 부탁한 뒤 제라니아와 크리스토퍼는 서둘러서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오르자마자 남작과 함께 복도 양옆으로 달려오는 병사들을 본 크리스토퍼가 제라니아의 손에서 장식품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그걸, 있는 힘껏 창문으로 던졌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창문이 깨지고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자신을 찌르려는 병사의 창을 칼로 막아 튕겨내며 크리스토퍼는 제라니아를 등에 업었다.

    “꽉 잡아!”

    그 말과 함께 그는 있는 힘껏 달려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크게 점프한 그가 바로 앞에 보이는 나무 위로 무사히 안착했다. 그런 그를 쫓아 창문 앞으로 뛰어가던 병사들의 시야가 확 밝아졌다.

    “으아악!”

    불붙은 화살이 병사 중 한 명의 어깨를 꿰뚫었다. 반응할 틈도 없이 불화살이 몇 발 더 날아왔다. 창문 안쪽으로 날아든 화살의 불이 목재로 된 패널에 달라붙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비명 소리를 좀먹으며 불꽃이 화르르 병사의 몸을 태웠다. 뜨거운 열기가 사방으로 번졌다.

    “불이야!”

    누군가의 고함 소리와 함께 병사들의 얼굴에 하나둘씩 당황이 서렸다. 새빨간 혀를 날름거리는 불꽃이 그런 그들의 표정을 고스란히 내비쳤다.

    저택 밖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리암은 그제야 활을 내렸다. 말에 탄 채로 왼편에 자리한 나무를 돌아보는 그의 귓가에 제라니아의 목소리가 떠돌았다.

    ‘밖에 있는 마부를 만난 다음, 일단 마차를 후작가 근처로 보낸 뒤 조용히 대기하라 해. 기사들도 같이.’

    ‘후작가로?’

    ‘응. 그리고, 활이랑 화살, 천과 기름, 부싯돌을 가지고 너만 혼자 남아 있어. 말도 같이 데리고.’

    마차 의자 아래에 숨겨둔 무기들을 헤아리고, 제라니아는 산뜻하게 말했다.

    ‘저택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어줘. 위치는 동쪽 벽. 신호로 창문을 깰 테니, 정확히 30초를 센 뒤에 거기로 불화살을 쏴.’

    ‘저택에 불을 지르겠다고?’

    ‘소동을 벌일 정도는 되겠지.’

    원래는 불을 질러 병사들의 시선을 끈 뒤, 그 틈을 타 리암과 합류해 지하로 내려가 노예들을 밖으로 내보낼 계획이었다.

    창문을 깨는 건 신호를 보내기 위함도 있었지만, 괴한이 나타나 3층으로 올라갔다는 거짓말을 하기 위한 발판이기도 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손님이니 병사들은 제 말을 믿을 터.

    사람들이 괴한을 찾느라 우왕좌왕하는 동안 지하로 가서 노예들을 꺼내준 뒤 후문 쪽으로 데려가는 것이 목표였는데…. 크리스토퍼와 만난 덕에 계획이 조금 변경되었다.

    나무를 타고 크리스토퍼와 함께 무사히 아래로 내려온 제라니아는 품에 넣어두었던 책을 그에게 넘겼다. 그걸 받아 드는 크리스토퍼의 손을 본 제라니아가 중얼거렸다.

    “…너 손이.”

    “괜찮아.”

    맨손으로 나뭇가지를 붙잡은 탓인지 그의 손바닥이 엉망으로 까져 있었다. 덤덤하게 말하는 크리스토퍼의 머리 위에서 불길이 거세게 용솟음쳤다. 생각보다 화재의 규모가 커질 것 같았다.

    “야!”

    익숙한 목소리에 제라니아는 고개를 돌렸다. 말에서 뛰어내린 리암이 제라니아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다치지는 않았나, 제라니아의 몸을 꼼꼼히 확인하며 리암이 어깨를 꽉 잡았다.

    “뭐야! 너 어떻게 밖으로…. 저 사람은 누구야?”

    얼굴을 가린 터라 알아보지 못했는지, 경계하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는 리암에게 대답을 주는 대신 제라니아는 크리스토퍼와 시선을 마주했다.

    “크리스, 갈 곳이 있어?”

    “…약속 장소가 있어. 거기로 갈 거야.”

    “그럼 여기서 헤어지자. 헤네스 경한테는 내가 말해둘게.”

    “그래.”

    그 말을 마지막으로, 크리스토퍼는 저 멀리 보이는 골목 쪽으로 사라졌다. 제라니아 역시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리암을 말이 있는 쪽으로 이끌었다.

    “우리도 어서 가자!”

    저택을 집어삼키며 타오르는 불꽃은 저 멀리 성에까지 선연하게 보였다. 잠자리에 들려던 후작은 문을 두드리는 부하로 인해 도로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각하.”

    “무슨 일이냐.”

    “노예로 보이는 이들이 성 앞에 모여들고 있습니다.”

    부하는 저택에 불이 났다는 보고 역시 짤막하게 전했다. 후작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으며 제 콧수염을 쓰다듬었다.

    “다시 잡아들여라. 언제부터 이런 일에 일일이 내 명령을 기다릴 만큼 눈치가 없었지?”

    “예, 다만 그게…. 찾아오신 손님이 계십니다.”

    “손님?”

    상대의 이름을 들은 후작의 동공이 크게 뜨였다. 그는 재빨리 채비를 갖추고 마당으로 나왔다. 병사들이 들고 있는 횃불이 마당을 낮처럼 환히 비췄다.

    꾀죄죄한 차림새를 한 노예들의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기사들을 뒤에 대동하고, 자주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갈색 머리칼의 여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신가요, 후작 각하.”

    “…비전하?”

    예상치 못한 상대가 그의 눈앞에 서 있었다. 시찰 중인 왕세자비가 왜 이곳에 있단 말인가. 지금쯤 클라단에 있어야 마땅할 터인데!

    후작은 동요했으나 얼굴만은 철판을 깐 듯 태연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제라니아의 손등에 입을 맞춘 그가 대답했다.

    “어인 일로 여기까지 행차하셨습니까. 오실 거라고 연통을 주셨다면 극진히 모셨을 텐데요.”

    “급한 일이 있어 근처에 있는 도시에 들렀다 돌아가던 차라, 구태여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뭔가 난리가 난 듯하여 따라와 봤습니다만…. 이게 무슨 소란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지만, 후작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새치가 듬성듬성 섞인 새까만 머리카락과 매부리코, 부리부리한 눈에 입이 큰 남자의 얼굴은 티레인과 많이 닮아 있었다.

    “저도 지금 소란을 듣고 나오는 길입니다. 노예들이 왜 이 성으로 몰려든 건지 당최 영문을 알 도리가 없군요.”

    “노예들이라…. 그들을 노예라고 단언하시는 게 신기하네요.”

    “딱 보기에도 그래 보이지 않습니까.”

    능구렁이처럼 시치미를 떼는 후작의 얼굴을 살피는 제라니아의 눈이 아주 살짝 가늘어졌다. 후작이 재차 말을 이었다.

    “귀하신 분께서, 왜 이런 노예들을 신경 쓰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노예 매매가 법적으로 금지된 건 아닐 텐데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아까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재미있는 사실을 알아내서요.”

    제라니아의 손짓에 노예들 중 소녀 하나가 다른 소년을 끌고 앞으로 나섰다. 이제 열둘쯤 되었을 법한 소녀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소녀가 덜덜 떨리는 손을 소년의 다친 팔 위에 얹자, 순식간에 상처가 아물어갔다.

    치유 마법이었다.

    “마법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신전의 관할로 들어간다. 그게 왕국의 법이죠. 그들은 노예가 되었다 한들 그 권한의 1순위는 신전에 있으며, 의무적으로 신전에 마법사의 존재를 신고해야 합니다.”

    차분히 말을 꺼내는 제라니아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이 소녀가 마법을 사용할 줄 안다는 걸, 노예상들 쪽에선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는 왕국법에 의거하여 극형에 처해질 중죄인 걸로 기억하는데, 각하의 생각은 어떠하신가요?”

    싱긋 웃는 제라니아의 의도를 깨달은 후작은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기분이 되었다.

    당했군.

    “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공손하게 대답하는 후작에게 제라니아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그 노예상들을 수배해야 할 것 같으니, 각하께 협력을 요청하고자 합니다.”

    방에서 찾아낸 장부에는 후작이 이 일에 관련되었다는 증거는 일절 존재하지 않았고, 이는 장부를 찾기 전부터 예상했던 바였다.

    잡아들일 수 없다면 이용해야지. 철저하게.

    “아, 물론. 각하의 충정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설마 각하께서도 본인의 영지 한복판에서 이런 불상사가 벌어지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셨을 테니까요.”

    탈옥은 차라리 쉬웠고, 그다음이 문제였다. 노예들이 다시 붙들려 끌려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후작을 끌어들이는 편이 나았다.

    협력하지 않는다면 결백을 의심받을 테니까. 노예들의 안전을 살뜰하게 생길 수밖에 없겠지.

    부드러운 음성으로 경고하는 왕세자비의 눈빛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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